제130화.
철퍽, 하는 둔탁한 소리에 아드리안이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았다. 그가 사색이 된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왔다.
엘리는 계속 엎드려 있다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 올렸다. 흙이 묻은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생채기만 나 있을 뿐 아주 멀쩡했다.
아드리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나무랐다.
“놀랐잖아요! 왜 갑자기 나무에서 뛰어내립니까?”
엘리는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헤이워드 씨…, 저 다리가 안 움직여요.”
아드리안의 얼굴이 이번에는 정말로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품에 있던 책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고, 이내 그녀를 조심스럽게 업고는 농장을 정신없이 가로질러 달렸다.
그는 발로 현관문을 차고 들어가서는, 깜짝 놀란 집사에게 의사를 데려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집사는 농장 사람들에게 시어스 양이 다쳤다는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며 마구간지기에게 체스넛힐즈로 말을 몰고 가 의사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엘리는 겁에 질린 채로 응접실 소파 위에 바른 자세로 누웠고, 아드리안은 자책하는 얼굴로 창가를 바라보고 섰다. 의사가 오지 않는지 계속 확인하는 눈치였다.
곧이어 마거릿과 맥케이 씨, 눈물범벅이 된 달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응?”
“나무에서 떨어졌습니다. 다리가 안 움직인다는군요.”
놀란 마거릿이 엘리의 손을 잡고 묻자 아드리안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매사에 무신경한 사람답지 않게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창가 앞을 서성이며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낯선 기색을 알아본 맥케이 씨가 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리며 무어라 속삭였지만, 아드리안은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 체스넛힐즈의 장원에서 의사가 마구간지기와 함께 나타났다.
의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곧장 엘리에게 달라붙어 발목을 움직여 보고 정강이를 주물러 보면서 상태를 점검했다. 왼쪽 발목에 찌릿하며 통증이 밀려들자 엘리는 본능적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드리안이 어깨를 움찔하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몇 가지를 더 검사하던 의사는 천천히 그녀의 발치에서 일어섰다.
“낙상할 때 충격으로 근육이 잠시 놀란 것뿐입니다. 왼쪽 발목을 심하게 접질리긴 했지만 부러진 건 아니고요. 크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도 당분간 무리한 운동은 삼가고 웬만하면 그냥 앉아 있으세요.”
의사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설명하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위중한 환자가 있다기에 급하게 달려왔는데, 예상보다 굉장히 소소해서 심술이 난 것 같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드리안도 숨을 크게 내쉬며 근처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앞머리는 식은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얼마간 고개를 젖혀 불규칙한 숨을 고르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떠났다.
엘리는 비척거리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묘한 감상에 빠졌다. 죄책감과 걱정에 평정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그의 안쓰러운 모습이 떠오르자 분노는 차츰 누그러지고 있었다.
***
엘리는 의사의 조언대로 얼마간 소파에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흐르자,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고 곧 왼쪽 발을 절뚝이며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녀가 소파에 앉아서 마거릿이 끓여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체스넛힐즈로부터 작은 바구니 하나가 도착했다. 전령이 건넨 바구니 안에는 귀한 허브가 잔뜩 들어 있었다.
-통증 완화에 좋다는 허브입니다. 쾌유를 빌게요. -체스넛힐즈.
엘리는 허브 위에 올려진 쪽지를 읽으면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닌 척 힘들게 필체를 꼬아서 쓰긴 했지만, 엘리는 단번에 에인절이 쓴 쪽지라는 걸 알아보았다.
한참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던 그녀는 케이시에게 허브를 주방에 가져다주라고 부탁했다. 요리사가 어떻게 해서든 처리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그날 저녁으로 허브차가 끊임없이 올라오는 바람에 엘리는 곤욕을 치렀다.
“웬 허브차지?”
“시어스 양께서 받아오셨다던데요.”
맥케이 씨의 물음에 식사 시중을 들던 루커스가 엘리를 보며 대답했다. 식탁의 모든 이가 그녀를 쳐다보자, 엘리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체스넛힐즈로부터 왔어요.”
“체스넛힐즈? 그 양반들이 왜? 그것보다 자네가 다친 건 어떻게 알지? 영지민들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작자들인데.”
궁금한 건 엘리도 마찬가지였다. 에인절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다친 소식을 접해서 어떤 경로로 귀한 허브를 잔뜩 찾아왔는지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공연히 스튜를 뒤적거렸고, 맥케이 씨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에인절이 보냈다는 내막을 모르는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는 수상한 감이 없지 않았다.
농장주의 딸인 달리아라면 모를까, 일개 사용인 하나가 다쳤다는 이유로 값비싼 허브를 보내주는 장원의 주인들이 과연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물며 그들은 농장의 초대도 단칼에 거절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맥케이 씨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체스넛힐즈의 노부부에게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침없이 땅을 파는 사냥개처럼 자신의 추리를 본격적으로 꺼낼 작정인 듯 엘리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녀가 난감해하면서 어깨를 움츠릴 때, 허브차를 홀짝이던 달리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허브차를 마시면 정말 다리가 나아요? 그럼 사흘 뒤에 열리는 음악 발표회 모임에 갈 수 있어요?”
엘리는 달리아의 말에 아연실색하며 자신의 부은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음악 발표회 모임을 깜빡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실망감이 와락 밀려들어 엘리는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절망한 기색을 읽은 맥케이 씨가 금세 허브 사건은 잊어버리고 그녀를 달랬다.
“어쩌면 나을지도 모르지. 사흘 뒤엔 그것보다 상태가 괜찮아질 거야. 누가 부축만 해준다면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엘리는 맥케이 씨를 침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자신을 부축해서 모임까지 데려가 준다는 말인가? 그녀는 다시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맥케이 씨는 대놓고 아드리안을 힐끔거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접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맥케이 씨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아드리안의 입장이 이해됐기 때문에 마음이 더 복잡했다.
음악 모임이라면 틀림없이 헤이워드 가 사람들도 참석할 것이었고, 아드리안은 모욕을 더 당하려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맥케이 씨는 자신이라도 함께 가서 그녀를 부축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롬에게서 수치를 당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귀족들만 모인 곳에 참석하기에는 용기가 한참 부족했다.
달리아가 자신이 부축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섰지만, 엘리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여자애가 나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좌중이 침묵을 지키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해결책을 찾는 척하고 있을 때, 맥케이 씨의 잔에 물을 채워주던 루커스가 말했다.
“제가 부축해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맥케이 씨는 루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확실히 다부진 체격의 소년이었다. 게다가 일일 시종처럼 엘리가 데리고 다니면 면이 설 것 같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맥케이 씨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하고 소리치려고 할 무렵, 아드리안이 빠르게 말을 꺼냈다.
“제가 가겠습니다.”
느닷없는 그의 말에 엘리는 깜짝 놀라서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곧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또다시 그가 뺨을 얻어맞거나 모욕을 당할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딱 모임 장소 앞까지만 데려다줄 겁니다. 그다음엔 제롬 로베르가 알아서 시어스 양을 데리고 다니겠지요. 저는 그동안 마차에서 책이나 읽을 겁니다. 그리고 시어스 양이 귀가할 때쯤에 다시 들어가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맥케이 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드리안이 헤이워드 가 사람들을 쉽게 마주치지 못할 것 같았다.
엘리 역시 멍청히 아드리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못 본 척 식기를 열에 맞춰 정리할 뿐이었다.
***
음악 발표회 모임 당일, 엘리는 아드리안의 부축을 받고 마차에 올랐다.
문득 그녀는 처음으로 마차에서 아드리안의 에스코트를 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그것으로 농담을 던지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드리안은 심각하게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는 손바닥에 턱을 묻고 창가만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엘리는 너무나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나무에서 떨어진 것은 그의 잘못이고 그래서 자신을 부축해 주는 임무를 받은 것도 그의 책임이라고 합리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은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는 것만 도움을 받고 모임이 열리는 사교장까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엘리의 다리 문제로 출발이 지체된 탓에 그들은 가장 늦게 도착했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착해서 사교장 안에 들어가 있었고, 그들의 마차만이 덩그러니 저녁의 암흑 속에 멈췄다.
아드리안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달리아를 내려준 다음, 그는 엘리의 손을 잡고 부축해 주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가 아찔한 통증에 비명을 겨우 집어삼켰다. 그녀의 칠칠치 못한 행동에 아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엘리는 예전의 사이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에 잠시 즐거웠으나, 아드리안은 곧바로 쌀쌀맞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와 함께 걸음을 내디디려던 엘리는 걸음을 멈췄다.
“헤이워드 씨, 여기서부턴 제 힘으로 갈 수 있어요. 마차에서 쉬세요.”
“그런 몸으로 어떻게 혼자서 가려고요? 괜한 오기 부리지 마세요.”
그는 엘리의 팔을 고집스레 붙들고 사교장의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달리아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오며 엘리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었다.
엘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른 입구까지만 데려다주고 아드리안은 빨리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엘리는 조금 더 빠르게 걸었고, 아드리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결국 둘은 보폭을 맞춰서 함께 걸었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서로에게 몸을 기댄 다정한 연인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입구의 앞에 무사히 다다랐고, 엘리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드리며 아드리안에게 인사를 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입구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노인 하나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다가 입술에서 떼고는 아드리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친 아드리안의 안색 역시 새파랗게 변했다.
어째서 대부분의 우연한 만남은 악연에서 비롯돼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일까. 엘리는 그 노인이 바로 그때 아드리안을 때렸던 외조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아드리안을 밀어내며 가라고 말하려는데, 노인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그에게 날쌔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드리안이 그녀를 뒤로 밀었다.
엘리는 주춤거리며 밀려나서 달리아를 자신의 뒤에 숨기고는 그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노인이 잇새로 조용히 말을 내뱉는 게 들려왔다.
“정말로 내 한계를 시험하고 싶나 보군. 맞아야 정신 차리는 건 어릴 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노인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