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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29화 (129/148)

129화

여름의 끝자락, 에오넬 황제의 탄신 연회가 황궁에서 크게 열렸다.

해가 질 무렵부터 황궁의 이스트 에메랄드 홀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든 참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파티에 고위 인사들은 물론 외국 사신들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파티. 황도와 교류가 별로 없는 지방의 귀족들에게 이런 기회는 고작해야 한 해에 두 번이 다였다.

연회가 정식으로 개최되기 한 시간도 전에 벌써 메인 홀이 북적거렸다.

나는 이스트 에메랄드 홀의 3층에 마련된 내 개인실에서 파티장에 나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료한 시간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근무가 걸린 시녀들과 호위 기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그렇게 30분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전하, 1층 메인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1층 홀을 지켜보던 시녀가 슬쩍 들어와 말했다. 페일이 도착했다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 비번이었으며 평범한 귀족 자격으로 참석했다.

“불러와.”

곧 그가 내 개인 휴게실로 올라왔고 나는 빠르게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변동 사항은?”

“없습니다.”

문 안팎으로 내 궁의 사람들이 아닌 낯선 하인, 하녀들을 비롯해 듣는 귀가 많아서 자세한 말은 서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서로 정확히 알아듣고 있었다.

페일이 제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는 시각은 밤 10시. 여전히 프라이빗 가든의 3번 구역이라는 뜻이었다.

혹시 몰라 섀도 나이트 시켜 미리 그 장소를 조사했을 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역시 페일이 직접 나가 봐야 알게 되는 걸까.’

“흠…… 그래? 그럼 내일 내가 갈 곳이 좀 있어서. 한 시간만 일찍 입궁할 수 있겠나?”

뭔지는 몰라도 내일이 되면 알겠지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를 조금 일찍 불러낼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가 봐.”

그가 나가고 곧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각에 맞추어 홀에 나갔다.

할바마마께서는 이미 홀의 상석에 앉아 연회장을 둘러보고 계셨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저께 황궁으로 돌아오셨는데 조만간 다시 쉬겠다며 어딘가 휴양지로 또 떠나실 것 같다.

할바마마께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 보니 키옌 태후 또한 대외적 이미지를 신경 쓰느라 상석에서 거의 벗어나지를 못했다.

나는 외국 사신들을 상대하고 있는 고모님을 한번 힐끔 쳐다본 다음에 내 근처로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귀족들을 상대했다.

내 또래의 귀족 영윤들, 영애들은 대부분 고만고만한 수준의 귀족들끼리 모여 있었다. 이따금 춤을 추러 홀 가운데로 나갔다 오는 경우도 있었고, 몇몇은 자신의 가문보다 작위나 명성이 월등히 높은 무리 사이에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새 나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이들과 민티아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무리가 자연스럽게 섞여들면서 민티아와 마주치게 되었다.

민티아가 먼저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으로 아주 살짝 자세를 낮춘 그녀는 턱 끝을 살짝 당기며 옆으로 기울였다. 시선을 내리며 허리나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정통 예법서 같은 방식과는 살짝 거리가 있지만 굳이 지적하기에는 모호할 정도의 오만함이 그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이제야 보는군요. 체리에 영애.”

대신에 나는 연회가 시작된 지도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도의 유력 귀족 가문이, 그것도 황실의 인척 가문인 체리에의 영애가 제1황위 계승권자에게 먼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그렇다고 굳이 얼굴을 비춰야 한다는 건 아니다. 우리의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배경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내게 아무래도 상관없을지 몰라도 그녀에게 유리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티아는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혹시 저를 찾으셨던 건가요?”

그녀는 오히려 피하지 않고 우리가 용무 없이 대화를 섞을 사이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쳤다. 그러면서도 내가 마치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처럼 굴었다.

“할마마마께서 요즘 영애의 약혼 문제로 근심이 많으시다고 들었거든요.”

“염려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희 가문의 일입니다.”

그녀는 딱 잘라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 말했다. 그녀가 약혼을 하든 말든 그걸로 키옌 태후가 어찌하든 그건 사실 나도 관심 없다.

물론 그녀가 어느 가문과 약혼을 할지에 따라 앞으로 정치 경제의 판도가 좌우될 테니 모든 귀족의 초유의 관심사는 맞았다. 다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 외에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일 뿐이다.

“알고 있어요. 약혼은커녕 아직 어느 가문과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길어지니 쓸데없는 소문이 나는 것 같아서요.”

내가 이 주제를 이런 자리에서 직접 언급할 줄은 몰랐는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작게 놀랐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나온 내 발언 때문에 후에 뒷말이 돌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도 그런 말 돌면 어떤가. 어차피 상처 하나 없이 적을 상대한다는 건 오만한 짓이다. 각오하고 있었다.

민티아가 이를 꽉 물며 다음 할 말을 찾아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를 도와줄 어른은 없다. 지나치게 넓은 홀은 나이도 신분도 비슷비슷한 이들끼리 뭉쳐 서로의 무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국내외의 사업이나 정치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우리처럼 데뷔탕트를 치르고 혼인은 아직 하지 않은 애들의 시시콜콜한 유행 이야기나 약혼자,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에 어른들은 관심이 없었다.

민티아는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을 찾아 눈알을 굴리는 듯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편들겠다 나서 주지 않았다.

사실 누군가가 “그런 헛소문을 전하께서 설마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라고 대신 말한다면 몰라도 그걸 민티아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런 소문은 그녀가 모르는 척해야 나을 테니까.

차라리 상대가 다른 귀족이라면 몰랐겠다. 그러나 감히 누구도 계승 서열 1위의 황녀와 대놓고 맞서려 하지 않았다.

황도 내에 거주하는 이들은 이야기의 주제를 눈치챈 듯 숨을 죽였고, 지방에서 오늘을 위해 올라와 소식에 늦는 이들은 무슨 소문인지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민티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소한 부분에서도 허무맹랑한 말들로 둘러싸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아직 약혼 전이시니 저와 비슷한 일을 겪고 계신 거겠죠.”

마치 소문을 알고 있으며 시간이 해결할 루머라서 대처하지 않고 있다는 말로 회피하려는 듯했다. 당연히 그런 의미라 생각하려던 찰나 갑자기 의아해졌다.

그녀가 말한 ‘비슷한 일’이라는 것이 그녀와 로이드와 나 사이의 삼각관계를 지칭한다고 하기엔 조금 다른 결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발언에 민티아와 로이드에 대한 소문을 아는 이들은 나처럼 순간적으로 로이드를 떠올린 듯했다. 그러나 이내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지 다시 웅성거렸다.

이번에는 내 입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기울었다.

“글쎄, 잘 모르겠군요. 허무맹랑한 말들로 둘러싸이기엔 제 모든 행동에 워낙 제한이 많아서요. 제가 어딜 가고 누굴 만나는지 모든 것들이 황궁의 일지에 전부 기록되니 그럴 일은 없었네요. 제가 황궁 밖에서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일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그게 결코 자유로운 건 아니거든요.”

이것이 이번 사건에서 그녀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고 내가 그녀에게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황족인 나는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사람을 부르면 그가 누구인지, 몇 시에 입궁하여 몇 시에 퇴궁했는지, 알현 목적이 무엇인지 전부 출입지에 남았다.

그건 내가 나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몇 시에 출궁하여 몇 시에 돌아왔는지, 어디서 누구를 왜 만나는지, 그리고 내가 데리고 나간 시녀와 호위 기사들 심지어 마부가 누구인지까지도 전부 기록된다.

여느 귀족 영윤, 영애들처럼 갑자기 친구가 만나자고 편지나 하인을 통해 말을 전했다며 부모님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마차 타고 나갔다 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때문에 황족은 이런 종류의 구설에 오를 일이 역사적으로 별로 없었다. 설령 오르더라도 사실인 경우가 더 많았고 만약 억울했다 하더라도 그건 그들의 권력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귀족들은 이런 소문에 취약했다.

당당한 내 태도에 민티아는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파티 시작 전에 전하의 개인 휴게실에 누군가 은밀히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좀 있답니다.”

‘와, 이걸 이렇게 엮으려고 하네.’ 그녀 나름의 임기응변이었다. 대화의 주제를 비틀어서 역공하는 건 그녀가 꽤 잘하는 일이었다.

아마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 처음의 소문은 잊히고 내가 누구를 은밀히 불러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어찼을 터였다. 내가 불렀던 사람이 페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내가 그를 왜 찾았는지 궁금해질 거고.

“제 휴게실 입구는 여기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나는 홀의 양쪽 끝,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2층까지는 난간형으로 오픈된 형태의 계단이고 귀빈의 자유 휴게실이라 전부 보인다 하더라도, 황족의 개인 휴게실은 올라가는 계단조차 잘 보이지 않는 3층에 있었다.

“전하의 시녀가 사람을 데려가는 것까지는 잘 보이는 곳이죠.”

아무래도 자신이 궁지에 몰릴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도 목격한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몰아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까 허무맹랑한 소문에 휩쓸리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까지 해놓았으니 아니면 말자는 식으로 배 째라 이거지.

빠르게 계산을 마친 나는 되물었다.

“제가 누구를 은밀히 만났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멀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차림으로 보아 오늘 파티에 참석하신 우리 또래의 어느 가문 영윤 같았습니다.”

“세르피스 후작가의 제 사촌들일 수도 있고 크로이젠 영윤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내가 은밀하게 누군가를 내 방으로 불렀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민티아가 안타깝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유명인사들이셨다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영애 말대로 제 방에 사람을 부른 건 맞습니다. 굳이 나이와 성별을 따지자면 우리 또래의 남성도 맞고요. 그런데 은밀하게 부른 건 아닙니다. 은밀하게 불렀는데 본 사람이 좀 된다는 영애의 말은 어폐가 있네요. 제가 사람을 은밀하게 부를 생각이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더 은밀하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참 오해하기 좋은 단어네요.”

내가 공격적으로 나가자 민티아는 움찔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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