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엘비어스가 찾아온 건 내가 황도로 돌아오고 이틀이 지나서였다.
“제 할아버님을 뵙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그럼 사적인 일은 잘 확인하고 오셨습니까?”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잘 해결했느냐, 잘 마무리했느냐도 아닌 ‘확인’이라 내가 뭘 하고 온 건지 아는 눈치였다.
“대충 찔러 봤는데 맞는가 보군요.”
나는 그제야 내 실수를 깨닫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엘비어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롭게 웃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걸 얘기하러 온 것 같지는 않고, 로이드 님 일?”
“아뇨, 두 가지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일단 페일에 관해서 말입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엘비어스를 쳐다보았다. 페일이 내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걸 내가 엘비어스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엘비어스는 다짜고짜 페일을 입에 올리고는 내게 이미 다 안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내 호위가 왜?”
“태후가 시킨 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으니.”
나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엘비어스는 여전히 의뭉스러웠다.
“계속 말해 봐. 자세히.”
“최근 황도에 도는 제 동생과 체리에 영애에 대한 소문을 다른 가짜 염문설을 뿌려 덮으려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페일에게는 일단 시킨 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전하께서 그곳에 나타나지만 않으시면 되니까요.”
“그건 그대의 추측이잖아. 태후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어.”
“설령 제 예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페일은 아직 쓸모가 많습니다. 일단은 의심받지 않도록 해서 최대한 저쪽 정보를 뽑아 먹는 편이 좋겠지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의심스러운 자는 적당히 둘러대고 쫓아내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전하의 철학과 거리가 너무 멀겠지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내 책사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좋아. 그대의 조언대로 하겠다.”
나는 숨을 한 번 쉬고 다른 것을 물었다.
“엘비어스, 그대는 이걸 어떻게 알았지?”
“저야 첩보 전문가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가 슬며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전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전하와 저희 가문 사이의 이중스파이가 그쪽 방면으로 꽤 유능하다는 거요. 전하께서는 이미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혹시 모른다면 알려 주라고 하더군요.”
“푹 쉬러 멀리 갈 거라고 하더니, 내게 거짓말을 했군.”
내 말이 끝나자 엘비어스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작게 한숨을 쉬었다.
“푹 쉬려고는 했을 겁니다, 아마.”
명치에 자갈이 얹힌 듯 걸리적거렸다.
“다음에 또 연락이 닿거든 쉬라고 전해. 못 쉬었다고 휴가 더 달라고 해도 소용없으니까.”
내가 무심한 듯 흘린 말에 엘비어스는 착실히 대답했다.
“언젠가 연락이 닿으면 전하겠습니다.”
“할 이야기가 두 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나머지 하나는 뭐지?”
“아, 그거요. 할아버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로이드 대신에 알테어를 달라고 하셨다던데 맞습니까.”
“맞아. 로이드는 파혼을 원해. 그리고 내게는 크로이젠이 필요하고. 그러니 로이드가 빠져나간 자리를 그대 가문에서 책임지고 메꿔 줘야겠어.”
내게 크로이젠이 필요한 것도 맞지만 사실 황실과 파혼이 나서 아쉬울 건 크로이젠 쪽이 더 컸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는 거였다.
“로이드가 파혼을 원해서 이번 일을 벌인 건 압니다. 그러나 파혼을 원한 건 전적으로 로이드 혼자였습니까? 전하는 왜 로이드가 파혼하자는 걸 받아들였습니까? 지금처럼 밀어붙여도 됐습니다. 귀족들의 결혼 시장에서 차남의 가치는 삼남보다 월등히 높으니까요. 전하께서는 이런 손해날 짓을 하시면서 약혼 상대를 바꾸는 것으로 어떤 걸 기대하시는 겁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알테어는 로이드보다 괜찮은 상대일 거라고 장담하십니까? 아니면…… 도박입니까?”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로이드와 파혼한다는 사실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정작 중요한 건 잊고 있었다. 과거의 좋지 못한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기만 했지 그다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엘비어스 말대로 도박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혼란을 전할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정작 나오는 말은 형식적인 것뿐이었다.
“이 정략혼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로이드든 알테어든 내겐 상관없지.”
어차피 내게도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상관없다고요? 전하께서는 로이드와는 꽤 오래 알고 지내셨으니 로이에 대한 건 많이 알고 계시죠. 그런데 알테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십니까? 아니, 그 녀석을 알긴 하십니까? 전하께는 상관없을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그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엘비어스는 여전히 차분해 보였지만 화가 난 건 분명했다.
“알테어가 왜 없는 사람 취급당해야 했는지는 아십니까? 체리에에서 들어온 청혼서 때문에 황실에서 우리 가문에 압력을 가하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은 황도에서 크로이젠의 셋째 공자 대우 멀쩡하게 받으면서 컸을 겁니다.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숨지 않고요.”
그게 내 탓은 아니지만 어쩐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전하께서는 지금 그런 애한테 로이드를 대신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겁니다.”
***
저택에 돌아온 엘비어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멜리아 황녀에게 쏟아 부은 말이 시원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주군에게 홧김에 말을 퍼부었다는 사실에 엘비어스는 속이 쓰렸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죄인처럼 옹기종기 방에 모인 동생들을 쳐다보며 엘비어스는 더욱 열이 뻗쳤다.
아침에 막 공작령에서 도착했던 아르는 그가 황궁에 다녀온 사이에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엘비어스는 그런 동생의 모습이 아침의 초췌했던 모습에 비해 훨씬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올랐던 열을 식혔다.
“내가 아직도 동생들 뒤치다꺼리를 해야겠냐?”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드는 멋쩍게 웃었다.
“아, 형. 새삼스럽게 왜 그래.”
평소였다면 동생 넉살에 못 이기는 척 그냥저냥 넘겼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가증스러웠다.
“넌 잘한 거 없으니 닥쳐!”
정략혼은 마음에 안 든다느니 입버릇처럼 중얼거릴 때부터 조만간 사고를 치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황녀랑 짜고.
“아르, 넌 알고 있었어?”
“예상은 했어.”
“예상했는데 왜 안 말렸어?”
“계획이 있다고 했으니까.”
아르가 덤덤히 대답했다.
“그 계획이 뭔 줄 알고!”
“난 전하의 기사지 책사가 아니야.”
“나한테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잖아!”
“내가 왜 주군께서 책사에게도 일부러 말하지 않은 일을 전해야 하지?”
지극히 그다운 대답이라 엘비어스는 헛숨이 터져 나왔다.
“허! 이것들이 날 쌍으로 엿 먹이네.”
“에이, 형. 고운 말을…….”
“넌 닥치라고 했지!”
“넵!”
로이드가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화를 가라앉힌 엘비어스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황녀가 다음 약혼 상대로 누굴 지목했는지는 알아?”
“……?”
“내 대타를 벌써 찾으셨어?”
두 명 모두 그건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자 엘비어스는 통탄을 금치 못했다.
다시 스멀스멀 혈압이 솟구쳤다.
“내가 환장한다.”
“누군데?”
“누구겠냐! 알테어 폰 크로이젠. 황실 도서관에 있는 귀족 계보에서 보셨단다.”
“뭐야, 그럼 문제없는 거잖아. 여전히 황실과 우리 가문의 혼담은 유지되는 거고. 체리에는 사교계에서 아주 매장해 버리면 되고.”
로이드의 속 편한 소리에 엘비어스는 날아가려는 주먹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문제가 없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엘비어스의 시선이 알테어를 향했다.
“문제가…….”
문제야 많다.
그의 기억 속 아멜리아 황녀는 로이드를 좋아했다. 황제인 에오넬을 졸라 약혼식도 서둘렀었고, 그가 뭘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으려 했고, 그러면서도 막상 마주치면 아닌 척 굴었다.
그러나 이번에 본 그녀는 조금 달랐다.
“그 바람둥이 새끼가!”
바람둥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약간의 애증도 보였다.
그녀와 과거에 겪었던 시간 축이 달라서 그녀가 기억하는 로이드가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이번에 아멜리아와 로이드는 의무적으로 정기 데이트를 해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로이드를 퍽 신경 쓰고 있었다. 의무감에 치여 만난다고 생각하기에도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사실 뭐가 진짜 모습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르는 전적으로 자신이 봤던 것만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결국 그 모든 것이 한 문장으로 튀어나왔다. 그것도 방금까지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윤리적인 것 말고 다른 문제가 있어?”
사실 이게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말을 뱉고 난 이후였다.
윤리적인 문제. 양심의 가책 말고는 딱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아니, 당장은 그 죄책감이 너무 커서 다른 감정을 압도했다.
“다른 문제가 있냐고? 너 실감이 안 나? 너 이제 당사자야. 정신 차려! 네가 원하는 게 뭐라고 했어? 조용한 생활, 안락한 노후. 지금 제대로 이야기해. 어떻게 할 거야.”
‘이게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될 문제일까?’ 이미 오래전부터 뜻대로 되었던 일은 거의 없었다.
“로이가 이미 자기 맘대로 했으니까 이번엔 네가 맘대로 해. 할아버님, 아버님 눈치 보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야 아버님이 손쓰시기 전에 내가 막아 줄 수 있어. 로이 일 수습하고 체리에와 잘 합의해서 이번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서 원래대로 돌려줘? 아니면…… 그냥 전하 마음대로 하시게 놔둬?”
한 번도 마음대로 했던 적이 없었는데 막상 누군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까 선뜻 결정하기 힘들었다. 정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걸까 불안했다. 모든 것이 전부 의심스러웠다.
“생각할 시간…….”
“시간 없어. 곧 아버님께서 움직이실 거야. 그때 되면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해.”
“…….”
곧 쿨타임이 다 찬 로이드가 또 끼어들었다.
“없던 일 만들 생각이었으면 얘도 처음부터 말렸을걸?”
엘비어스가 도끼눈을 하고는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알테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딱히 반응이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정말 좋은 걸까?
사실 주변에서 저를 가지고 뭘 어찌하든 불만을 표현한 적이 드문 녀석이라 더욱 속을 알기 힘들었다. 결국 엘비어스는 동생들을 내보내기로 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