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볼테르가 라파트니 공국의 누군가와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키옌 태후가 알게 된 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볼테르 주변에는 항상 태후의 사람이 있었고 몰딘에도 사실 볼테르의 사람보다는 태후의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랬기에 볼테르는 더더욱 제론 자작에게 어린아이처럼 애착을 형성하려 들었다. 태후도 그걸 알고 있었고 제론 자작을 경계했다.
처음 그녀는 제론 자작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조금 관찰해 본 결과 그는 꽤 새가슴으로 겁이 몹시 많았다. 눈치가 빠르고 처신을 잘하는 점은 마음에 들었으나 겁이 많은 사람은 영 못 미더웠다.
그 덕에 볼테르가 요즘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다는 건 눈치챘으나 그 상대가 라파트니 공국의 귀족이라는 건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라파트니 대공의 친척으로 알려진 로베든 공이라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입수한 정보였다.
‘그가 왜 볼테르에게 접근했을까?’
그가 볼테르에게서 원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키옌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그의 입장에 이입해야 한다.
‘내가 로베든 공이라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얼 기대하고 볼테르에게 접근할 것인가.’
라파트니 대공의 사촌으로 알려진 그는 사실 생물학적으로는 쌍둥이 형이다. 유전 질환 때문에 후계가 귀한 라파트니 공국에서 대공이 방계의 양자를 들이는 일은 대대로 흔했다.
그렇게 대공이 된 이들의 권력 기반은 당연하게도 직계 친자가 권력을 계승했을 때에 비하면 현저히 약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잊을 만하면 반역으로 한 명씩 죽어 나갈 정도로 약했다.
‘죽은 전 대공은 반역의 조짐이 없었어도 때 되면 한두 명씩 반역죄를 뒤집어씌워서 본보기로 죽였었지.’
세간에서는 그러다가 독살당했다고들 하는데 정말로 독살이었던 건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로베든 공도 야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의 대공과 썩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에 증오한다면 모를까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사이였다.
“공국에서 반역이라…….”
그게 볼테르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그것과 별개로 그저 과거의 흔적을 들쑤셔 보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아직 로베른을 사랑하고 있나? 그래서 지금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확실한 건 젊었을 적엔 사랑했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인 상태였다. 사실 그때의 사랑이 남아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건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공범이기 때문에 서로의 과거를 인질 삼아서 간섭하려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 싫어!’
키옌은 진저리를 쳤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볼테르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과거의 진실을 묻어 버릴 만큼의 권력이 너무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볼테르를 황제로 앉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로베든 공의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손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은 그쪽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드디어 키옌은 생각을 마치고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붉었다.
***
크로이젠 공작령과 황도는 몹시 가까웠지만 마차로 하루 만에 이동하기에는 벅찬 거리였다. 중간에 위치한 도시에 들러 하루 묵어야 했다.
호텔에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막 잠옷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똑똑똑.
늦은 시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벨도 제니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세요?”
벨이 문밖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페일입니다.”
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이미 손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열어.”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벨이 문을 열었고 페일은 문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와.”
나는 가까이 있던 제니에게 잠이 잘 오는 따뜻한 차를 부탁한 다음 페일에게 가까운 의자를 권했다. 나는 벨과 제니에게 가서 쉬라는 말을 하고는 페일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이 시간에 긴히 할 이야기라는 건 뭐지?”
“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표정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대한 이미지의 갈피를 잡지 못해서 설명하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천천히 정리하고 얘기해. 어차피 이 시간에 왔다는 건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뜻이었겠지. 황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여기서 이러는 거 보면 듣는 귀를 몹시 조심해야 할 이야기겠고?”
페일이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태후 폐하께서 제게 무언가 시킨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시켰다는 게 아니고 시킨 것 같다……. 그건 무슨 의미지?”
“며칠 전 제 본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체리에와 사업 관련 계약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제게 만나자고 했는데 그 시기와 장소가 좀 수상합니다.”
그는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두 주먹을 무릎 위에서 꽉 쥐고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계속 이야기해. 어디서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수상하다는 거야?”
“황제 폐하의 생신 파티 첫날 자정에 파티장 후원에 있는 프라이빗 화원 3번 가든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잠시 뭐가 이상한가 생각하던 나는 곧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모르는 고모님의 생신 파티 장소를 벌써 아는 귀족이 있다니 기분이 심히 나쁘군.”
황제의 생신 파티를 위한 연회장으로 쓸 만큼 규모가 큰 궁은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페일이 말한 것처럼 프라이빗한 화원이 있는 곳은 ‘이스트 에메랄드 홀’뿐이었고 주로 봄에 쓰는 연회장이라 이 계절에는 예상하기 힘든 곳이기도 했다.
내가 아직 모르는 황실 연회의 정보를 일개 지방 귀족이 미리 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확실해. 태후가 배후에 있어.’
무엇보다 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보니 이상한 점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계약을 이미 체결했다고?”
“예. 얼마 안 되었습니다. 저도 전하께서 황궁을 떠나고 나서 들은 소식입니다. 아직 황도에는 소문도 나지 않았습니다.”
대개 커다란 사업 계약은 체결하기 직전이라도 고위 귀족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소문이 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실도 모르게 이런 계약을 진행했다는 건 확실히 수상했다.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황실이 이 정도까지 모를 수는 없다. 작정하고 숨긴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데 이미 체결한 계약이 소문도 나지 않았다니, 더욱 의심할 만했다.
그러다 문득 페일을 쳐다보니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가 이런 말을 내게 한 이유가 뭘까.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했다. 키옌 태후를 배신한 건 놀랍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가문을 등진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일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걸 내게 말해 봐.”
페일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던 그가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전하…….”
“그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정보를 제공했으니 나도 그대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는 한참이나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명예를 원합니다.”
“명예?”
너무나 추상적인,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심성의껏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다짜고짜 ‘명예’라니, 그걸 내가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채워 줘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당혹스러워하자 그가 더욱 당황하면서 횡설수설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까 하다가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저 좀 내쫓아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지금 자신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양쪽 볼을 착착 때렸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전 오래전 태후 폐하께서 대진표를 조작해 주셔서 전하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황족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며 저를 가문의 명예라고 해주셨지만 사실 그것이 명예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의 자조 섞인 미소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저는 스스로가 명예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가 명예를 되찾을 때까지 계속 전하를 호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순간 가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벅찼다.
“그대가 기사 서임을 받고 내 호위가 되던 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네가 내 사람이 아니라 생각한 적 없다.”
“전하……!”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 갈 길이 멀다.”
그렇게 페일을 돌려보낸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창문을 통해서 밤새 벌레 우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원하는 것이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느낄 만한 명예라…….’
그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을 충심이었다.
동료들에게는 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반대쪽에서는 같은 편인 척 이용당하면서 혼자서 치욕을 감내했을 거다.
겉으로 보이는 명예는 번쩍거릴지 몰라도, 주석 도금처럼 작은 균열을 통해서 내부가 먼저 부식되어 가듯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너무 담담해서 가슴이 아렸다.
그런 그의 모습이 누군가와 겹쳤다.
닮은 듯 닮지 않았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서 짙푸른 눈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가득 차 있던 사람. 그러면서도 계속 부족한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을 했던 사람.
원하는 것을 말해 달라 애원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건 내가 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어 버리던 매정한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귀찮게 하지 말라며 선을 긋고는 기어코 훌쩍 떠나 버린 것도 벌써 반년이 되어 간다.
‘그대도 차라리 내게 명예를 원한다고 답했다면 이리 답답하지는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