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질문이 바뀌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페일은 고개를 떨구었다.
도리도리.
“그럼 말씀드려. 어떻게든 해주시겠지.”
“전하께서 뭘 어떻게?”
“그건 내가 책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책사와 상의해서 전하의 가치관에 맞는 걸 행하시겠지.”
아르는 엘비어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하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정말로 전하께서 얻으시는 게 없을 것 같아? 걱정만 하실 것 같아서 그래?”
페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가 피식 웃었다.
‘전하도 참 인복 하나는 좋으셔.’
“그건 아닐걸? 아마 네가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전하일 텐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네가 아군이라는 확실한 정보를 얻게 되실 거고. 그렇게 되면 태후가 네 변절을 눈치채기 전까지 전하께서는 너와 태후의 관계를 역이용할 수도 있거든.”
“이중스파이?”
“그렇지……. 이중스파이. 비슷해.”
아르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아멜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이렇게 황궁을 훌쩍 떠나 머리를 식히겠다고 한 이유도 그거였다.
‘이중스파이.’
크로이젠 공작가와 아멜리아 사이에서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둘 중 누구와의 의리를 지킬 것인가.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아르는 아르대로 페일은 페일대로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만약 나중에라도 태후를 배신하고 황녀 편에 섰다는 게 걸리게 되면 나는, 우리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되든 안 되든 일단 아르에게 말을 꺼내 버린 이상 무를 수는 없다. 아르는 무조건 황녀 편에 있을 테니까. 방금 나눈 대화 때문에 이제 더는 태후 편에 서고 싶어도 설 수가 없어졌다.
그걸 알면서도 말했고 그렇게 결정했지만 여전히 심경이 복잡해서 페일은 푸른 호수 저편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쉬었다.
그런 심호흡 소리에 아르는 퍼뜩 고개를 들어 함께 호수 맞은편을 바라보다 페일을 돌아보았다. 페일의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가문과 자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자신과 꽤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페일이 물었다.
“왜?”
“네가 부럽다고 해야 할까. 닮았다고 해야 할까.”
“그게 뭔 소리야?”
“몇 년째 계속 고민하던 게 있었거든. 전하께서 1년만 쉬면서 생각하라고 하셨는데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너처럼 그냥 며칠 이내로 후다닥 결정해 버리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 안 되네.”
어쩐지 속에 있는 말이 술술 나왔다. 신기했다.
“흠…… 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어.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건가?”
페일이 그렇게 말했지만 아르는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건 자신이 아니라 페일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역시 부러웠다.
공작가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엘비와 로이는 좋았다. 그 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러면서 아멜리아에게 진실을 숨기고 기만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려운 일이었다.
***
내가 크로이젠 공작령에 도착한 건 오후가 조금 지나서였다. 전 공작에게 돌아오겠다고 예고했던 시각은 저녁 즈음이라 공작령 근처를 조금 돌아다니다가 성으로 돌아왔다.
성의 뒷문에는 전 공작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문지기가 있었기 때문에 몰래 들어오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공작은 뒤뜰에서 산책하는 척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함께 본성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하려고 하신 일은 잘 하고 오셨습니까?”
“그럭저럭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잘 해결되길 빌겠습니다.”
역시 전 공작은 눈치가 빨랐다. 크로이젠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귀족들은 그를 이빨도 발톱도 다 빠진 호랑이라고 수군거리곤 했으나 사실 그는 이빨도 발톱도 숨긴 호랑이에 더 가까웠다.
그에게는 어설픈 말 돌리기는 통하지 않으니 나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그럼 필요할 때 좀 도와주세요.”
“이 늙은이가 어디에 필요하실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야…….”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식사가 슬슬 끝나 갈 즈음, 마지막 디저트가 나오고 공작이 식사 시중을 들던 이들을 모두 물렸다. 그러고는 디저트에는 손도 대지 않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황도의 소문은 들었습니다. 굳이 이런 시기에 황도를 벗어나신 이유가 뭡니까?”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났나요? 그냥 두세요. 로이드 공자와 이야기가 끝난 일입니다.”
“저희 가문과는 이야기한 일이 아닙니다.”
전 공작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크로이젠과의 약혼은 진행할 겁니다.”
그가 못 미덥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말입니까?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군요. 이번 일로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습니다. 물론 이건 전하의 독단이 아니라 로이드도 함께 벌인 일이니 전하께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로이드가 이 자리에 없으니 이걸 물을 사람이 전하뿐이군요.”
사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나와 로이드의 약혼은 할바마마와 크로이젠 전 공작이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냐. 그러니 파혼도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제국의 황족으로,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가 짊어지는 일이었다. 손에 쥔 권력이 많을수록, 그리고 누리는 부귀가 클수록 더욱 피하기 힘들었다.
세력이 큰 귀족이나 황실, 왕실 사이의 결합이 제국과 대륙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그것이 제국의 황위 계승권자라면 더더욱.
“내 마음 가는 대로 약혼하고 파혼하기엔 내가 책임져야 할 목숨이 너무 많다는 건 압니다.”
공작이 빙그레 웃더니 디저트 아이스크림 위에 꿀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앞날을 물은 게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크로이젠을 어찌할 생각이신지……. 그걸 묻는 겁니다. 저희 가문을 이런 추문 따위에 버리는 패로 쓰실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제아무리 황실이라도 크로이젠 공작가를 버리는 패로 쓰다니 그건 누구도 상상 못 할 일이다. 그렇기에 크로이젠 전 공작은 더욱 당당했다.
“말했잖아요. 전 크로이젠과의 약혼을 유지할 겁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약혼을 유지’만 하는 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약혼식이야 서둘러 올리면 되는 거고 파혼도 발표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약혼식도 전에 이런 추문은 달갑지 않다는 겁니다. 전하의 약혼은 저와 상황 폐하 사이의 일이기도 한 터라……. 제가 ‘자세히’ 알아야 하겠기에 여쭙는 겁니다.”
전 공작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가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내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상황의 충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자였다.
디엘로니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권력이라는 건 나뉘는 순간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됩니다.”
권력이란 집중될수록 강해지고 분산될수록 약해진다. 흔한 공식이었다.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두 가문이 결합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알력 다툼이 일어난다. 그건 황실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황실에서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었다.
황권을 가장 나눠 먹기 쉬운 때는 부모가 없는 어린 황제가 황위에 올랐을 때. 그건 황후의 자리만 차지한다면 제국의 모든 권력을 황실이 아니라 황후의 가문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그런 외척 세력을 경계해 황후의 자리를 비워 두려 하면 오히려 황제 자리는 더 조종하기 쉬운 꼭두각시로 갈아엎어진다.
딱 내 상황이었다.
크로이젠 공작가를 견제할 수 있는 내 뒷배로 당장 떠오르는 건 세르피스 후작가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벌써 크로이젠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크로이젠을 신뢰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내 갈 길 가고 싶은 것이지, 믿으니까 어딘지 모르고 따라가겠다는 건 아니었다. 믿는 것과 추종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입에 물고 시간을 벌며 생각한 끝에 로이드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털어놓았다.
“좋아요. 우리 계획에 전 공작께서 참여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 전에 묻지요. 내 약혼 상대는 로이드입니까, 아니면 크로이젠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전 공작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 느껴졌다.
“황실과 크로이젠 공작가의 약혼은……. 그래요, 가문과 가문의 일, 그리고 제국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일이죠. 하지만 약혼 이후 결혼 생활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에서 우리는 서로 잘 안 맞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사적인 부분에서요.”
나는 전 공작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잽싸게 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감수해야지. 그런데 로이드 님은 그럴 생각이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따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바로 귀족 계보를 뒤졌습니다.”
황실 도서관에서 보았던 계보의 세 번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실 전 약혼 상대가 누구든 개인에게는 관심 없어요. 솔직히…… 아니,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정략혼에서 필요한 건 서로의 가문과 권력뿐이잖아요. 그대에게 국서라는 자리가 필요했듯이 내게도 크로이젠의 이름이 필요하니 우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뿐이에요. 사적인 감정과 별개로요.”
이건 진심이었다. 지난 생에서처럼 권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당하는 개죽음은 사양이다.
“반면에 로이드 님은 가문의 이해관계보단 사적인 감정이 참 중요한 분이시더군요. 정략혼에 있어서 최악의 약혼자입니다. 제 결론은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전 공작에게 원하는 걸 말할게요.”
전 공작은 가만히 심호흡했다. 아까와 다르게 내 말을 끊을 타이밍을 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말을 마치기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대답할 말을 신중히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로이드 대신, 알테어 폰 크로이젠을 내게 국서로 내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