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몰딘에 위치한 협곡 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몰딘 지방을 내려다보았더니 전망이 썩 좋았다.
볼테르가 황궁에 있는 사이에 제론 자작이 몰딘 지방을 잘 돌보고 있는지 주변은 몹시 평화로워 보였다.
‘땅은 참 비옥하고 좋은데…….’
주변 부족들이 약탈하고 다니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래도 그걸 감수할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
‘여긴 나중에 볼테르를 쫓아내면 제론 자작한테 줘버려야겠군.’
몰딘 남작이 쫓겨난 이후로 제론 자작은 거의 강제로 이곳을 맡아 경영했다. 몰딘의 주인이 볼테르로 바뀌고 난 이후에는 볼테르에게 끌려다니면서 이곳을 경영했다.
비록 두 번 모두 강제로 끌어 앉혀진 자리였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곳을 자신의 영지만큼이나 알뜰살뜰하게 돌봐 왔다. 그간 영지에 정이 꽤 든 모양이다.
정이 든 것과는 별개로 제론 자작은 황도에 진출하고 싶은 것 같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몰딘을 믿고 맡길 만한 인재는 제론 자작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작 본인은 몰딘 지방을 맡게 되면 안타깝게도 영지를 떠날 수 없게 되겠지만, 적어도 자식들은 황도로 유학을 보낼 수 있을 최소한의 부와 권력을 쥐게 될 거다.
게다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년에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준 이후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황도로 올라와 살 수도 있을 거고. 물론 자작 본인은 다 늙어서 오는 게 뭔 소용이냐며 징징거릴지도 모르지.
어쨌더나 우리는 몰딘 영지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는 않고 그 외성을 빙 돌아서 협곡에 도착했다. 곧 섀도 나이트들이 로엔의 설명에 따라서 현장을 검증했다.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해보았고 추측했던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세세했다.
“사건 바로 전날 밤에 저쪽에서 열두 명이 넘어왔어요.”
그녀가 말하는 시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러나 마나를 보는 눈은 주간과 야간을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마나 자체가 빛나 보여서 아무리 어두워도 사람의 몸속에 흐르는 마나는 또렷하게 잘 보인다나.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폭음이 들려서 잠에서 깼어요. 다들 지진이 났다며 숨었는데 전 창문 밖을 내다봤어요. 협곡 밑을 지나던 행렬이 바위에 깔렸더라고요. 그 난리 속에서 기어이 살아서 바위 위로 기어 나오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마부 빼고는 다 죽었을 텐데.”
“살아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돌로 쳐서 전부 죽였어요. 그중에 한 명은 빠뜨렸을 수도 있었겠지요.”
역겨웠다. 섀도 나이트 한 명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격자를 제거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인위적인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하지 못하도록……. 아마 여기 있던 별장과 노예들도 같은 이유로 몰딘 남작에게서 매입해 한꺼번에 처리하려 했던 거겠지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상기되었다.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로써 증인은 두 명을 확보했고 둘의 증언도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 이 별장에 있던 노예들을 최대한 추적해서 증인을 많이 확보해 둬.”
손을 움찔거리다 어찌할 줄 몰라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
그때 로엔이 나를 폭 끌어안았다.
“이렇게 힘들게 강한 척할 필요 없어요.”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이 느껴졌다. 따뜻한 숨이 정수리에 닿았다.
누군가에게서 받는 위로가 정말 오랜만이었다.
“쉬이…… 착하지.”
섀도 나이트들 누구도 그녀에게 무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포근했다.
***
크로이젠 공작령으로 아멜리아 황녀가 떠나고 며칠 뒤, 환궁할 때 호위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소식에 황녀의 호위기사단이 들썩였다. 호위대장 혼자 따라간다고 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었는데 역시나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아멜리아가 별도 호위 인력으로 섀도 나이트를 데려갔었다는 사실은 호위대장을 제외하곤 알지 못했으니 그런 우려는 어쩌면 당연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멜리아는 크로이젠 공작령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환궁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하루 더 머물며 영지에 실제로 얼굴을 비추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상황의 조언 때문에 계획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하루 더 머물 장소가 애매해진 섀도 나이트들은 먼저 궁으로 보내 버려야 했다. 보여 주기식 황실 기사 제복을 챙기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그런 뒷사정이야 어쨌든 황녀의 호위기사단은 없던 외근이 갑자기 생겨 버리자 저들끼리 투덜거리며 희생양을 선출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페일이 되었다.
막내라는 것이 죄였다.
다행히 황도에서 크로이젠 공작령까지 거리가 멀지도 않은 데다 마차를 호위하거나 할 필요 없이 혼자 말을 달리니 도착하는 건 하루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거기까진 무난했다.
공작령 안, 본성을 지나쳐 으슥한 후원으로 안내받고 출입 제한 구역이라고 버젓이 푯말이 붙어 있는 숲길 앞에 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안내하는 하인을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하자 하인은 그런 페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사무적으로 말했다.
“저는 이 이상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 길을 따라 쭉 들어가시면 커다란 호수와 별장이 하나 보일 겁니다. 별장으로 들어가시면 그곳에 계실 겁니다.”
들어가면 길을 잃고 영영 헤맬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수상하니 혼자 들어가지 않겠다고 뻗대는 것도 이상해서 결국 숲길에 발을 들였다.
혼자 꽤 오래 걷다 보니 하인 말대로 탁 트인 풍경과 함께 에메랄드빛 커다란 호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호수 근처에 별장이 보였다. 그리고 호숫가에서 누군가 조각배를 뭍으로 끌어 올리는 것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정체를 확인했을 때 상대방이 먼저 물었다.
“어……? 너 여기 왜 왔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황녀가 바짓가랑이 붙들고 가지 말라고 했다는데도 굳이 그만두겠다고 우겨서 무려 1년짜리 휴가로 딜을 봤다는 놈이 대체 여긴 왜 있단 말인가.
1년 유예 기간으로 합의한 다음에는 아주 잠적해 버려서 행방도 모른다고 황녀 전하께서는 무작정 1년을 기다리고 계셨다.
묻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작 나오는 말은 개인적인 질문보다는 업무적인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안 계셔. 그런데 여기 계시는 척해야 해.”
“어디 다른 데 가셨어?”
“응. 어디 가셨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라.”
조각배를 호숫가로 다 끌어 올린 아르가 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페일은 아차 싶어 뒤늦게 배에 연결된 밧줄을 호숫가에 박혀 있는 말뚝에 둘둘 감았다.
“너 언제 돌아왔냐?”
“내가 뭘 돌아와?”
아르가 모래 묻은 손을 탈탈 털며 되물었다.
“돌아온 거 아니면 네가 여길 왜 있어?”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난 원래 1년 동안 여기 숨어 있을 생각이었어. 전하께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직 모르시고 앞으로도 모르실 거야.”
“으, 응.”
숨을 거면 좀 더 편한 곳에 숨지 왜 크로이젠 공작령에 숨은 것이며 출입 제한 구역이라고 하인들도 접근을 못 하는 곳에 이놈은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직도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지만 페일은 더 묻지 않았다.
어느덧 자연스럽게 둘은 별장으로 향했다.
“아 참, 별장에 상황 폐하도 계시다. 방금 뱃놀이하시다 피곤하다고 들어가셨으니 아마 낮잠 주무실 수도 있는데.”
“상황 폐하? 남부 해안 황실 별장에 계신 거 아니었나?”
“대외적으론 그래.”
“너…… 여기서 쉬는 건 맞아?”
“보다시피 숨어서 쉬려고 왔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일하고 있지.”
전우의 얼굴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불쌍한 놈.’
페일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별장에 도착하니 상황 폐하와 전 공작 각하께서는 햇살 좋은 곳에 흔들의자를 놓고 세상모르도록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고 시녀님들은 샌드위치를 싸 들고 호수 반대편으로 나들이를 떠난 뒤였다. 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냥 나갈까?”
날씨는 화창했고 별장 안은 부담스러웠다. 산책하기 좋은 오후였다. 둘은 말을 타고 호숫가를 천천히 돌았다.
“황도에서 무슨 일은 없고?”
페일은 순간 최근 황도에서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로이드와 민티아에 관한 이야기는 그 진위를 떠나서 몹시 뜨거웠다. 하지만 정확하지도 않은 말은 아낄수록 좋았다.
“특별히…….”
“그래? 체리에가의 아가씨에 대한 얘기도?”
“앗!”
하마터면 말 위에서 삐끗할 뻔했다. 페일은 말 고삐를 다시 쥐며 헛기침을 했다.
“뭔가 있긴 하군.”
“좀…… 어수선하지.”
“태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너 뭐 들은 거 없어? 너 그쪽 사람이잖아, 일단은.”
아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페일의 오묘한 표정을 본 아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난감한 모양이다. 개인의 신념이 어느 한쪽을 향한다고 해도 주변 환경이 그걸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 곤란하다.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던 페일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가문에서 체리에와 큰 계약을 했다고 들었어.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서 내게 뭔가 시키긴 했는데 목적이 뭔지 잘 모르겠어.”
“네가 이 얘기를 나한테 한다는 건 전하께 알려져도 된다는 뜻일까? 내가 지금은 쉬려고 숨어 있긴 해도 아예 전하와 연락을 끊어 버리겠다는 건 아니거든.”
페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전하께서 나를 다른 기사단으로 보내 버렸으면 좋겠어. 어차피 나를 전하의 호위 기사로 꽂아 넣은 게 태후 마마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억지 핑계를 대서 쫓아내더라도 그리 이상한 그림이 나오지는 않겠지. 이런 부탁 드린다면 전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인 것 같지만 억울한 것도 사실이다.
“글쎄, 나보다 네가 황녀 전하를 더 오래 가까이서 모시지 않았던가? 전하께서 보이실 반응은 네가 더 잘 알아야지.”
아르가 농담처럼 말했다. 물론 지난 삶까지 다 합친다면 아멜리아 황녀를 가장 오래 모신 건 그였다. 그러나 이번 시간만 따진다면 페일의 시간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페일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건 순수하게 근무환경만 따졌을 때고……. 실제로 전하와 오래 알고 가깝게 지낸 건 너잖아.”
“그런가?”
아르가 별다른 감흥 없이 대답했다. 페일의 말이 맞는 말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선뜻 인정하기엔 조금 어색했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좋아, 그럼 말을 바꾸자. 네 지금 상황을 전하께 말씀드리면 전하께서는 네가 해달라는 대로 널 버리실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