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크로이젠 공작령, 공작성 뒤에는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구역이 있다. 그 출입 제한구역에서 우거진 나무와 풀숲을 헤치고 가다 보면 큰 호수가 있고 호숫가에는 꽤 커다란 별장이 있다.
벨, 제니 그리고 호위대장은 크로이젠 전 공작과 함께 그 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공작성에서 크로이젠 전 공작과 만나 인사만 나눈 아멜리아는 출입 제한구역에 들어서자마자 로엔과 섀도 나이트 셋을 데리고 은밀하게 공작령을 빠져나갔다.
“전하께서는 괜찮겠지요?”
제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전하께서 별도로 대동했다는 호위들은 대단한 자들입니다.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호위대장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섀도 나이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벨과 제니는 마냥 오는 내내 얼굴도 제대로 못 본 호위들 어느 구석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전 공작이 앞장서며 말을 보태었다.
“자네들이 할 일이나 하시게. 이 별장에서 전하께서 머무시는 척하는 게 그대들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이니. 전하께서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도 않을 만큼 신중하게 하실 일인데 호위 인력을 아무렇게나 고르지는 않았겠지.”
전 공작의 말이 맞는 말이라 제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녀들도 호위대장도 아멜리아가 왜 크로이젠 공작령으로 온 척해야 하는 것인지, 실제로는 어디 가서 무얼 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그녀가 대동했다는 호위 인력이 충분하다고 호위대장이 호언장담했고 하녀까지 한 명 따라붙기도 했으니, 그걸로 안심하려고 노력했다.
벨은 그런 제니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생각했다.
‘그 하녀가 마나를 보는 여자였어. 그때 나를 내보내고 전하께서는 그 여자와 뭔가 이야기했었지…….’
아마 그 일과 관련된 일이라고 벨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황녀를 모실 필요 없이 공기 좋고 한적한 크로이젠 공작가의 비밀 별장에서 며칠 머물며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살짝 들뜬 마음에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물론 전 공작 각하가 본성과 별장을 자주 오락가락하시겠지만 서로 만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 그건 부담스럽지 않았다.
곧 에메랄드빛 커다란 호수가 보였고 호숫가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저도 모르게 탄성이 쏟아졌다.
그러나 막상 별장 안에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앉은 익숙한 뒷모습에 셋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상황 폐하?’
언뜻 아멜리아 황녀와 같은 화사한 금발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사이로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돋아있었다. 곧 상황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폐……!”
“쉿!”
상황이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대며 씨익 웃었다.
벨과 제니, 그리고 아멜리아의 호위대장은 동시에 얼이 빠졌다.
아니, 남부 해변의 황실 별장에 계셔야 할 분이 대체 여기엔 왜 계신단 말인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곧 별장 부엌 쪽에서 익숙한 사람이 한 명 더 튀어나왔다. 상황의 호위대장이자 아멜리아 황녀의 검술 스승. 그는 제복 대신 편안한 사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검 대신에 다과 쟁반을 들고 있었다. 전혀 상황의 호위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상황의 근처에 다과를 내려놓고는 여전히 멍해져 있는 셋에게 슬쩍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이 별장을 관리하러 오는 사람들은 전부 폐하께서 공작 각하와 사이가 각별한 옛 친구라고 알고 있으니 평소에도 그냥 자작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폐하를 자작님이라고 부르라고요?’ 벨이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몸서리쳤다. 상황 폐하를 향해서 선뜻 ‘자작님’이라는 말이 나올 것 같질 않았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아예 보지 않게 되면 모를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예를 갖출 수도 갖추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멜리아가 돌아올 때까지 며칠이나 계속될 거로 생각하니 불편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척 허허 웃으며 상황 폐하를 향해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 촌극이 몹시 익숙해 보였다.
“갑자기 손님들이 좀 와서…… 한동안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 이해 좀 해주시게.”
“젊은이들 복닥거리면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좋지. 와서 이거나 마저 하지.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상황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체스판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그 옆에 놓인 갓 구운 따끈한 쿠키를 집어 먹었다.
곧 2층과 연결된 계단에서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한 명 내려왔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셔서요. 식사는 조금 있다가 준비되는 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청소는 마쳤으니 2층의 마음에 드시는 방 아무 곳에서나 머무시면 됩니다.”
그녀는 짧게 안내를 마치고 내려갔고 하녀 몇몇이 청소 도구를 정리해 반대쪽 계단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하녀들이 전부 내려가고 3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별장에 있다는 것이 상황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아, 아르 경……?”
***
황녀가 자리를 비운 궁에서는 호위 기사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페일은 자신의 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본가에서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서 온 그 편지를 전부 읽고는 바로 와그작 구겨 버렸다.
‘태후가 힘을 써줘서 체리에 후작가와 유통 계약을 체결했다고?’
그러니 태후에게 계속 잘 보이라니……. 그보다 지금까지 태후에게 잘 보인 적이 있긴 했던가? 오히려 태후는 자신을 점점 잊어 가는 듯했다. 그러니 그동안 자신을 황녀 옆에 꽂아 놓고도 신경을 쓰지 않던 태후가 갑자기 이러는 게 몹시 수상했다.
페일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파티장 정원의 프라이빗 가든 3번에서 만나 자세히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 영 수상쩍었다.
다음 달에 에오넬 황제의 생일 파티가 황궁에서 열린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파티장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파티 당일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물론 준비하는 과정에서 궁인들을 통해서 이런저런 정보가 황궁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황도에 저택을 가지고 머무는 귀족들뿐이었다. 게다가 파티까지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황도에 거주하는 귀족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을 쉽게 알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고급 정보를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있는 지방 귀족인 아버지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그저 늘 초대장을 들고 황궁 정문으로 들어선 이후에 궁인들의 안내를 받아 이동할 뿐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태후께서 알려 주셨나? 그런데 그걸 뭐 하러?’
그것도 그거지만 오픈된 화원에서 보자는 것이 아니라 돔 형식으로 덩굴이 우거진 프라이빗 구역의 3번 가든이라니.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고 보기엔 너무 은밀한 장소가 아닌가. 꼭 무언가 작당해서 모의할 것처럼.
“흐음…… 뭘 하려는 거지.”
페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키옌 태후가 자신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광산 계약서는 한낱 종잇조각이 되어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다간 이런저런 핑계로 덤터기를 쓰고는 수만 골드 단위로 위약금까지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몇 년 전 아르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파트니 공국으로 향하는, 당시 황태손이었던 아멜리아 황녀의 마차 안에서 야간 호위를 섰던 날이었다.
“본질은 이거야. 황후는 네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너는 황후 편이 되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럼 확실히 정해.”
“뭘?”
“아버지가 정해 준 줄 잡고 가지 말고 황태손 라인을 타. 저하께서 널 적으로 간주하기 전에.”
그때는 자존심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황녀의 편에 서겠다 다짐했었다. 그러나 막상 광산 계약이 어쩌고 하며 가문의 존망이 반대편에 걸려 있으니 둘 중 선뜻 어느 것도 선택하기 힘들었다.
‘하아, 내가 위선자였다니…….’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모습조차 나약해 보여서 한숨이 나왔다.
태후가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단순히 광산 계약 파기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태후가 그대로 포기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영지 광산의 광물 유통 계약에 걸렸다는 액수가 그저 그대로 포기할 거라고 보기엔 너무 컸다.
그러니 그 뒤에 어떤 보복을 더 할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더 불안했다.
그렇다고 황후가 시킨 대로 하면 과연 잘 해결이 될 것인가?
‘그때 아르가 뭐라고 했더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떠올리자면 아마 ‘너는 버리는 패’일 거라고 경고했던 것 같다.
‘아무리 버리는 패라고 하더라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적어도 광산 계약을 파기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것 말고 나머지는 장담할 수 없을 거다. 가문의 중앙 진출, 자신의 명예, 사교계의 평판을 비롯한 그 모든 것들…….
이건 최악과 차악 사이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