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내가 별안간 크로이젠 전 공작을, 그것도 갑자기 비공식적으로 만나러 간다는 말에 시녀들은 너무 뜬금없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내비쳤다.
태후도 아마 조만간 이 이야기를 듣고는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될 거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전 공작의 건강에 대해 의심하겠지.
나의 이런 갑작스러운 행보에 대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할 거다.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전 공작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다. 갈 곳은 따로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전 공작과는 대강 말을 맞춰 놓았다.
공작령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는 동행한 시녀들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동행한 시녀라고 해봐야 벨과 제니뿐이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마차에는 하녀로 위장한 로엔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요, 전하. 대체 마나 보는 저 여자는 왜 데려가는 거예요?”
벨이 수군거리듯 물었다.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공작령에 도착하고 나서 하루 묵었다가 뒷문으로 로엔과 밀렌을 비롯한 섀도나이트들만 데리고 빠져나와 몰딘으로 갈 거다. 확인할 게 있다는 말만큼은 진짜였지만 무엇을 확인할지는 모르는 편이 좋다.
벨과 제니를 걱정시키거나 울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크로이젠 공작령에서 뭘 확인하시게요?”
“크로이젠 공작령에서 확인할 건 아니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거야. 그동안 너희는 공작령에 남아서 내가 공작령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 돼.”
“저희를 두고 가신다고요? 괜찮으시겠어요?”
제니가 소리침과 동시에 벨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 마나 보는 여자는 신분도 불확실하다면서요.”
“이젠 확실해졌어.”
나는 며칠 전 로엔의 제안을 들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네가 그걸 봤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그, 그건…….”
“현장을 조사한 기록이 있어. 너의 증언과 대조해 일치한다면 목격자가 맞겠지. 그러니 나와 함께 몰딘으로 가줘야겠다.”
“네!”
“그리고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 있는데. 네 신원 확인을 좀 해야겠는데. 진짜 이름은 로엔이 맞나?”
그 직후 그녀는 진짜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지 한동안 놀라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뒷조사했다고 생각한 건지 움찔 몸을 움츠렸다.
그때는 딱히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아마 밀렌이 알아서 설명해 뒀겠지.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창문 밖으로 돌렸다. 멀리서 오래된 성채가 보였다.
“공작령이 보이는구나.”
황도에서 가까운 곳이라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내 말에 제니도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전하, 정말로 황도를 비우셔도 되나요?”
“그건 왜?”
“요즘 체리에 영애에 대한 소문도 있고…….”
제니는 민티아만 콕 짚어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민티아가 로이드에게 접근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로이드가 민티아에게 접근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젠 둘이 쌍방이라는 말도 슬슬 나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아. 그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일부러 소문 더 나라고 자리 비워 주는 건데?”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황도에서는 아마 거리낄 것 없이 신나게 물어뜯어 줄 거다. 눈치 보이는 사람 중에 한 명, 그것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물어뜯기 훨씬 쉬워질 테지.
내가 시녀 중 굳이 벨과 제니를 데려온 것도 이 둘이 사교계에서 몹시 활발히 활동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가 없더라도 내 시녀들이 그런 사교모임에서 계속 보인다면 지금 황도를 떠나는 짓은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내 눈치 보듯 내 시녀들의 눈치를 보느라 더욱 모르는 척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와 로이드가 의도한 대로 나기 시작한 이 소문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다 사그라들기 전에 되도록 빨리 부채질을 해주는 것이 좋았다.
“로이드 님은 어쩌고요? 아니, 그보다 이번 소문은 전하께서 일부러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아니, 내가 아니라 로이드 공자께서 만든 상황이야.”
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네? 대체 왜요?”
“민티아를 사교계에서 매장해 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이건 그냥 동반자…….”
잔뜩 열이 오른 제니가 목소리를 높이려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자 벨이 움찔하고는 얼른 제니 대신 말을 받았다.
“이건 그냥 자충수 아닌가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자충수도 파혼이라는 목적이 있는, 의도된 자충수니까 괜찮다.
나는 파혼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자충수인 건 나도 알아. 로이드 공자도 알면서 계속하는 중이고. 그러니 알아서 하시겠지. 어디까지 소문을 키우실 작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고 부채질할 거 아니면 모르는 척하라고 하던데.”
그러는 사이 크로이젠 공작령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아멜리아가 갑작스럽게 크로이젠 공작령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키옌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왜 갔는지는 모르고?”
“전 공작 각하를 만난다고만 들었습니다.”
키옌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토독토독 두드리며 콧소리를 냈다.
“흐응…… 전 크로이젠 공작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더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크로이젠 공작가가 너무 조용합니다.”
하긴, 전 공작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면 황도에 있는 공작 일가가 함께 이동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움직임이 있었을 거고.
‘전 공작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가설은 지워 버려야겠어. 그럼 왜 가는 걸까?’
“크로이젠 공작가와 황녀 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고?”
“특별히 사건은 없었습니다만…….”
시녀가 잠시 뜸을 들이자 키옌이 날카롭게 물었다.
“없었는데? 그다음엔 뭐지?”
“사실 최근 사교계에서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키옌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그런 낌새는 느낀 적이 없었다. 사교계에서 나는 소문이라면 민티아가 거의 실시간으로 계속 물어다 주고 있다. 그러나 크로이젠 공작가와 황녀 사이의 어떤 일에 관해서는 딱히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
‘내 시녀들보다 소식에 느리다니 민티아가 별일이구나.’
키옌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가 돌고 있지?”
시녀가 우물쭈물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키옌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로이드 공자께서 요즘 누굴 자주 만난다고…….”
피식.
키옌의 입에서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사교성 좋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웃음까지 헤픈 놈이 왜 이런 소문이 안 나는가 했다.
‘황녀와의 암묵적인 관계가 있다고는 해도 젊은 남녀가 사교계에서 만나면 그런 건 소용 없게 마련이지.’
게다가 황녀는 아직 어리고 로이드는 젊다.
수많은 가문의 영애들 사이에서 로이드가 친절하다느니 잘생겼다느니 멋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많이 들려왔다. 그랬기 때문에 추문 한 번쯤 기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교계란 곳은 황실이 개입하기 힘든 부분인 만큼 황실의 영향력이라곤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저 로이드가 스스로 꽤 잘 처신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건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철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딴 거, 알 게 뭔가. 적에게 알아서 추문이 생겨 준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일이 또 있으려고.
가뜩이나 민티아가 몇 년 전 파혼 후 새로운 약혼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골치가 아프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더 큰 추문이라니! 이건 호재였다.
‘이슈를 더 큰 이슈로 덮는 것만큼 편하고 빠른 것도 없지.’
“그 공자가 누굴 만나는지는 알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괜찮아. 말해 봐.”
확실하지 않아도 입맛에 맞게 사실처럼만 만들면 된다. 지금까지 쭉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키옌이 부드럽게 웃자 시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민티아 아가씨요.”
“뭐?”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키옌은 몇 번이나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곧 헛웃음이 나왔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니 어이가 없었다. 어쩐지 요즘 민티아가 말을 아꼈던 것 같다.
민티아가 사교계에서 모르는 소문이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이걸 민티아가 아니라 시녀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하, 하하!”
민티아를 불러다가 혼내는 건 둘째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일로 크로이젠 공작가와 황실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면 그건 환영이지만 민티아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된다. 그건 사양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쪽은 득보다 실이 커지기 때문이다. 상대방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잃는다.
키옌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자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태후 폐하, 혹시 페일이라는 기사를 기억하시는지요?”
가물가물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릿속을 뒤져도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지?”
“옛날에 태후 폐하께서 직접 황녀의 호위 기사로 집어넣었던…….”
“아!”
그제야 머릿속에 번뜩 빛이 들어왔다. 그때는 당장 쓸모가 없어서 일단 황녀 옆에 넣어 놓기만 하고 그대로 잊어버려 내버려 두다시피 했었다.
“지금 써먹을까요?”
“당연히 써야지.”
키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건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최선의 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