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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22화 (122/148)

122화

섀도 나이트를 보내 정보 길드에서 구매한 민티아의 한 달 일정. 특별한 건 아니었고 주로 고정된 외출 일정이나 파티 참석 여부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로이드 앞에 그녀의 일정표를 내놓았다.

“체리에 가문이나 키옌 태후와 관련된 일정은 어지간하면 변동되지 않는대요. 나들이 같은 개인적인 일정은 변수가 좀 있을 수 있겠지만요.”

“민티아의 성격상 그런 일정도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네요.”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감당 가능하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공작이 알면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엘비어스 님도 로이드 님이 이러는 거 알고는 계세요?”

“대강은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엘비어스가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거라면 공작과 로이드 사이에서 어느 정도 중재해 줄 수 있을 거다.

엘비어스도 내가 로이드에게 딱히 큰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눈감는 거겠지. 아마 내가 지난 삶처럼 로이드에게 푹 빠져 있었다면 엘비어스는 내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는 로이드에게 살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함께 손을 더럽히지 않아서.”

로이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꼭 남들에게 보이는 부분이 더러워져야 하나요? 전하께서는 충분히 저와 함께하고 계세요.”

그런 그의 말이 내게는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는 말보다 훨씬 뿌듯했다. 옛날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나는 또 다른 종이를 한 장 더 내밀었다.

“이건 제 파티나 모임 참석 일정이에요.”

로이드는 나와 민티아의 일정을 비교했다.

“여기 빼고는 겹치는 모임이 없네요. 전하를 티가 나지 않게 피하면서 민티아도 잘 따라다니려면 꽤 힘들겠어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은 좋은 핑계지만 진짜 우연처럼 보이기는 상당히 힘들죠.”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로이드가 멋쩍게 웃었다.

“올해 안에 체리에를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해 드릴게요.”

***

사흘 전에 심부름을 보냈던 밀렌이 돌아왔다.

“레이하임이 뭐래?”

밀렌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잘됐대요.”

아마 레이하임은 상세하게 보고했을 거다. 그렇다고 밀렌에게 그 모든 걸 전달받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냥 자세한 건 레이하임이 돌아오면 직접 듣기로 했다.

“태후의 편지는?”

“황제 폐하가 계속 감시하고 있어요.”

볼테르에게 보내는 태후의 편지는 고모님이 계속 빼돌리면서 확인하시는 듯했다.

“근데 편지 내용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볼테르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태후를 냉궁에 유배시키기엔 딱 좋지. 그런데 나도 그렇고 고모님도 그렇고 후작가를 통째로 먹지 않는 이상 만족을 못 할 것 같거든.”

“그럼 어떻게 하려고요?”

“아직은 기다릴 거야. 볼테르가 그 편지를 보고 군량미를 비축하면서 군대를 필요 이상으로 키울 때까지. 편지는 모함이라고 할 수 있어도 군량미나 군대까지 모함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군대의 훈련 내용이 수성전이 아닌 공성전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땐 빼도 박도 못 하겠지.”

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이제 가도 돼요?”

“아니. 너 전에 찾던 사람 찾아 주면 나랑 노예계약 하기로 한 거 안 잊어버렸지?”

“노예계약이라뇨!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요!”

밀렌이 손사래를 쳤다.

“시키는 거 다 해. 목숨도 내게 준다며. 그게 노예계약이지 뭐야?”

“비슷하지만 다른 거예요.”

“내가 어쨌든 시키는 건 죽을 때까지 다 한다는 거지?”

밀렌은 잠깐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요.”

“그럼 아무래도 찾은 것 같아. 전에 노예 시장에서 데려온 여자가 말했잖아. 네가 찾는다는 그 여자는 팔리기 전에 도망쳤다고. 몰딘의 그 별장에서 살다가 도망쳤다는 사람을 찾았어. 머리는 염색한 것 같더라고.”

***

요 며칠 로이드는 꾸준히 민티아와 마주쳤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하나 나기 시작했다. 둘이 필요 이상으로 자주 함께 목격된다는 말이었는데 그게 내 귀에까지 들어온 걸 보니 날 대로 난 소문 같았다.

때가 되었다.

나는 체리에 후작가에서 열린 작은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전하께서는 안 오실 줄 알았는데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지 안 온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참석 여부에 대해서 애매하게 답해 두긴 했다. 그런 경우 대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졌다. 오늘처럼 정말 온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이런 작은 파티에서는 더욱.

파티장에 일찌감치 도착했던 로이드가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내가 겉보기에 며칠간 소원했던 관계를 짚어 내듯 말하자 로이드가 살짝 눈웃음을 쳤다. 민티아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파티 재미있게 즐기다 가세요.”

그녀가 돌아가고 나와 로이드 역시 얼마 대화하지 않고 흩어져 각자 다른 사람들과 섞였다. 이따금 로이드나 민티아를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소문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얼핏 보았던 민티아와 로이드는 꽤 가까워 보였는데 남들 눈에도 평범한 사교계 파티에서 볼 수 있는 예의 수준으로 보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그냥 밖에서 민티아를 우연히 만나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나? 파티장에서 좀 더 자주 마주치면서 남들보다 대화를 좀 더 오래 나누는 정도도 아닌 것 같았다.

이건 민티아가 정말로 로이드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것도 재능으로 봐야 하나?’

로이드가 능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놈인 건지, 둘 다인 건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계획한 일이었고 생각보다 잘되어 가고 있는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실제로도 로이드가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민티아가 접근하고 있었다. 혼자 잠시 쉬는 로이드에게 민티아가 다가갔고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갔다. 주변과 살짝 떨어져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파티션 같은 건 없어서 보이기는 또 잘 보이는 곳이었다.

“두 분이 우연치고 꽤 자주 마주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 보이나요? 소문이야 늘 그런 식이죠. 신경 쓸 일 있나요?”

민티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승리자가 내보일 수 있을 법한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없죠. 그런데 영애가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서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그녀가 내게 뭘 이겼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가소롭다.

그러자 민티아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고 로이드가 나섰다.

“헛소문입니다, 전하. 셋 중 누구도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진정시키는 척하며 은근슬쩍 민티아의 편을 들었다. 짜고 치는 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질 뻔했다. 민티아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 우리 대화를 엿들을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더욱 조심스럽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신경 쓰든 말든 내 맘대로 하면 돼. 어차피 신경 쓴다고 해도 손해가 크지 않거든. 그런데 내가 여기서 아주 사소한 깽판을 놓으면 너희 둘이 어떻게 될 것 같아?”

예의는 완전히 집어던진 말에 민티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그녀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거칠 것 없이 말했다.

“그러는 전하는 무사하실 것 같습니까?”

“체면 조금 깎이고 말걸? 내가 크로이젠 공작가를 무서워할 것 같아? 크로이젠이 날 무서워한다는 생각은 안 해본 모양이지?”

말을 마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붉은 과일 주스를 로이드에게 훅 끼얹었다.

“꺅!”

민티아가 급하게 뒷걸음쳤다. 나와 민티아의 스커트에 붉은 주스가 튀어 짙은 얼룩을 남겼다.

로이드는 오늘 자신이 주스든 물이든 홍차든 뒤집어쓸 것을 알고 있었다. 내게 그렇게 하라고 했고. 그러나 막상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을 보자 조금 미안해졌다. 나중에 엘비어스를 통해 따로 사과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계속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으면 뭐라고 소문이 날까? 사람들은 황녀가 드디어 미쳤다고 할까? 너희는 이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설명할래?”

내가 뒤돌아 나가자 사람들은 나와 민티아, 로이드를 번갈아서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빠지고 주변에 있던 하인들이 손수건을 들고 달려와 로이드를 닦으면서 샤워할 만한 곳으로 안내했다.

이 상황을 놀라 지켜보던 몇몇은 민티아에게 접근해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게 다가왔다. 주스를 맞은 건 로이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내게 괜찮으냐 물었다.

“죄송해요. 이만 환궁하겠어요.”

나는 길게 말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바로 황궁으로 달렸다.

‘아, 힘들다.’

뭔가 한 것도 없는데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왔다. 어디든 몸을 기댈 수 있는 곳에 기댔다. 딱딱했다. 말의 발굽 소리에 맞추어 머리를 기댄 벽이 흔들렸다. 어지럽다. 멀미가 올라와 토할 것 같다.

유모한테 따뜻한 물주머니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씻고 이불 속으로 바로 들어갈래. 그보다 좀 더 푹신푹신하고 따뜻한 곳에 기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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