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21화 (121/148)

121화

나는 내 궁의 응접실에 과일차를 준비하고는 볼테르를 불렀다.

“숙부님, 오랜만에 궁에 오셨으니 제가 찾아가는 것이 조카의 도리이겠으나 갈 곳이 마땅치 않았네요.”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궁이 사라져서 응접실도 마땅치 않다며 그를 비웃는 말이었다. 볼테르가 이를 한번 꽉 물고는 답했다.

“상관없다.”

그 이 갈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말린 과일과 약재 몇 가지를 섞어 만든 냉차를 권했다.

“열사병을 예방한다는 약차라고 합니다.”

사실은 마나의 흐름을 바로잡는다는 민트의 효능을 상쇄하는 약차다. 일반인에게는 해로울 것 없지만 마나 뒤틀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험하다고 했다.

라파트니 대공이 알려 준 레시피였고 실제로 저번에 마나 뒤틀림에 대한 연구를 맡긴 아카데미의 교수에게 의뢰해서 효능도 대략 검증받았다.

이를 위해서 마나의 흐름을 본다는 사람을 벨에게 말을 전하러 온 그녀 가문의 하녀로 위장해 궁으로 들였다. 그녀를 이용해 볼테르가 차를 마셨을 때 몸에서 마나가 얼마나 어떻게 뒤틀리는지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볼테르는 자신이 가진 병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내 실험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밀렌이 말했다.

“운이 좋다면 이걸 꾸준히 먹여서 독살도 가능할지 몰라요.”

글쎄. 운이 정말 좋다면 그렇겠지만 이걸 꾸준히 먹일 수나 있을까? 어차피 당사자는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해짐을 느낄 텐데 그럼 복용을 중단하겠지.

“괜히 들키면 골치 아파.”

“골치 아플 것 없어요. 알아도 공론화할 수 없어요. 공론화하는 순간 그가 황실의 핏줄이 아님을 인정하는 게 되는 거니까. 마나 뒤틀림은 유전병이잖아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실패하게 되면 상대가 신중해지는 것이 문제지.”

그러니 실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나 이번 실험을 통해서 독살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면 밀렌의 말대로 독살을 진지하게 고려할 거다.

나야 마나 뒤틀림을 내가 어찌 아느냐고 내빼면 그만이다. 그러나 후작가는 아니었다. 황실의 혈통을 농락한 죄로 체리에라는 성을 쓰는 모든 사람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릴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차를 마시는 볼테르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겉으로 불안감이 티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볼테르의 등 뒤에서는 마나의 흐름을 본다는 여자가 다과 트레이 앞에 서서 그를 관찰했다.

그러는 동안 영양가 없는 안부를 주고받았고 최근 황도의 소식과 변방의 사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적당히 시간이 흐르고 볼테르가 돌아가자 나는 곧바로 방으로 그녀를 불렀다.

“어땠어?”

“사실 마나 뒤틀림을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확실히 일반 사람들과는 몸속 마나의 흐름이 묘하게 달랐습니다. 아까 그 약차를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확실히 요동치는 것이 드러났고요.”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인가?”

“저는 그저 보이기만 할 뿐이지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심각한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어. 그대가 의사나 마법학자는 아니니까.”

물론 아쉽긴 하지만 딱 그뿐이다. 사람에게 능력 밖의 일을 다그치고 강요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처음부터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이게 치명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마나를 보는 눈으로 이 병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가였다. 그리고 볼테르가 ‘마나 튀틀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100%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걸 확인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머뭇거렸다.

“그런데 뭐?”

“아까 일과 별개로 언젠가 전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긴장한 듯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하녀복 앞치마를 구겨 꽉 쥔 손등에 뼈마디가 희게 툭 불거졌다.

그런 그녀의 앞을 벨이 막아섰다.

“황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평민은 수도 없이 많아. 그때마다 모든 사람의 말을 하나하나 전부 들어주면 끝도 없다. 게다가 다른 평민들과 비교하여 형평성에 어긋나. 전하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정식으로 공개 알현의 날에 맞추어 신청서를 작성하고 기다려라. 그것이 절차에 맞는 일이다.”

벨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긴장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원칙적으로는 벨이 맞다.

“저는…… 그걸 신청하는 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조급해서라든가 공개 알현의 날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거다. 대충 예상은 된다.

“신원이 불분명하니 정식으로 신청할 방법도 없겠지.”

그러자 벨이 경악했다.

“전하! 신원이 불분명한 자를 어째서 황궁까지……!”

그리고 여자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마치 알고 있었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깜빡깜빡. 두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신원이 불분명한 자라도 신전에서 소개해 줬으니 사연이야 어쨌든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아서. 필요해진다면 감시하는 것도 뒤를 캐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고.”

나는 잠시 놀란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귀족을 상대로 억울한 일을 당했나? 그래서 그거 해결해 달라고 하려나? 아니면 출신 지역 영주가 미친놈이라 삶이 너무 팍팍했나?

보통 평민들이 공개 알현의 날에 찾아오는 이유가 이런 거였다. 귀족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영주의 착취가 심해서 견디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눈앞의 이 여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뒤에 다른 일정도 딱히 없는데 들어나 볼까?’

사실 공식적인 알현의 날 행사 때 고모님 옆에서 구경만 하는 건 지루했다. 제왕 교육의 일환이라며 고모님 옆에 강제로 앉혀져서 몇 시간 동안 하는 것도 없이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들키지 않게 몸을 이리저리 비틀곤 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이런 사연을 듣고 해결해 보고 싶다는 생각. 언젠가는 공명정대한 성군의 노릇을 해보고 싶었다. 황제였던 할바마마와 지금의 고모님이 하는 것처럼 제국민의 목소리에 귀도 기울여 보고 싶었다.

고모님은 어린애의 환상, 꿈 정도로 치부했지만 뭐 어떤가. 꿈은 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랬다.

게다가 해마다 날짜 잡고 각 맞춰서 그냥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판인데 희귀한 재능에 도움까지 받아 놓고 입 싹 닦기도 뭣했다.

‘아직 뭘 해결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단 말이나 들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면 되지.’

내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전하, 일단 제 하녀로 위장해서 들였으니 제가 집에 급한 일이 생긴 척하면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잠깐만!”

멈칫.

“말이라도 일단 들어는 보겠어. 귀로 듣는 것 정도쯤이야.”

벨은 잠시 나를 쳐다보았고 여자는 그런 벨의 눈치를 살짝 쳐다보았다. 둘 모두 이 상황이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벨은 잠깐 나가 있어 볼래?”

“하지만……!”

벨의 입술이 위험하다는 말을 삼켜 내듯 달싹였다.

그런데 어차피 암살의 위협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녀가 나를 암살할 이유도 없다.

늘 섀도 나이트 한 명이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고 문밖에는 호위 기사들도 있다. 이 여자는 나와 만나기 전에 시녀들에게 꼼꼼하게 몸수색도 당했고.

그래도 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머뭇거렸다. 언제 누가 누구에게 사주를 받아 내가 마시는 물에 독을 탈지 모르는 것이 권력다툼이고 암살의 위협도 해마다 한두 번은 생기니 벨의 걱정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가 있어도 돼.”

벨이 여기 있어 봤자 정말 암살을 당할 상황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섀도 나이트가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까.

벨이 더는 토를 달지 않고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눈앞의 여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저…… 무례한 줄은 아오나.”

역시 뭔가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건가? 그래도 상대가 자작이나 남작쯤 되었으면 좋겠는데 작위가 백작 이상 올라가면 아무리 황족이라도 골치가 아프다.

기왕이면 듣고 나서 거절하는 것보다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고 싶었다. 충성도를 관리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손해 볼 건 없다.

내게는 믿을 만한 마나 보는 능력자가 간절한데 그런 능력이 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도 나도 서로 수지타산이 맞아 좋은 것 아니겠는가.

곧 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말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마음에 드신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래도 아주 맨입으로 도와 달라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건 무슨 말을 하느냐와 무슨 부탁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내게 해줄 말이 마음에 드는지 부탁이라는 것과 비교하여 내게 이득과 손해 중 뭐가 얼마나 더 클지……. 그리고 그 부탁이라는 게 내 능력 안에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질 거고. 그래서 부탁이란 건 뭐길래?”

나는 무작정 알겠다고 하기 전에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찾는 걸 도와주세요. 이름과 나이와 출신 지역도 전부 알아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섀도 나이트에게 시키면 어지간해선 금방 찾을 수 있다.

“찾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사람 찾는 전문 인력을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 긍정적으로 고려하겠어. 그래서 내게 해줄 말은?”

그녀의 부탁이 내게는 쉬운 요구라는 말에 그녀는 확신을 담은 눈을 빛냈다. 상기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도 곧 들릴 것 같았다.

“전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는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그건 알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이야기를 듣자 급격히 흥미가 떨어졌다.

“소문처럼 황제 폐하께서 죽인 것도 아니에요.”

“그것도 알아.”

오히려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추어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제가…… 제가 봤어요……. 어떻게 죽였는지, 그놈들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제 두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