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12. 함정
몰딘 지방의 일이 정리될 즈음 볼테르는 슬슬 황궁으로 돌아오겠다고 했고 고모님은 그런 숙부에게 오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이유인즉, 더는 황자도 아닌 황족이 황궁을 제집처럼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는 완전히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인 키옌 태후를 뵈러 오겠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에 고모님은 바로 볼테르가 썼던 궁을 깡그리 정리해 버렸다. 키옌 태후는 부랴부랴 자신의 궁에 볼테르가 머물다 갈 객실을 마련했다.
사나흘은 머물려나?
사실 돌아온다면 내가 사교계에서 뒷소문이라도 퍼뜨릴 예정이었다. 황자도 아니게 되었으면서 황궁에서 살려 하는 것은 황위를 탐내기 때문임이 분명하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래서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내 이름으로 황실에서 파티를 주최하기로 한 일은 내 예법 스승이신 크로이젠 공작 부인과 외할머님인 세르피스 후작 부인의 도움에 힘입어 착실히 진행됐고 드디어 당일이 되었다.
파티 주제는 보드게임이었다. 체스부터 유명 숍의 신상 보드게임까지 골고루 있다. 보드게임을 제작하는 공방의 장인이나 종업원들을 파티 도우미로 불렀다. 그들은 자신의 공방에서 개발한 보드게임을 홍보하고 판매하기 위해서 자랑할 만한 신상품을 들고 왔다.
오랜만의 황궁 개방, 그것도 라벤더궁의 개방은 십여 년 만의 일이라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모였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 저건 사고 싶다며 쇼핑리스트를 작성하는 사람 등 다양했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전하, 저희 테이블에 자리가 비는데 여기로 오시겠어요?”
로이드가 손짓했다. 테이블에는 로이드 말고도 네 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에는 민티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도 마침 길었던 추리 게임이 하나 끝나서 머리를 식힐 겸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니던 참이라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가가자 로이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약간의 운과 순발력으로 하는 거예요. 머리 쓰는 건 조금?”
“그럼 한 판만 구경하고 나서 같이해요.”
나는 빈자리에 앉아 게임이 돌아가는 것을 차분하게 구경했다. 두 명씩 서로 카드를 교환하다가 누군가 가운데 놓인 종을 치면 패의 합이 가장 높은 사람과 가장 낮은 사람이 승점을 가져가는 게임이었다.
‘머리 꽤 써야 하는데?’
조금이라는 로이드의 말과 다르게 작정하고 이기려면 여러 사람과 골고루 교환하면서 상대방이 들고 있는 패도 슬슬 떠봐야 한다. 로이드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은 채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그때였다.
때앵!
테이블 가운데 종이 울렸다. 민티아와 로이드의 손이 동시에 종 위에 올라가 있었다. 먼저 종을 친 건 민티아였고 그녀의 손등에 로이드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 움찔 놀란 손이 잠시 종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그 순간 내 정면에 앉은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그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눈웃음이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파혼할 구실을 만들어 드릴게요.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그나마 나은 방법으로.”
오래전 했던 약속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파혼에 가장 좋은 방법이란 없다. 그래서 그는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민티아만 보아도 오가지도 않은 혼담 때문에 뒷소문이 나질 않았던가. 나 역시 거대한 흐름을 바꾸려면 그런 건 감수해야 했다.
나는 살짝 건조한 얼굴로 로이드와 민티아를 쳐다보다 말했다.
“끝났군요. 모두 카드 공개 하시죠.”
다음 판, 그리고 또 다음에서도 자꾸만 우연처럼 그들의 손이 겹쳤다. 내가 의도적으로 로이드의 패를 몰아 주었고 로이드는 타이밍을 잘 재고 있다가 민티아와 손을 겹쳐 종을 쳤다. 그런 우연 같은 필연을 차곡차곡 쌓아 갔다.
사람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둘이 들고 있던 패는 누가 보아도 종을 치기에 적당했다. 실제로 그들이 쌓아 온 승점이 가장 높기도 했다. 물론 나는 양쪽에 패를 몰아 주느라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이게 무슨 운과 순발력 게임이야? 머리 엄청 쓰고 있는데.’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섞는 더미 안으로 던졌다. 하인이 카드를 모아 잘 섞는 동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였다.
“두 분 다 엄청 잘하시네요.”
“운이 좋았죠.”
민티아가 겸손 떨듯 말했다. 나는 생긋 웃으면서 받아쳤다.
“운도 그 정도면 실력이에요. 전 머리 쓰는 게임은 너무 지쳐서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게임을 찾아가야겠어요. 그럼 즐겁게 노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게임의 심판을 맡고 있던 공방 장인을 손짓하듯 불렀다.
“이 게임이 공방의 신제품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게임에 조금 허점이 있는 것 같아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공방 장인과 따로 이야기하듯이 조금은 거리를 두면서도 테이블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과 구경하던 사람들은 들릴 정도로 이야기했다.
“승자가 두 명인 게임이니 두 사람이 암묵적으로 짜고 승점을 독식할 수도 있겠어.”
“조언 감사합니다. 보완점을 마련하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멀어지자 누군가 다가와서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그럼 저 두 분이 한 팀이었다는 건가요?”
한눈에 보아도 호기심 많으면서 철은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대강 비슷했다. 다만 누군가 대신 물어 주길 기대하면서 묻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데. 저 두 분 모두 눈치가 빠르고 심리전에 능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건 실력이었어요. 아까 말한 건 그저 제가 게임을 하면서 발견한 문제점이었을 뿐이고.”
나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그었다고 해서 내 말을 믿을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저런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이제는 사라진 그때의 시간에서, 로이드가 어째서 자신을 좋다고 하는 나와 파혼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는지는 영원히 알 길이 없다. 적어도 이번에 그는 가문에 대한 작은 반항을 하고 싶다고 직접 말했다.
황녀와의 파혼과 국서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 겨우 작은 반항이라니, 사실 믿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우리 둘의 목표가 일치한 이상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의 일탈을 도울 거다.
‘미안해요. 로이드 님. 오해해서.’
***
황후궁의 별실에서 머물게 된 볼테르는 에오넬을 찾아와 잔뜩 불만을 토로했다.
“누님! 그래도 제 궁은 제가 직접 정리하게 해주셨어야죠!”
에오넬은 화가 난 볼테르를 향해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네가 직접 정리하고 나갔어야지. 나는 이미 몇 년이나 시간을 주었단다. 정리하지 않은 건 너야. 게다가 출궁한 황족이 한 해의 절반 이상을 궁에서 사는 모습을 보이니 뒤에서 수군거리잖니.”
잠시 말을 끊은 에오넬이 팔꿈치를 책상에 올려 두 손을 깍지 끼고는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가령…… 황위에 욕심이 있어서 짐을 빼지 않는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
볼테르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게 라파트니 대공을 닮은 건 맞는 걸까?’
사실 애매하다.
그러나 굳이 대공이 아니더라도 라파트니 공국이 얽혀 있는 이상 그쪽은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묻는 편이 낫다. 그걸 함부로 파고들면 제국이 라파트니 공국과 동반자살 하자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건 최후의 카드여야 했다.
아직 멜리와 대공의 큰 그림을 모르는 에오넬은 그 문제는 그렇게 모른 척하기로 했다.
볼테르는 에오넬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그나저나 방금 황위가 어쩌고 하는 그 소리는 그저 겁을 주기 위함인 걸까, 아니면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떠보려는 걸까.
볼테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 당치 않습니다. 누님!”
에오넬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놈의 누님 소리도 정말 듣기 싫다. 그러나 에오넬은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물론 ‘나’는 ‘너’를 믿는단다.”
개인 대 개인을 강조하는 묘한 뉘앙스가 볼테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말이 어쩐지 ‘내가 너를 믿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너희를 믿지 못한다.’처럼 들렸다.
“가보렴. 어마마마께서 기다리실 텐데. 가뜩이나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셨던 모양이야. 새벽에 몇 번 깨셨다더구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한 말 같았지만 사실 철저하게 계산된 말이었다.
키옌이 악몽을 자주 꾸는 것도 아니고 새벽에 몇 번 깨는 일이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은 보통 측근 시녀나 그날 밤 당직을 섰던 하녀들이나 알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함부로 가십처럼 입에 올릴 사안도 아니었다.
이건 태후의 궁 내부에 말을 전하는 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에오넬은 볼테르를 관찰하며 나가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알아듣긴 한 걸까? 혹시 몰라 그가 오기 전에 키옌인 척 속여 편지를 보내긴 했었다. 황궁에는 듣는 귀가 많으니 황궁에서는 절대로 ‘그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방금 한 말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겁을 먹은 건지 어깨를 움츠렸다.
“가보겠습니다.”
볼테르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에오넬은 실소를 머금었다.
‘멍청해서 다행인 건지…….’
안타까운 건 볼테르가 멍청하다고 그 주변 사람들까지 멍청하진 않다는 거였다.
한편 에오넬의 집무실에서 나온 볼테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표정 뒤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반면 그녀의 눈빛에 제 생각은 그대로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그건 언제 느껴도 섬뜩했다.
자신이 어마마마와 주고받은 은밀한 편지도 그녀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어.’
물론 맨 처음 온 편지는 제론 자작이 있는 곳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작이 내용을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이후로 오는 모든 편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벌써 꽤 시간이 지난 이야기였다.
라파트니 공국의 조력자가 보내온 편지 역시 아무도 모르게 읽었다. 심지어 그건 누가 어떻게 전달하는지도 몰랐다.
‘일단 어마마마가 시킨 대로 하고 기다리자. 필체가 어마마마의 것은 맞았으니까.’
그녀가 자신을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 놓고 사사건건 간섭하겠지. 태후의 권한을 벗어난 행위들을 할 거다.
어마마마가 그냥 태후 자리에 만족할 사람이었다면 그냥 누님과 친하게 지내는 쪽을 선택했을 거다.
‘그럼 진짜 황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