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볼테르가 편지를 읽는 내내 제론 자작은 심장이 쫄깃했다.
편지가 조작이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얼마 전 자신을 황녀의 햄스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편지를 하나 주면서 볼테르가 자연스럽게 읽어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고 떠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편지 한 통을 가져왔다.
황녀에게서 ‘햄스터 보낼게.’라며 전서구가 도착했을 때는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했었다.
‘그 사람 햄스터처럼은 안 생겼던데.’
햄스터보다는 거대한 근육질 랫트에 가까웠다. 황녀님처럼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권력자에게는 근육질 랫트도 귀여운 햄스터처럼 보일 수가 있구나 생각하며 제론 자작은 딴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볼테르가 편지를 다 읽고 희미하게 웃었다.
한편 볼테르는 뿌듯했다.
지긋지긋한 몰딘 지방에서의 생활도 곧 끝이 날 것 같았다. 늘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황도가 그리웠다. 이렇게 소똥 냄새 진동하는 시골 동네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시야가 탁 트인 풍경이니 조용한 분위기니 몸과 마음을 쉬기 딱 좋다느니, 그런 건 다 개나 주라지.’
어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신을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는 거였다. 이미 오래전 황태자를 죽인 이후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황제가 되어야만 했다.
지금이야 에오넬이 유력한 용의자라며 손가락질당하고 있어서 조사가 지지부진하다지만, 이대로 아멜리아가 황제가 되어 십여 년 전 그 일을 들쑤시기라도 한다면 모두 죽는다.
다행히도 어마마마께서 라파트니 공국 쪽에 도와줄 사람을 찾아놓았다고 했고 그가 어마마마의 편지를 받은 건지 도와주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때가 머지않았다.
***
크로이젠 공작령의 북쪽에는 거대한 숲이 있다. 가끔 마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공작가의 기사단이 주기적으로 그 숲에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래서 영지민들은 어지간하면 그 숲 근처를 얼씬하지 않았다.
공작성의 뒤쪽 문으로 빠져나가 샛길을 따라 숲 중반부 즈음 들어가면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고 별장도 한 채 나온다. 그리고 요즘 그곳에는 상황이 머물고 있다.
그는 온통 푸른 잔디로 뒤덮인 전망 좋은 호수 앞에 커다란 흔들의자를 놓고 앉아 눈을 감았다. 머리 위에서 하인 하나가 거대한 양산을 흙바닥에 푹 꽂아 놓고는 부채질을 했다.
그렇게 한적한 여름 오후를 보내고 있을 즈음, 크로이젠 전 공작이 다가왔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상황 폐하.”
“어?”
깜빡 졸다 깬 상황이 몸을 일으켰다. 크로이젠 전 공작 뒤에 선 아르가 차분하게 예를 갖추는 동안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상황이 빙그레 웃었다.
“이 별장의 주인이 왔구나.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군.”
“더 계셔도 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상황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원하는 대로 잘 처리가 되었더냐? 엘비가 그러더구나. 공작 좀 설득해 달라고. 네가 엘비에게 부탁했냐?”
“얘기가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르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공작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단다. 내가 여기 몸을 의탁하기만 하면 되었거든. 상황을 자신의 영지에서 모시고 있다는 건 꽤 중요한 카드로 쓸 수 있으니까. 공작에게는 그걸 조건으로 걸었단다.”
아무리 자리에서 물러난 황제라고 해도 황족 출신이 아닌 귀족에게 제 몸을 맡기다니 상황으로서는 상당히 크게 선심을 쓴 것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패를 위해서 상황은 가장 귀한 패를 내놓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미안해야지.”
황제가 소탈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멜리가 순순히 보내 주더냐?”
상황은 제 손녀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저놈을 제 호위로 내놓으라고 하더니, 기어이 손에 넣고야 말았다. 그러더니 검술 예동으로 삼고는 옆구리에 끼고 다니려 했다. 손녀는 한번 제 것으로 찍으면 절대 손에 쥐고 놓는 법이 없다.
그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소유욕은 마찬가지였다. 누가 제 사람을 건드리면 끝까지 쫓아가서 박살을 내어 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 애가 데뷔탕트를 치를 즈음 제 시녀의 약혼자가 바람을 피우더라는 사교계 소문이 돌았다. 그때 그가 참석한 파티장을 찾아가 다짜고짜 양산으로 다리 사이를 찍어 버린 일화는 유명했다. 에오넬이 그것을 수습하느라 참 애를 먹었지.
그런 아이가 한번 제 사람이라고 찍은 사람을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다.
역시 대답이 곧바로 나오질 않는 걸 보니 곱게 나온 건 아닌 듯하다.
“안 놓아주지?”
“1년만 쉬다 오랍니다.”
“1년 쉬었다가 가려고? 뭐 하러? 그냥 잠적해도 모를걸? 찾기야 하겠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성에서 지내니 찾기는 힘들 거다.”
상황이 허허 웃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천천히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는 몹시 차분했다.
“아마 찾을 겁니다. 정보 길드에서 저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서요.”
“누구를 찾는데? 아르 쪽 뒷조사냐? 아니면…….”
“알테어 쪽이요. 어디서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황궁 도서관에서 귀족 계보를 뒤진 적이 있더군요. 그걸 대체 왜 뒤져 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눈치가 빠른 애는 아닌데. 그럴 일이 있었느냐?”
아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럴 일이라…….
그럴 일이라고 해봐야 딱 한 번뿐인 것 같다. 엔델포프에 다녀왔을 때, 황도에 있는 공작저에서 밤새 앓았던 적이 있다. 손님 방에서 묵었던 아멜리아는 밤에 길을 잃었다면서 방으로 찾아오더니 로이드가 준 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갔다.
“공작저에 왔을 때 전하께서 길을 잃었다고 제 방까지 오신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 방이 로이 형의 방인 줄 알고 있습니다. 같이 있었거든요.”
“흠…….”
“눈치가 둔하신 건 아닐 겁니다. 다만…….”
상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만?”
“전하께서는 현실 부정을 꽤 잘하십니다. 특히 인류애를 상실할 만한 상황에서요.”
옆에서 기척도 없이 조용히 따라 걷던 전 공작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찔리는 것이 많았다.
“인류애까지 상실할 정도라더냐?”
전 공작이 떨떠름하게 묻자 아르는 별 뜻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사자인 제가 괜찮으니 됐습니다.”
상황이 고개를 쓱 돌려 전 공작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자네, 얘가 이거 괜찮지 않다는 말을 돌려 한 것 같은데.”
“착각이십니다. 폐하.”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게 어른들의 강요에 의해서였나? 아니다. 오히려 상황을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으면 민티아와의 혼담은 자연스레 깨졌을 거다. 그리고 번듯한 기사단에 들어갔을 거고 그냥 성향에 맞게 조용히 생활하다가 황녀의 호위기사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미래를 이렇게 바꾸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걸로 만족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과 할아버님이 죄책감을 느끼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다. 어쨌든 그분들도 그걸 감수하고 선택한 문제니까.
***
밀렌이 내 방으로 찾아온 건 아주 늦은 저녁이었다.
“황녀님!”
여전히 ‘전하’라는 단어는 낯 간지럽다며 하지 않는다. 아주 제멋대로였다.
“왜?”
“정말로 아르한테 감시 붙이지 말아요?”
“쓸데없는 곳에 고급 인력 낭비하지 마.”
“나도 뭐 그 녀석이 어디 가서 섀도 나이트에 대해 불어 버릴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떠나서 이대로 진짜 도망가 버리면 어쩌시게요? 1년 후에 안 돌아오면?”
돌아오기 싫거든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그냥 오고 싶을 때까지 내버려 두겠다고. 만약 1년 후에 와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유를 찾아서 떠나야겠다고 해도 그렇게 하라고 할 생각이다.
‘1년 후에 안 돌아오면…….’
밀렌의 질문을 곱씹다가 툭 말했다.
“검술 예동을 다시 뽑아야지.”
“아니, 전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밀렌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아르를 추적 관리 하자는 말 하려고 이 시간에 날 보자고 한 거야?”
“그건 아니고요. 첩보가 하나 날아왔는데요.”
“음?”
“파피란 전 공작님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돌아가신 할마마마의 친정이라는 건 내게 꽤 거리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전전 공작인 증조 외할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금은 더더욱 남 같았다. 고모님이야 현 공작과 사촌이니 상당히 깊은 교류를 하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그저 ‘우호적인 공작가’,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전 공작이라면 내게는 아바마마의 외삼촌이시다.
“전 공작님이 왜?”
“음…… 뭐라고 해야 하지?”
한참을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머리를 긁적이던 밀렌이 ‘에라, 모르겠다.’ 하며 말했다.
“돌아가셨대요. 곧 황도로 소식이 올 거예요.”
***
한편 상황이 크로이젠령의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호위를 맡던 기사가 돌아가고 대신 그의 황제 시절 호위대장이었던 글로렌스가 왔다.
그는 상황의 옆에 있는 아르를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황에게 고했다.
“폐하, 얘 왜 여기 있습니까?”
“멜리한테 얘기 못 들었어? 얘 1년만 쉬기로 했다는데?”
“황녀 전하가 여기로 보내셨다고요? 왜 고향으로 안 가고 크로이젠 공작성 별장에서 쉽니까?”
“뭐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자네를 부른 건 내 호위도 있긴 한데…… 멜리는 어차피 이 녀석 없으면 검술에 관심도 없을 것 같고.”
상황이 고갯짓으로 아르를 슬쩍 가리켰다. 글로렌스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요즘 좀 귀찮아하시긴 합니다.”
“그거 봐. 내가 그랬잖아. 검술 좋아서 배우고 싶다고 한 거 아닐 거라고. 그래도 계승자는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러니까 자네도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쉬면서 그거나 마저 가르쳐 놔. 황궁은 머리 아팠지?”
정답을 강요하는 듯한 질문이었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여 글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정작 아르는 기꺼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쉬라고 여기로 보낸 게 맞나 싶다.
그래도 항상 시끄럽고 어수선한 수도나 복작복작한 황궁에서 들들 볶이는 것보다야 여기가 편한 건 사실이다. 저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글로렌스는 아르의 반응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 표정은 본격적인 힐링 라이프를 기대하고 왔으나 뭔가 더 짜증 나는 일이 생긴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