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앗!”
치맛자락을 들고는 그쪽을 향해 달렸다. 이름이라도 부를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렇게 했다가 남들이 듣고 괜한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금방 목소리가 들어갔다.
그는 후원 뒤쪽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숨이 차도록 달린 끝에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저기……!”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듯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할 이야기가 있다면 이름이라도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숨 좀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씀하세요.”
가벼운 달리기였지만 꽉 끼는 드레스를 입고 달려 그런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코끝에서만 머물렀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개 용건부터 묻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숨이나 고르라는 로이드의 말 한마디가 괜스레 심장에 박혔다.
“저…… 죄송해요. 아까 로이드 공자님의 인사를 무시한 게 아니라…….”
“갑자기 쳐다본 곳에서 사람이 튀어나와서 놀라셨겠어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사람이 서 있었으니 그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든 건 맞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이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 아니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거기 계신 줄 몰랐어요. 그래서…….”
말을 어떻게 끝맺을지 몰라서 우물쭈물하자 로이드가 능숙하게 그리고 티 나지 않게 말을 받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밤 산책 하기도 괜찮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칵테일파티다 보니 취기도 오르고.”
그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과일 향과 몽롱한 알코올 향이 났다. 가만 보니 귓가가 살짝 붉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자니 멀리서 들리는 파티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취기가 오른다는 그의 말처럼 정말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세상과 일시적으로 단절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전 아직 성년식을 하지 않아서 무알코올 칵테일이었는데요…….”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분위기에 취할 수 있는 거죠. 그것도 무시 못 해요.”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어쩐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근처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고 편안하게 어깨에 힘을 풀고 있었다.
하늘에 박힌 별은 수없이 반짝거렸고 근처에서 풀벌레 몇 마리가 ‘찌르르’ 하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감자 여름의 따뜻한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쳐 포근했다. 좋았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압박과 타인의 시선들이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바람이 일시적인 해방감을 가져왔다.
그렇게 3초. 눈을 뜨자 로이드가 옆에 떨어진 다른 벤치에서 그녀와 비슷한 자세로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있었다. 한쪽 팔을 들어 이마에 얹은 채였다. 그 모습에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사실은 너도 나처럼 어른들에 의한 강압적인 삶을 살아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야. 적이야.’
민티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두 손으로 뜨거운 볼을 감쌌다가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숨을 내쉬자 잠깐의 달콤한 꿈이 달아났다.
그래도 고맙다고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뭐가 고마우냐고 되묻는다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냥 일어났다.
“전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는 황녀 전하께서 주최하실 황실 파티에서 뵈어요.”
“……네.”
다음을 약속하는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여름이 무르익고 있었다.
***
편지 배달을 마친 레이하임은 라파트니 대공이 건넨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루 네 시간만 자고 쉴 새 없이 달렸다. 지나는 마을마다 말을 갈아타며 달린 결과 제국의 황도에서 공국의 수도까지 엿새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물을 마시면서 대공의 얼굴을 힐끔거리자 대공이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읽다 말고 레이하임을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나?”
도리도리.
레이하임은 고개부터 저으며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꿀떡 삼켰다. 차가운 물이 뒷골을 잡아당기며 관자놀이가 뻐근했다.
“읏! 아닙니다.”
“천천히 마셔라, 햄스터.”
“…….”
처음 만났을 때는 더러운 쥐새끼라며 발로 걷어찼는데 지금은 황녀의 햄스터라고 부르며 냉수를 건넨다. 과연 그걸 크나큰 발전으로 봐야 하는 건가 싶다.
레이하임은 빈 물컵을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대공을 힐끔거렸다.
자세히 관찰하니 정말 볼테르 황자랑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황자의 금발이 사실은 황제가 아니라 대공을 닮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황제의 금발은 가늘고 화사하면서 반쯤 곱슬곱슬했다. 아멜리아 황녀도 화사하게 굽이치는 금발이었다. 그러나 볼테르의 머리카락은 조금 더 진하고 묵직한 금색이며 반듯한 직모였다. 대공과 똑같았다.
‘역시 대공이 맞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대공이 편지를 내용이 보이지 않게 반으로 접어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일전에 자네가 여길 왜 왔는지 알아.”
대공은 희미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턱을 괴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레이하임이 뭐라 대답할 말을 고르려는 행동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나 같은가? 그런데 사실 그날…… 얼마 전이지? 스무 해도 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 어쨌든 그날 제국에 간 건 내가 아니야, 사실.”
레이하임이 인상을 찡그렸다.
“언제 말입니까?”
“볼테르 황자가 태어나기 전에 말이야. 황제가 잠깐 황궁을 비웠던 그때. 그때 우리 쪽에서 사절단이 간 적이 있거든. 기억하지?”
“아…….”
사절단 대표를 임명해서 신하들을 보낼 것 같던 대공이 돌연 직접 온다 하여 황궁이 갑자기 난리가 났었던 그날. 하지만 레이하임은 그날을 기억한다.
“제가 본 사절단 대표는 당신이었습니다.”
“아니야. 난 그날 직접 간다고 말했던 적이 없어. 사절단 대표를 내 사촌에게 맡겼지. 아니, 사실 실제로는 쌍둥이 형이야. 난 사절단 대표를 임명해서 보내겠다고 분명 제국에 말했어. 엔델포프로 중간에 마중 나온 제국 쪽 사람들이 그를 보곤 내가 직접 왔다고 지레 난리를 친 거지.”
그 순간 레이하임은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허! 근데 왜 다들 오해하게 두었습니까?”
“뭐, 그놈이 그런 사고를 칠 줄 알았나? 어쨌든 그래도 상황은 알고 있었으니까. 당시에는 내 쌍둥이를 나로 오해한 것에 대해서 상황도 나도 딱히 서로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정정하려 해도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잡히지도 않았다던데?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네.”
“그럼 지난번 황후의 생일 파티 때 오셨던 건 누굽니까? 하녀 숙소 근처의 온실에서…….”
“그땐 내가 간 게 맞는데 사촌을 데리고 간 것도 맞아. 그림자 무사라고 들어 봤어?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은 가끔 상당히 유용하거든. 온실 얘기는 내가 모르는 얘기 같으니 아무래도 그쪽인 것 같군.”
사람을 무슨 도구처럼 말하는 모습에 레이하임은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대부분 권력자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리곤 하지만 같은 귀족이나 자기 피붙이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게다가 상황도 그렇고 황녀도 그렇고 아랫사람을 물건처럼 대한 적은 없어서 더 낯설었다.
‘그래서였구나.’
볼테르를 제거하려는 황녀 전하를 도우려는 이유가 이거였다. 자신의 사촌을 없애려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볼테르 황자의 존재는 라파트니 공국 입장에서는 너무 위험했다.
더불어 대공 자신에게도 마치 자신인 척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너무 위험했다. 그림자 무사의 장점에 비해 따르는 리스크가 너무 커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건 명분이 되지 않아.’
명분이야 되지만 자충수다. 공국의 귀족이 제국의 황실에 감히 저지른 짓을 공국 입장에서 감당할 수가 없다. 범인 목만 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건 국가 대 국가의 문제다. 감히 제국의 황실을 능멸했으니 어마어마한 배상을 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공은 그 배상의 책임을 피하고자 아멜리아 황녀와 손을 잡은 것이고. 결국엔 황녀를 유인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를 살려서 돌려줄 생각이었던 거다. 어쩐지 전서구가 안 들키고 잘 날아갔다가 날아온다 싶었다.
대공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마냥 ‘내 집에 숨어들다니 괘씸한 놈!’이라고 했다면 알고 있는 제국의 비밀을 전부 불거나 쇼크사를 할 때까지 엄청나게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꼼짝없이 죽었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면서 목 뒤가 뻣뻣하게 굳었다.
“황녀에게 이야기 들었나? 내가 심부름을 하나 시킬 거니까 하고 오라는 이야기.”
“아……! 예.”
“잠깐 기다려.”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는 얕은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열었다.
“흠, 내가 직접 꺼내 본 적이 없어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네.”
레이하임을 방 안에 두고 시종이나 하인을 불러다 시킬 수도 없으니 대공은 일일이 제 손으로 편지지와 편지 봉투, 실링 왁스를 찾아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편지를 몇 줄 쓰더니 봉해서 레이하임에게 넘겼다.
“돌아가는 길에 몰딘에서 볼테르가 볼 수 있게 받는 편지들 사이에 끼워 놔. 황녀 말이 제론 자작이라는 사람에게 말하면 알아서 눈치껏 볼테르가 볼 수 있게 해줄 거라고 하는군.”
레이하임은 편지를 받아 들고 잠시 실링 왁스를 내려다보다 품에 넣었다. 아무리 오가는 편지 내용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게 반역 누명을 씌우기 위한 밑 작업 혹은 증거를 잡고자 의도적으로 반역을 일으키게 하려는 거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