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왜? 갔다가 함정일까 봐 불안해?”
“불안하다기보단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말씀대로 함정일지도 모르니…….”
“글쎄. 함정은 아닐걸? 라파트니 공국은 손이 귀해. 고대 마법의 흔적으로 인한 특유의 유전질환 때문에 많이들 단명하거든. 지금 대공도 전 대공의 아들이 아니라 양자였고. 그렇다 보니 그 동네 족보가 좀 개판이야. 그런 상황이다 보니 크고 작은 모반 역시 흔한 일이지.”
레이하임은 이게 무슨 소린가 생각해 보는 것처럼 인상을 조금 찡그리며 집중했다.
“대공이 지금 처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의 사촌이 아닙니까?”
“생물학적 쌍둥이 형이야. 그리고 원래 전 대공의 양자 자리는 그 쌍둥이 형의 자리였고.”
“그것도 압니다.”
“열 몇 살 무렵까지 같이 자란 제 형을 죽이려는 인간이 키우지도 않은 아들이야 아쉬울까……. 증거를 덮으려고 죽이려 든다면 몰라도. 그리고 아직 대공이 친부인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
세르피아 후작저에서 저녁 사교모임이 열렸다. 밤에도 날씨가 좋아서 실내도 야외도 아닌 공간에서 진행된 칵테일파티였다. 실내와 지붕을 공유하면서 바닥은 실내의 홀과 연결이 되어 있었으나 정작 대리석 바닥과 흙바닥 사이를 가로지르는 완전한 벽은 따로 없다. 배꼽 정도 오는 낮은 난간이 있을 뿐이었다.
후작 부인이 주최한 이 칵테일파티는 사실 후작 부인이 외손녀인 아멜리아 황녀에게 파티를 주최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주기 위해 개최해 본 것이었다. 그녀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황녀를 데리고 다니며 준비한 이 파티는 규모도 적당히 컸고, 초대한 사람들도 전부 정치색을 고려하지 않고 아멜리아 황녀 또래의 귀족 자제들로 구성했다.
로이드도 초대장을 받은 다른 백작 영윤들과 함께 왔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로이드와 함께 아멜리아 황녀부터 찾았다.
“황녀 전하는?”
황녀가 참석하는 파티는 많았지만 그녀는 주로 영애들끼리 모이는 다과 파티 같은 곳 위주로 참석했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경우는 꽤 드물었으니 겹치기도 힘들다. 황실 파티에 참석해도 황녀를 가까이서 보고 말을 거는 건 힘드니 지금이 기회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관심을 쏟는 건 아니었다. 미래의 황제라는 까마득한 신분인 그녀가 신기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런 그녀가 친구의 예비 약혼녀라는 사실은 더 신기해서 말을 자세히 섞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마침 아멜리아가 새파란 드레스를 입고 로이드 앞으로 먼저 찾아왔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굽이치는 금발이 푸른 드레스와 대비되어 눈에 더욱 잘 띄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그리고 평범한 날씨 이야기와 함께 아멜리아 황녀가 황궁에서의 소규모 파티를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이었다.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도착했다.
“어? 체리에 후작 영애 아닌가?”
“안 올 줄 알았는데 오셨네요.”
“그럼 전 이만…….”
곧 아멜리아 황녀는 후작 부인에게 갔고 함께 민티아를 맞이했다. 호스티스가 파티장에서 해야 하는 손님맞이를 충실히 배우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다가 흩어지고 뭉치고를 반복했다.
“그 소문 때문에 올 수밖에 없었겠지.”
“프란츠 공작가에 혼담을 넣은 게 사실이긴 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로이드는 힐끔 민티아를 돌아보았다.
3년 전 즈음에 있던 로크스 거리의 가면클럽 사건으로 약혼자에게 파혼장을 집어 던진 영애들이 꽤 있었다. 정확히는 당사자들의 문제이기보다는 가문 대 가문의 문제였다. 민티아도 그런 케이스였다.
‘3년이면 파혼의 슬픔을 극복했다면서 슬슬 다른 약혼자 물색할 때가 되긴 했지.’
그녀가 프란츠 공작가의 소공자에게 혼담을 넣은 건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프란츠 공작가에서는 소공자의 나이가 어려 혼담이 이르다며 거절했다. 사실 대다수 귀족에게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 더 중요한 순위를 차지했다.
“아마 그렇게 할 생각도 안 해봤을걸?”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프란츠 공작이 워낙 황위 계승권에 대해서만큼은 중립적인 사람이고 그 집안이 대대로 중립을 고수해 왔다는 건 어느 귀족이라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체리에 후작가가 자신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겁도 없이 프란츠 공작가에 혼담을 넣는다? 그런 건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났지?”
“황위 계승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아멜리아 황녀의 혼담이라면 고려해 봤을지 몰라도 현 황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체리에 후작가의 혼담을 프란츠 공작이 거절했다는 건 믿을 만하지만.”
로이드는 일부러 ‘이건 어디까지나 체리에 후작가에서 프란츠 공작가로 혼담을 넣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라는 말은 빼버렸다.
“그건 그래.”
소문을 이용해 에오넬을 황태녀 시절부터 괴롭혀 온 체리에에게 꽤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며 로이드는 마음속으로 미소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할 이야기들을 하면서도 이따금 민티아를 힐끔거렸다. 다른 무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자 역시나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소문이 더 퍼질 테니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려는 건가?”
“아무래도 저렇게 하면 대놓고 큰 소리는 못 내겠지.”
“진짜든 헛소문이든 대단한 정신력이네.”
‘권력에 눈이 멀어 친오빠를 살해했다는 소문보다야 이게 백배는 견딜 만해야지.’ 비록 그런 소문을 어른들이 내라고 시켰다 하더라도 그게 옳은지 나쁜지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남 뒷담 하는 것에는 끼어들고 싶지도 않고 다른 무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듣기 좋은 소리만 들어도 다 못 듣고 죽을 텐데 굳이.’
로이드는 민티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는 얼핏 이런 소문을 모르는 것도 같았다. 아니면 정말 헛소문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아무렇지 않음이 오히려 과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로이드는 그 특유의 관찰력으로 민티아를 분석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곧 한적한 곳으로 산책을 나올 터였다.
로이드는 먼저 파티장과 연결된 후원으로 향했다. 파티장의 소음은 멀어졌으면서 그곳에서 시야가 차단된 적당한 자리였다.
곧 예상대로 민티아가 더운지 부채질을 하며 후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길이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살짝 몸을 틀어 파티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피한 다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길게 호흡하는 모습이 꽤 답답해 보였다.
“휴우.”
어깨가 톡 떨어지고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느낀 그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지 않는 척 곁눈질로 가만히 지켜보던 로이드는 시선이 느껴진 척 연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꾸벅.
오른손을 부드럽게 가슴 아래에 대고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자 민티아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읏!”
한숨 쉬는 모습을 들킨 것이 창피했다. 사실 프란츠 공작가에 혼담을 넣어 달라며 아버지께 조른 적은 있다. 그러나 혼담이 실제로 들어간 적은 없었다. 프란츠 공작이 받아들일 리 없는데 후작이 그런 혼담을 진행했을 턱이 없다.
이미 오랜 옛날에 핑계 좋게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늘 아멜리아 황태손에게 모든 걸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아버지께 프란츠 공작가에 혼담을 넣어 달라 졸랐을 때,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며 포기하라고 했다. 십여 년 전 프란츠 공작에게 혼담이 거절당했을 때 사실은 프란츠 공작이 황실에 혼담을 넣었다고. 그때는 살아 있던 황태자가 아멜리아 황태손이 어리니 후에 생각해 보자며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고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멜리아 황태손에게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
황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어찌하다 보니 황태손과 프란츠 공작가 소공자와의 혼담은 무산이 된 모양이었다.
그때 즈음, 크로이젠 공작가에 혼담을 넣었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엘비어스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으므로 그 혼담은 자연스럽게 차남인 로이드에게로 갔다. 프란츠 소공작처럼 가문의 후계자였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래도 백작가의 뱀 머리보다는 작위가 공작인데 용 목덜미가 낫지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대차게 까였다.
이유는 돌연 황제가 다음 황태자로 고종사촌인 볼테르가 아닌 에오넬 황녀를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멜리아 황태손이 차차기 황제로 급부상하면서 프란츠의 후계자와 오가던 혼담이 완전히 결렬되었다. 공작가의 후계자로 아들 하나뿐인데 국서로 입궁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는 바람에 크로이젠 공작가에는 혼담서 두 개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하나는 아멜리아 황태손의 것, 하나는 민티아 체리에의 것이었다. 그리고 크로이젠은 황제와 손을 잡았다.
‘원래 전부 내 것이었는데…….’
서러웠다. 아멜리아 황녀만 없었더라도 사촌인 볼테르가 황제가 되었을 텐데. 그녀만 없었어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성으로 살 수 있었다. 황후 다음 가는 권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
백작 부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제국에 백작은 널리고 널렸다. 같은 백작 부인이라도 공작가 차남이나 삼남 출신인 백작과 평범한 백작은 그 영향력의 차원이 다르다.
탐이 났다. 로이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친절하고 배려 깊었다. 그런 사람을 빼앗긴 것이 분했다. 그런데 아멜리아 황녀는 복에 겨워서 그런 것도 모르는 것 같아 더 화가 났다.
‘로이드도 아멜리아를 약혼녀라고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
둘의 관계는 평범보다는 좀 더 친한 친구 같아 보였다.
“하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즈음, 민티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대방의 인사를 받아 놓고 멍하니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니!
서둘러 마주 인사를 하려는데 로이드는 이미 막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