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이 어미가 황궁에서 황자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몰딘 지방의 야만족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군대의 훈련에 힘쓰도록 하세요. 이 어미는 늘 황자의 복권을 신들께 빌고 있답니다.
(이하 생략)」
볼테르는 키옌 태후의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에오넬이 손을 써둔 편지였다.
원문은 이러했다.
「이 어미가 황궁에서 황자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몰딘 지방의 야만족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식과 무예’에 힘쓰도록 하세요. 이 어미는 늘 황자의 ‘안전’을 신들께 빌고 있답니다.
(이하 생략)」
대놓고 반역하자는 뉘앙스를 풍기면 에오넬이 편지를 빼돌려 조작했다는 것이 티가 난다. 그렇게 된다면 볼테르가 키옌과 직접 이야기를 시도하려 할 거고, 편지가 조작되었다는 것이 금방 들통날 거다.
에오넬의 예상대로 볼테르는 살짝 위화감만 느꼈을 뿐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 초에는 야만족들에게 화약류를 밀수출하던 불법 밀수업자를 잡아 처형한 적도 있다. 그 때문에 몇몇 귀족들이 야만족과의 국경 인근에 군대를 충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황제인 에오넬도 그것을 허가해 주었다.
‘그럴 정도니 어마마마께서 걱정이 많으실 수도 있지.’ 볼테르는 아직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편 볼테르가 편지를 뜯어 읽는 것을 제론 자작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멜리아 황녀의 줄에 서기 위해서 스파이 노릇을 자처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처절한 황도 진출 노력이었다.
볼테르가 편지를 읽으면서 짓는 오묘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자작은 볼테르의 책상 위, 비어 있는 찻잔에 민트티를 새로 채워 주는 척하며 빠르게 편지를 힐끔거렸다.
찻잔에 찻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볼테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편지를 접어 두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자작은 내용을 파악했다. 고작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편지라 내용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작이 차를 따르는 것에 집중하는 척하자 볼테르도 그가 편지 내용을 보았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떨지 말자. 떨면 안 돼.’
자작은 가까스로 진정하며 찻주전자를 거두었다. 짧은 문장 속 내용은 몹시도 위험했다. 더 여기에 있다가는 무슨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차가 식었으니 하인을 시켜 데워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별로 할 것도 없는데 자작은 쉬게.”
‘다행이다.’ 자작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멜리아 황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평범한 우편으로 보내지 않고 아멜리아가 준 전서구를 이용했다. 얇은 종이에 정말 세밀하게 글씨를 써서 돌돌 말았다.
「키옌 태후가 수상합니다. 볼테르 전하께 편지를 보내셨는데 군대를 양성하라고 하고 황궁에 돌아올 준비를 하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영 꺼림칙합니다.」
***
길드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거슬렸다. 머리가 아팠다.
‘아, 나 왜 이러냐…….’
하루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교양 수업 때 뭘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파티도 열려면 할 게 많은데.”
그러던 중에 아르까지 찾아왔다.
“나중에 다시 와.”
심란함의 끝을 달리는 와중에 저 얼굴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짧습니다.”
“나중에 와.”
“안 올 겁니다.”
고개가 절로 들렸다. 이건 또 뭔 소리?
“왜?”
“그만두겠습니다. 황궁에서 일하면서 있었던 모든 일은 함구하겠습니다. 저도 목숨은 아깝거든요.”
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현실감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싫어!”
“감시하려면 하십시오. 따돌리고 도망치지는 않겠습니다.”
“불허한다. 아직 그대가 할 일이 많아. 그대가 황궁을 나가는 건 내가 황제가 된 이후야. 그때 제대로 된 작위와 영지를…….”
“필요 없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유를 원합니다. 좀…… 쉬고 싶어요.”
그건 절박함이 섞인 눈이었다. 시간의 신전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굵은 말뚝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 같은 이 감정은 죄책감에서 비롯한 것. 하지만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분명 달랐다.
“그런 건…… 절차대로 단장 거쳐서 정식으로 얘기해.”
“단장이 전하께 직접 허락받으라고 해서요. 귀찮답니다.”
“…….”
테이블 위에 은색 황궁 출입증이 달그락 떨어졌다. 푸른 술이 달린 은패에는 황궁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섀도 나이트들이 불시에 그만두고 싶다고 하는 일은 간혹 있다고 했다. 워낙 험한 일이나 더러운 일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간혹 PTSD를 겪기도 한다고 했다. 그럴 때 많이들 그만둔다.
그런 이유로 그만두든 그만두지 않고 잠시 쉬든 감시는 붙는다. 그들이 몰라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1년만 쉬어.”
“1년 후라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그래도 1년 후에 다시 결정해.”
“기회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돌아올 여지도 남기기 싫습니다.”
너무나도 확고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달랐다. 호의를 가장한 강요는 바라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여기서 솔직하지 못하면 그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내가 시간이 필요하니까 1년만 쉬어 줘. 너한테 주는 기회가 아니야.”
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왔고, 뭐든 내가 하자는 대로 그가 따라왔다. 그래서 더욱 내 마음대로 했다.
그가 내게 ‘요구’는커녕 ‘자기주장’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조차 내게 내비칠 수 없는 입장도 배려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건 내가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올려 볼 기회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서 내 앞에 선 그를 바라보았다. 목멘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이에 힘을 주었다.
“너 말고 나한테 기회를 줘.”
그가 만약 시간을 되돌려 놓고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분명 혼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내게 되돌아왔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곁에서 묵묵하게 그리고 또다시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같은 시간을 달려왔고 달려갈 동반자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자신의 의지로 돌렸으나 거기까지였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에서 그가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은 거의 없었다.
내가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한참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기회요?”
“내가 경의 마음을 돌릴 기회.”
***
몰딘에서 제론 자작의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곧바로 레이하임을 불렀다.
“태후가 볼테르에게 수상한 편지를 보냈다더군.”
“무슨 편지요?”
“역모?”
“아…… 예?”
내가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이야기하자 레이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되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라파트니 대공에게 그대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약속한 것이 좀 있거든.”
“라파트니 공국으로 가야 합니까?”
레이하임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기는 했지만 꺼리는 마음을 참아 내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혹시 요즘도 그때의 후유증이 심한 거라면…….”
“아,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재활치료는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옛날만큼 완벽하진 않지만요.”
“나도 경에게 더는 완벽한 은신이 필요한 일이나 위험한 첩보를 시키지 않을 거야. 라파트니 대공성을 잠입했었던 것만으로도 그대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비록 내가 직접 들어갔다 오라고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 명령 아닌 명령 때문에 그가 위험했던 건 사실이었다.
나는 레이하임 앞에 편지를 한 통 내밀었다. 라파트니 대공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걸 라파트니 대공에게 전해 줘. 대공한테는 몇 년 전에 봤던 그 햄스터를 귀여워하시는 것 같아서 보내겠다고 했더니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거든. 그러니 이번에는 안전할 거야.”
“알겠습니다. 아…… 햄스터…….”
레이하임이 편지를 잘 받아 품에 넣었다. 그러면서 웃는 듯 우는 듯 어중간한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이거?”
“몰라도 돼. 라파트니 대공한테 물어봐. 대공이 그대에게 말해 주는 걸 말리지는 않을 테니.”
“……그냥 안 알려 주겠다고 하십시오.”
그가 구시렁거리며 편지를 챙겼다.
어느 날부턴가 섀도 나이트들은 나를 굉장히 편하게 대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마치 새로운 단장이 된 밀렌을 닮아 가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편했다.
“아마 경이 이 편지를 대공에게 전하면 대공이 다른 일을 하나 더 시키게 될 거야. 그가 다음 일을 시키거든 그것까지 마무리하고 와. 가는 길에 제론 자작에게 이것도 은밀히 전해 주고.”
나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하얀 편지 봉투를 레이하임에게 건네었다.
아까보다 더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편지 봉투를 레이하임이 이번에는 다른 질문 없이 받았다.
“알겠습니다.”
대공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촌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 대공의 사촌이라는 자는 아르가 기억하는 시간에서는 반역을 일으켰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시간 축에서는 그게 누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대공 측에서 일찌감치 눈치채고 처리했던 듯하다.
‘볼테르를 종용해서 그와 손을 잡게 해야겠어. 대공의 도움을 받아서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게.’
볼테르의 친부가 누구인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공국의 고위 귀족이 연관되어 있다면 내가 어떻게 하기 힘들다. 만약 그게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대공이라면 더더욱. 분하지만 볼테르의 목을 쳐서 후환을 없애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묻어 두어야 한다.
“그런데 전하.”
갑자기 들려온 레이하임의 부름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볼테르 전하의 친부를 찾고 계셨던 것 말입니다. 그거 라파트니 대공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대공과 손을 잡으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