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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15화 (115/148)

115화

에오넬이 이렇게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는 이유는 섀도 나이트가 어디까지나 아멜리아의 휘하에 있기 때문이다.

레이하임이 전 황제에게 명령받은 건 에오넬에게 보고를 하는 것까지였다. 그러므로 에오넬에게는 그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황제의 정식 황명이라면 모를까.

물론 레이하임은 에오넬이 하는 말이 명령이든 부탁이든 들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몹시 합리적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좋은 아군이자 황제이므로.

“말씀하십시오, 폐하.”

“자네는 아바마마가 어디 계신지 알고 있지? 아바마마께 편지 좀 전해 줘.”

상황은 공식적으로 황실 소유의 어느 별장에 머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키옌 태후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여행을 핑계로 키옌을 황궁에서 끌고 나오려고 했을 때만 해도 황제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오넬은 사실 상황이 황실 소유의 어느 별장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를 뿐.

그리고 몰라도 상관없다. 상황이 어디 계시든지 안전하기만 하다면 장소 따윈 별로 중요치 않다.

에오넬은 서랍에서 편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레이하임 쪽으로 쓱 밀었다. 레이하임은 그것을 들어 그대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찾아보겠습니다.”

말은 찾겠다고 했지만 사실 어디 있는지 섀도 나이트는 알고 있을 거다. 그들 중 몇몇이 상황을 호위하고 있을 테니까. 레이하임이 모르더라도 상황을 호위하고 있는 이에게 짬을 내서 전해 달라는 부탁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에오넬은 이어서 그 옆 서랍에서 다른 편지 봉투를 꺼냈다.

“이걸 볼테르에게 전해.”

다홍빛 봉투에 은빛 실링 왁스, 그리고 그 위에는 익숙한 실링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모두 키옌 태후가 즐겨 쓰는 것들이었다. 누가 보아도 키옌의 것이 확실했다.

레이하임은 별말 없이 그것도 조용히 들어서 챙겼다. 봉투 안에서는 희미하게 약품 냄새가 났다. 아마 황후의 진짜 편지를 중간에 빼돌려서 약품으로 일부 내용을 지우고 조작했을 거다. 그건 꽤 흔한 수법이었다.

아주 부분부분 단어만 바꾸면 필적이 살아 있어서 읽는 사람이 눈치채기 힘들다.

“자네가 직접 몰딘으로 가서 볼테르가 읽을 편지들 사이에 조용히 끼워 놔. 무슨 뜻인지 알지?”

***

아멜리아의 예법 수업이 있는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공작 부인의 마차에서 리엘라도 함께 내렸다. 프리체 백작저로 돌아가지 않고 어쩐 일인지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로이드는 창문을 바라보다 그 광경을 보고는 밖으로 후다닥 튀어 나갔다.

“어머니, 다녀오셨어요? 리엘라도 어서 와!”

공작 부인이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로이드와 리엘라는 정원의 볕 좋은 곳에 앉아서 잡담했다.

“오빠, 요즘 바빠?”

“내가 바쁠 일이 뭐가 있겠냐?”

“조만간 황녀 전하께서 파티를 열고 싶다고 하셨는데 좀 도와줄래?”

“네가 도와줘. 예동이 괜히 예동이냐?”

로이드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젓자 리엘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도 약혼자냐?”

“다른 파티에 가서 좀 배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체리에 후작가에서 민티아가 주최하는 파티를 다녀왔었어.”

“그래서 다녀왔던 거구나? 갔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로이드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다. 아멜리아가 이니셜을 수놓았던 손수건이었다.

“오빠, 그거 엎드려 절 받은 건 알아?”

“왜?”

“전하는 수놓은 거 기념으로 그냥 소장하고 싶어했는데 민티아가 오지랖 떨었어. 손수건은 약혼자에게 선물하는 게 무난하다나 뭐라나 하면서. 감히 전하께 눈치를 주다니.”

로이드는 수건을 두 손을 펼쳐 이리저리 흔들면서 이니셜이 수놓인 부분을 쳐다보았다. 엉성한 바느질 흔적이 엿보인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사실 아멜리아가 좋아하는 것은 수공예품을 만드는 것보다 만들어진 수공예품을 사는 것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보다 황궁 교향악단의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녀는 교양 수업으로 유명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칭찬을 들을 때보다 유명 화가의 작품을 경매로 낙찰받는 것에 성공했을 더 큰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더 웃긴 건 편지 봉투에 실링 왁스를 찍는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정작 편지를 쓰는 건 힘들어한다는 거다.

승마를 배우는 것도 사실 승마가 재미있어 보인다거나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건 핑계인 것 같았다. 그녀의 목적은 ‘아르’였다. 뜬금없이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고.

“사교계는 황제라도 눈치를 보게 되는 곳이야. 전하처럼 뭐든 맘대로 생활하시던 분이 사람들 눈치 보면서 바느질하느라 고역이셨겠어.”

로이드는 손수건을 곱게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리엘라는 로이드가 손수건을 넣은 주머니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랑 전하는…… 뭐랄까? 쇼윈도 약혼 같다고 해야 하나? 대체 둘이 왜 이러는 거야?”

“뭔 쇼윈도야? 약혼도 아직 안 했거든!”

“바로 그런 반응 때문에 쇼윈도 같다는 거야. 나나 오빠들한테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남들 보는 곳에서는 주기적으로 데이트도 한다면서. 어차피 상황 폐하께서는 오빠를 전하의 배필로 완전히 점 찍어 놓으셨잖아. 그럼 약혼식만 아직 안 한 거지, 약혼한 거나 다름없잖아. 오빠가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전하의 정적들이 사교계에 엉뚱한 소문을 내려는 거야!”

리엘라가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몸을 반쯤 일으킨 사촌 동생의 행동에 로이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내뺐다.

“진정해.”

“오빠가 그걸 봤어야 해! 민티아가 전하께 란슈아 백작 영애의 생일 선물로 블루문에서 나온 루비 목걸이 선물했다는 거 아냐면서 전하는 더 근사한 것을 받았을 텐데 궁금하다면서 전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그렇게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막상 실속은 있는 거냐며 돌려 깐 거라니까?”

“그런 정도야 사교계에서 영애들이 약혼자 이용해서 남 신경 긁을 때 자주 써먹는 방법이긴 하지.”

“그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역시 로이 오빠는 눈치가 빨라서 내 말 알아먹을 줄 알았어. 내가 이 얘기 했더니 엘비 오빠는 뭐라고 했었는지 알아? 블루문의 루비 목걸이보다 더 근사한 게 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겠냐는 멍청…… 아니, 어이없는 소리나 해대는데 얼마나 답답했다고!”

로이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꽤 흥분한 듯 리엘라는 말 한 번에 화제가 몇 번씩 바뀌었다. 눈치가 빠르다는 칭찬인 걸까, 아니면 엘비 형의 욕인 걸까? 아니면 민티아한테 화가 난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그보다 쇼윈도 약혼 얘기는 궁금했던 걸까?

“어쨌든 그 일은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전하께서는 그런 흔해 빠진 장난에 놀아나실 분이 아니야. 어차피 황제가 되시면 지금의 황제 폐하처럼 사교계에서 자연스레 멀어지실 거고, 그건 국서의 몫이 될 테니까.”

“그래도 당장 당황하시거나 상처받으실까 봐 걱정은 돼.”

리엘라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작게 웅얼거렸다. 로이드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네가 함께 있어서 다행이야. 그보다 넌 정말 남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어쨌든 그 루비 목걸이를 란슈아 백작 영애에게 선물한 건 맞는데, 그게 내가 보낸 건가? 난 들고만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거 내 돈 아니야. 우리 가문의 대외 친목비 예산으로 집사가 구매한 거지.”

“내 말이! 자기들은 누구 생일 파티 가면서 죄다 자기 품위 유지비로 선물해 줬나? 뭘 선물할지 고르는 것까지는 다들 해도…….”

“난 그거 고르지도 않았어. 블루문에 사람을 보내서 란슈아 백작 영애의 취향에 맞춘 카탈로그 받아서 그거 보고 전하께서 몇 가지 대강 골라 준 거야. 그것도 전하께서 골라 준 세 가지 중에서 집사가 예산 맞춰서 구매한 거고.”

“알아. 전하께서도 자신이 고르셨다는 말씀은 하셨어. 난 그보다 걔가 오빠를 완전 바람둥이처럼 몰아가려 했다는 게 더 화가 난다는 거야. 오빠가 성격이 워낙 사교적이고 친절하니까 별 시답잖은 소문이 다 나잖아!”

“그래서 화났어?”

로이드가 생글생글 웃자 리엘라는 로이드를 쳐다보고는 속도 좋다며 혀를 찼다. 정작 당사자가 아무렇지도 않아하니 앞에서 자꾸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꾹 참았다.

“전하께서 자수회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화가 좀 나셨던 것 같아. 물론 오빠한테 말고 민티아한테. 오빠를 의심하신 건 아니니까 그건 진짜 오해하지 마!”

“안 해. 그런 거.”

어차피 리엘라 말대로 쇼윈도 약혼이었다. 오해하고 질투하고 그럴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도 사교계발 카더라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는 건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민티아는 남들이 물어뜯고 싶어할 그런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 때문에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영애도 많았다. 그런 식으로 정적들의 명예를 박살 내곤 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파혼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교활한 적은 정말로 골치가 아프다. 게다가 그런 적은 정공법으로는 이기기도 힘들다.

‘조만간 전하께는 파혼 구실도 만들어 드리겠다고 했는데 자칫하다간 민티아에게 이용당할지도 모르겠는걸.’

로이드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이렇게 된 거 타깃을 그쪽으로 정해야겠다.’

여태 뜬소문 만들어서 가문의 적들을 제거해 왔던 그녀가 똑같은 짓을 당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도 교활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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