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악!”
로이드가 뒤통수를 감싸 쥐고 씩씩거리며 엘비어스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어쨌든 귀족들 혼인 시장이 그렇단다. 차남과 삼남이 가지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해. 당장의 후계권과 재산 상속권뿐만 아니라 후에 분가가 되고 세대교체가 되었을 때 가문에 대한 영향력까지 달라지니까.”
“뭔 소리야?”
“너희 둘 세대에서는 달라질 거 없어. 그 이후 자손들의 지위가 문제인 거지. 서로가 상대의 가문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규모가 달라지거든.”
로이드가 여전히 인상을 찡그렸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게. 당장 우리 가문에서 영향력을 보자. 당장 크로이젠 공작가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고 정치적인 위치가 공작 부인인 우리 어머니의 영향력이 더 큰 것 같으냐, 아니면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의 영향력이 더 큰 것 같으냐?”
“당연히 우리 어머니지.”
“그럼 작은어머니 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분은?”
“첫째 작은어머니…….”
“할아버님이 첫째 작은아버지와 둘째 작은아버지를 분가시키면서 나누어 준 영지와 광산의 현재 부동산 가치의 차이는?”
로이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엘비어스는 이상하게 보여도 세상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거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체리에 후작가에서 보낸 혼담은 어째서 무산된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크로이젠 공작가는 황실과 사돈을 맺기에는 영 소원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남이자 후계자인 엘비어스 크로이젠은 아멜리아 황태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약혼녀가 내정되어 있었다.
황실이 미치지 않고서야 황태자의 장녀를, 제1황녀인 아멜리아 황태손을 분가로 떨어져 나갈 차남과 약혼시킬 리 없었다.
황태자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약혼자는 프란츠 공작의 장손이 될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크로이젠이 체리에에서 들어온 혼담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 약혼, 하자고 했지. 그런데 그렇게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거든. 그리고 폐하께서 에오넬 황녀 전하를 황제로 만들고 싶다고 할아버지께 동맹을 제안했다고 하셨어. 체리에 후작가의 사돈이냐, 아니면 제국의 국서냐.”
말할 것도 없었다. 에오넬이 무사히 황제가 되어 여황의 선례만 남겨 준다면 아멜리아는 자동으로 다음 황제가 된다.
이건 체리에의 장녀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잘만 한다면 크로이젠은 제국 최초의 국서를 배출한 가문이 된다. 그건 평범한 황후의 자리보다 더 탐나는 자리였다.
그 어떤 귀족이라도 황실의 이런 제안이라면 이미 약혼식을 했다고 해도 명예고 뭐고 간에 다 팽개친 채 파혼하고 황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다. 하물며 구두로 말만 오가고 조건을 조율하는 중일 뿐인 혼담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폐하께서는 차남을 원하셨어. 프란츠 공작에게 후계자인 장손을 내놓으라 할 수 없고 그쪽에 둘째가 없으니 이쪽으로 혼담이 차례가 온 거지. 로이드가 있으니까.”
“거기 후작님 성격에 가만히 있었대? 상대가 황실이라 어쩔 수 없었나?”
“문제가 그거야. 체리에 후작가에서 삼남이라도 좋으니 계속 혼담을 진행하자고 우겼다는 거.”
“아니, 대체 왜……? 우리한테 꿀 발라 놨대?”
로이드가 강하게 거부감을 표출했다. 그건 아르도 마찬가지였다.
민티아는 자그마치 황후의 친정인 후작가의 장녀다. 그런 그녀의 혼담 상대로는 공작가의 삼남보다 차라리 힘 있는 백작가의 후계자가 나았을 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는 대충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황태자 전하의 사고에 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황제 폐하의 편을 들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겠지. 크로이젠이 사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니까.”
“맞아. 폐하께서는 제국의 1급 기밀들을 향후 20년간 무작위로 알려 줄 테니 체리에 후작이 알테어를 더는 넘보지 못하도록 넘기라고 하셨어.”
엘비어스는 할아버지의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을 더듬듯 떠올리며 말했다. 전 공작이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서재에서 발견한 편지의 내용이었다.
***
“알테어 폰 크로이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정보 길드의 담당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조금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럼 아까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신 건 로이드 이야기인가요, 알테어 이야기인가요?”
“내게 필요한 건 크로이젠이야.”
“권력 있는 아군은 필요하면서 허수아비 국서를 원하시는 겁니까? 엄청 어려운 거네요.”
“그거 두 번째 질문이야?”
내 물음에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해 보더니 이내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그럼 그냥 다른 질문을 하도록 하죠. 두 번째, 왜 섀도 나이트를 시키지 않고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건가요?”
시키지 않은 게 아니다. 시켰지만 마음에 드는 결과가 없었을 뿐이지.
“내가 직접 뒷조사를 하고 싶지 않아. 크로이젠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싶지도 않아. 섀도 나이트를 직접 움직였다 걸리면 서로 영 찝찝하지 않겠어?”
무엇보다 다른 섀도 나이트를 움직이는 것이 어쩐지 아르를 기만하는 것만 같기도 했다.
그것 말고도 뭐랄까? 온전한 제삼자, 객관적으로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이에게 일을 맡기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마지막 질문을 했다.
“세 번째. 꼭 저에게 정보를 사야 했어요?”
“무슨 뜻이야?”
“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
붉은 노을이 방 안에 길게 들이쳤다. 에오넬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때 서재 쪽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상황이, 아바마마가 떠넘기고 간 일. 섀도 나이트와 관련한 일이었다.
상황이 황제였던 시절, 섀도 나이트를 아멜리아에게 물려주기는 했지만 아멜리아에게 완전히 맡겨 버린 것도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그런 것을 제대로 맡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그래서 상황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레이하임에게 황후에 대한 것이나 전 황태자에 대한 것을 조사하거든 에오넬에게 알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레이하임에게는 지금 아멜리아의 명령보다는 그때 받은 황명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레이하임은 아직도 주기적으로 에오넬을 찾아오고 있었다.
“들어와.”
에오넬이 허락하자 레이하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짧게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반역의 낌새는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에오넬은 입술을 삐죽였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고도 황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면 불안해서 잠은 오나?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한 방에 뿌리 뽑아 버릴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기엔 나도 위험하고 멜리도 위험해.’
아멜리아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정식으로 황태녀 책봉을 하지 못했다. 이 상태로 어느 날 갑자기 에오넬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황위는 볼테르 차지가 된다. 그리고 그가 황위를 차지하면 키옌 태후가 아멜리아를 가만히 둘 리도 없다.
“그냥 반역으로 보내 버리자.”
“예?”
레이하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멜리가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엔 내가 참을성이 많이 부족해서. 어차피 그쪽에서 내게 오라버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려는데 나라고 정직하게 싸워야 할까.”
에오넬이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누명을 쓴 것보다는 그런 모함을 당하고도 정직하게 상대하는 것이 더 억울했다.
‘자기들도 당해 보라지.’
볼테르만 없어도 황제로 추대할 구심점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와해될 거다. 볼테르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도, 키옌 태후의 과거 불륜의 증거만 잡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전 황제가 원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다. 단순히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의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그것이 최선이다. 누군가의 목을 쳐내고 여러 귀족 가문들을 풍비박산 낸다면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경제와 사회와 정치가 줄줄이 붕괴될 거다.
그러면 문제는 그렇게 파탄 난 제국의 상황을 복구할 때까지 적어도 아멜리아의 세대까지는 힘들어진다는 거다. 그건 에오넬도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복구고 뭐고 일단 체리에 후작가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거야. 그걸로 제국이 힘들어지면 어떻게든 죽기 전까지 복구하려 노력할 거다. 그렇게 어지러워진 세상에서 제국민들이 그녀를 폭군이라 욕하든 저주하든 상관없다.
아멜리아까지 고생하게 될 것도 감수할 거다. 적어도 아멜리아는 욕은 먹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 전에는 평화를 찾겠지.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아멜리아를 폭군인 에오넬에 대비되어 더욱더 성군이라 칭송할 거다.
‘어차피 그거 아니더라도 황제는 힘든 일 많아.’
그녀의 아바마마는 아멜리아를 항상 어린애 취급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어린애인 건 맞다. 그렇다고 서른 넘어서까지 어린애 취급 해줄 작정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아바마마라면 그러고도 남겠지만.
‘어른 되면 싫어도 다 견딜 수밖에 없어. 견디고 살게 되어 있고.’
고모는 조카를 독하게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일단은 볼테르한테 반역을 뒤집어씌우고 나면, 멜리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어디 안전한 곳에 숨겨 놓아야지. 그리고 멜리가 모르는 사이에 볼테르고 체리에고 다 잡아다가 목을 쳐버리는 거야.’
에오넬이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레이하임은 미묘하게 변해 가는 그녀의 표정을 힐끔힐끔 관찰했다. 폐하께서는 책상에 포개어 놓은 손끝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무언가에 심각하게 집중하는 중이었다. 레이하임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설마 폐하께서 물러나라는 말씀을 잊어버리신 건 아닐까?’
“저…… 폐하?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 순간 에오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잠깐만. 자네에게 부탁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