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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13화 (113/148)

113화

시간의 신의 신전에서 소개해 준 사람은 신관은 아니었다.

베이지색 로브를 쓰고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얼굴은커녕 성별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목소리만으로 여자구나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황도로 데려와 황립 아카데미의 교수에게 소개해 주고 혼자 살기 적당한 작은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누군지를 모른다는 것. 신원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신전에서 소개해 주었으니 믿고 데려오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아카데미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황궁 근처에 있는 개발 제한구역, 한적한 곳에 마차를 세우고 내렸다.

“갈 곳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 호위는 한 명이면 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앞으로 갈 행선지를 숨기고 내가 외출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온 시간을 외부에(정확히는 키옌 황태후에게) 숨기기 위해서다.

오는 동안 마차에서 이미 옷을 갈아입었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모자에는 얼굴을 가리도록 늘어지는 망사가 달려 있었다.

동행할 호위기사에게도 황실 기사 제복 대신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호위대장에게만 행선지와 환궁 시간을 알렸다.

그렇게 향한 곳은 로크스 거리였다. 황도에서 가장 화려한 술집 거리는 대낮이라 그런지 로즈벨리아보다 한산했다.

따라오던 호위기사가 나직하게 물었다.

“전하, 이 방향이면…… 혹시 정보 길드 가십니까?”

“응.”

섀도 나이트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정보 길드에는 다른 볼일도 있었다. 섀도 나이트와 자주 거래하는 곳이었는데 위치나 VIP실에 들어가는 방법은 알고 있었어도 직접 온 건 처음이었다.

호위기사는 골목 밖에 대기시키고 안으로 들어서서 VIP실로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담당자가 나왔다.

“어? ‘거기’에 여자도 있던가?”

섀도 나이트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그가 내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을 때 나는 모자를 벗어 소파 옆으로 내려놓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망사가 모자와 함께 벗겨졌다. 동시에 둘둘 말아 올려 모자 안에 숨겨 두었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쏟아졌다.

“어?”

VIP 담당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섀도 나이트 중 한 명일 줄 알았는데 황녀 전하께서 직접 오셨군요. 무슨 일이시죠?”

그가 월척이라도 건진 것처럼 히죽 웃었다.

“시간의 신전에 몸을 의탁했던 여자가 있어. 마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신전에서 받아 주었다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어. 되도록 과거 행적에 대해서 알고 싶어. 얼마면 되지?”

“그런 정도 정보라면…….”

그가 잠시 주판알을 튕기다가 가격을 제시했다. 황족이나 귀족 뒷조사도 아닌데 생각보다 정보 가격이 비쌌다.

“가격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표정 같은데, 신전이 얽혀 있는 정보는 상당히 비싼 정보라고요.”

“정보는 조만간 사람을 보낼 테니 그쪽으로 넘겨. 정보값은 그때 넘기겠어. 그리고 그 정보는 5년간 독점하도록 하지.”

정보를 얻는 것도 제법 돈이 들어가지만 정말 비싼 건 따로 있었다. 정보를 독점하는 것. 길드가 그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재판매할 수 없도록 일정 기간 묶어 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보 독점 추가금까지 흥정을 마치고 나서 나는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을 꺼내 놓았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막내 도련님에 대한 정보는 얼마나 하지?”

***

하다 하다 이젠 계보에서 지워 버리라니, 엘비어스와 로이드는 동시에 얼이 빠져서는 아르를 쳐다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로이드가 외쳤다.

“야, 너 미쳤어? 너 지금 내가 뭐 때문에 황녀 전하랑 파혼하겠다고……! 아니, 아직 약혼 안 했으니 파혼은 아니지만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서 그래? 그보다 너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알아.”

아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놀란 건 엘비어스였다. 엘비어스의 시선이 로이드 쪽으로 돌아갔다.

“너 다시 말해 봐. 전하랑 파혼한다고? 너도 미쳤어?”

“3년 전에 난 형한테 말했어! 약혼 안 할 거라고.”

“너 그거 아직도 현재진행이야?”

확실히 그런 적이 있긴 했다. 로이드가 어쩐 이유에서인지 아멜리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혼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아르에게 설득 좀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엘비어스는 골치가 아팠다.

전 공작인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로이드를 황녀와 짝지어 주려 했고, 무슨 생각으로 아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엘비어스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르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님과 함께 이야기해 보겠어.”

“아까 말씀드렸어.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던데. 상황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릴 거고. 그리고…….”

“할아버님께는 아직 말씀 못 드렸다는 뜻이군.”

엘비어스가 길게 숨을 내쉬자 아르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협상 좀 대신해 달라고 했잖아.”

엘비어스는 그래도 예의상 말씀은 드려야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게.”

이런 답도 안 나올 이야기는 솔직히 짜증 났다. 어차피 그가 공작 작위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지 않는 이상 권력은 크로이젠 공작인 아버지에게 있다. 이들이 여기서 백날 떠들어 봐야 그가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엘비어스는 옷 주머니에서 손가락보다 조금 굵고 긴 은색 막대를 하나 꺼내 아르에게 내밀었다.

“하아, 다 모르겠고. 일단 이거나 받아라. 신혼여행 다녀오는 길에 사달라며.”

“어? 진짜 사 왔네.”

“그럼 가짜로 사 왔겠냐?”

실링 왁스였다.

***

“공작가의 막내 도련님이라면 로이드 크로이젠 님? 설마 약혼식 직전에 약혼자 뒷조사 뭐 이런 겁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거 의뢰하는 귀족 아가씨들은 전하 말고도 많습니다.”

정보 길드의 VIP 담당자가 말했다.

떠보는 걸까? 아니면 이쪽도 모르는 걸까?

하지만 이내 모른다는 가정은 접어 버렸다. 모를 리가 없다.

어렸을 때는 그가 어머니인 공작 부인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니며 친구를 사귀었을 정도였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공작 부인이 배불러서 다니기는 했을 것이 아닌가. 다만 다들 그가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공작가에서 장례를 치른 것도 아니니 죽지는 않았고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다 하며 쉬쉬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태어날 무렵 이미 귀족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그를 내가 모를 수는 있을지언정, 정보 길드는 모를 수가 없다. 죽었든 살았든 막내 공자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있을 터였다.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정보값은?”

정보의 가격이 얼마인가에 따라서 이게 로이드처럼 드러나는 인물에 대한 정보인지 알테어 크로이젠에 대한 정보일지 추측이 가능하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격 대신 다른 것을 제시했다.

“정보값은 돈 대신 다른 걸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정보와 교환하도록 하죠.”

“내게 원하는 정보가 있나?”

아니, 그보다 공작가에서 작정하고 숨기는 정보를 내주는 대신 돈 말고 다른 걸 달라니 그게 이들에게 남는 장사인가 싶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조금 이해는 될 것 같았다.

황녀에 대한 정보는 사소한 것이라도 값나가는 정보일 테니까.

나는 원하는 정보를 말해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그런데 이들이 모르는 내 은밀한 정보 중 내가 내 입으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살짝 걱정되려는 찰나에 그가 말했다.

“세 가지 질문에 순서대로 답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중간에 답변을 거부하셔도 되는데 그만큼 정보의 질은 떨어질 겁니다.”

“얼마나 자세히 대답해야 해?”

“얻고 싶은 정보의 질만큼 자세하게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대답이었다.

“그럼 첫 번째 질문. 이런 의뢰를 하는 이유는?”

“로이드와 파혼할 거야. 그대가 내게 주는 정보에 따라서 공작가와 혼담은 진행할 수도 있고.”

“너무 애매한 대답이네요.”

이들이 내게 넘겨주려는 정보가 로이드인지 알테어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너무 많은 정보를 넘기면 손해가 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질 낮은 정보를 얻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 맞아? 황궁의 도서관에는 제국 귀족 계보가 있어. 황족은 그것을 열람할 수 있고. 내가 쉽게 얻어 낼 수 있는 정보였다면 여기 와서 이렇게 요구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고 곧 그 담당자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테어 폰 크로이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

엘비어스가 화제를 돌리려고 실링 왁스를 내밀었지만 아르는 주제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난 세 살 때 일 기억나. 4층 서재에서.”

그곳은 지금은 엘비어스가 서재로 쓰고 있으나 그때는 전 공작의 서재였다. 로이드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할아버지랑 뭔 일 있었어?”

“우리 셋 다 있었는데.”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기억 안 나. 그래서 거기서 뭘 했는데?”

“체리에 후작가에서 청혼서가 왔었어.”

로이드가 처음 듣는 일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엘비어스가 확인사살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왔었지.”

엘비어스의 말에 로이드가 엘비어스와 아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나한테?”

“그럼 장남만 약혼녀가 있는데 차남한테 왔겠지, 건너뛰고 삼남한테 왔겠냐? 그것도 후작가 장녀 혼담을 체면이 있는데 직계 황족이 아닌 이상 셋째한텐 절대로 안 보내지.”

로이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후계자 빼면 나머지 차남 삼남 이게 뭔 차이가 있다고 뭐 그렇게 유난인지 몰라.”

“후계권에서 얼마나 멀어지느냐의 차이지.”

“그거 장남이 고자일 때나 의미 있는 거 아니야? 쳇!”

로이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비어스의 주먹이 로이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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