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11. 모두가 원하는 것
크로이젠 공작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후원 한가운데 있는 공작 부인의 온실. 그곳에는 1년 365일 장미가 피어 있다. 그러나 정작 온실의 주인인 공작 부인보다 그 아들들이 더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장미뿐 아니라 곳곳에 나무까지 우거져 있는 온실은 밖에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온실 내부는 평평하고 좁은 돌길을 제외하고는 온통 나무와 풀과 꽃이 뒤덮여 마치 깊은 숲속 같았다.
온실의 한가운데 있는 티테이블에 앉아 엘비어스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떫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이드가 엘비어스의 홍차를 뺏어가 한입 마셨다. 집사가 내리는 홍차만 못하지만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냥 주는 대로 먹어.”
두 형제가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소리 사이로 슬며시 사람 발소리가 섞였다. 새벽에 정원사가 들어오는 것 이외에는 시종이나 사용인들이 공작 부인의 후원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엘비어스와 로이드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어머니인가?”
“어머니는 형수님이랑 쇼핑 갔는데.”
“그럼 그 녀석이겠지.”
곧 나무 뒤에서 그 녀석, 아르가 쓱 걸어 나왔다. 공작 부인의 온실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지만 몰래 들어오는 녀석.
“역시 둘 다 여기 있었네.”
“넌 대체 여기 경비를 어떻게 뚫고 들어오는 거냐?”
저택의 경비병들이 본다면 온실 밖으로 쫓아낼 테니 재주껏 숨어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은신에는 자신 있었다.
“밥 벌어먹고 하는 일이 그건데 잘해야지, 그럼. 나 할 말 있어서 왔어.”
오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려는 아르를 로이드가 살살 달래서 테이블에 앉혔다.
“그런 건 좀 이따가 말하고 마침 잘 왔다. 앉아.”
그러고는 엘비어스 앞에 놓인 홍차를 끌어다 아르 앞에다 놓았다. 엘비어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내 거야!”
“떫다며, 먹지 마.”
“아까는 맛없어도 그냥 주는 대로 먹으라며!”
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큰 성인들이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아르는 엘비어스의 찻잔을 들어 향을 한번 맡고는 화원 바닥에 쏟아 버렸다.
로이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울어진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야! 이걸 왜 버려?”
“떫으면 다시 내려 마셔.”
“네가 내려.”
공작 부인의 아름다운 후원의 비밀스러운 온실에서는 격의 없는 대화와 행동이 오갔다. 공작 부인이 보았다면 셋 다 교양 없이 이게 무슨 짓들이냐며 등짝을 흠씬 두들겨 맞았으리라.
아르가 홍차를 다시 내리고 나서야 제대로 대화할 분위기가 잡혔다.
아르가 엘비어스 앞에 홍찻잔을 내밀자 엘비어스가 말했다.
“할아버님이 너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물으시더라.”
“내가 알아서 해. 각하께는 이제 와서 나 생각해 주는 척하지 말라고 전해 드려.”
그러자 엘비어스는 찻잔을 내려놓던 아르의 앞머리를 쭉 잡아당기고는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쪼그만 게,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아르가 찻잔을 놓아두고 제자리로 돌아가자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이해해. 할아버지도 이해하고, 아르도 이해해.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께서 일방적으로 잘못하신 게 맞잖아. 그건 다들 동의하는 거 아니었어?”
엘비어스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오래전 할아버님께 물려받은 서재에서 발견했던 편지 한 통이 떠올랐다. 우연히 발견한 종이를 펼쳐서 읽고 나서야 황제와 공작이 주고받은 편지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편지는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그때 황제에게 기존에 없던 여성 황제의 전례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그것도 황태자가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다른 황자까지 있는 상황에서.
황제에겐 그래서 크로이젠이 필요했다. 유례없던 일에 힘을 보태는 대가로 황제는 크로이젠에 국서의 자리와 더불어 황제가 가진 숨은 권력, 섀도 나이트의 비밀도 약속했다.
‘할아버님께는 황실의 사돈 자리보다 어쩌면 섀도 나이트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게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네.’
잘만 이용하면 황제의 약점을 쥘 수도 있을 테니까.
엘비어스는 아르를 쳐다보며 티가 나지 않게 혀를 한번 차고는 물었다.
“넌 할아버님 안 뵐 거였으면 대체 왜 영지에 남아 있었던 거야? 그것도 내가 신혼여행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황도로 돌아오지 않다니. 난 네가 당연히 황도에 있는 줄 알았어. 안 보이길래 황궁 그 볕도 안 든다는 기숙사에서 안 나오는 줄 알았지. 바쁜가 했다.”
“개인적인 일이야.”
로이드가 유심히 그런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흐응.” 하고는 콧소리를 냈다.
“개인적인 일 아닌 것 같은데에에. 전하의 일 아니야?”
“……아니야.”
엘비어스가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전하가 뭐 시키디?”
시키긴 했다. 그래서 한다고 대답해 놓고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할지 고민만 했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닥쳐! 이중 스파이.”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었어.”
“생각할 거 뭐?”
“아, 형! 좀 적당히 캐물어.”
로이드가 눈치도 없냐며 그만 물어보라고 제 형을 말렸으나 엘비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집요하게 물었다.
“말할 생각이 아예 없었으면 처음부터 별일 아니라고 했겠지. 아니면 몰라도 되는 일이라고 잘라 냈거나. 지금처럼 생각할 게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사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도 말해야지 하고 이 온실까지 찾아왔으면서 요 잠깐 사이에 마음은 수십 번은 바뀌었다.
엘비어스의 재촉에 아르는 결국 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만두려고.”
그 순간 찻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달그락!
로이드가 마시던 홍차의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면서 잔이 받침과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불길한 기류가 흘렀다. 로이드가 아주 짧은 적막을 깨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그만둬?”
떨리는 로이드의 목소리 사이로 엘비어스의 숨소리도 비집고 나왔다.
그러나 한번 말문을 튼 아르의 입에서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말이 터져 나왔다.
“다 때려치울래. 약속했던 거나 달라고 전해 드려.”
엘비어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직접 얘기해.”
“아, 형! 얘가 그 얘기 할아버지랑 아버지 얼굴 보고 퍽 직접 얘기할 수 있겠다! 생각해 봐!”
“왜? 어려워? 자신 없어?”
그렇게 묻는 엘비어스의 말에 아르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협상 좀 대신 해줘.”
결국 엘비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까지 원하는데? 계승되지 않는 백작 작위까지 가능할 것 같은데. 승계 가능 한 작위를 원한다면 자작은 어때?”
엘비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이드가 벌떡 일어나며 끼어들었다.
“와, 너무하다! 아버님이 나한테는 내년에 영지 조금 떼어서 자작 작위 준다고 하셨는데!”
“야 인마, 넌 국서가 되면 못해도 대공이지. 그리고 이 형님 얘기하는 데 자꾸 끼어들지 마라.”
아르는 그런 둘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계승되는 백작 작위와 황도에서 멀지 않은 황제 직할령의 일부. 거기까지 내가 보장해 줄 수 있다. 그걸 위한 네 스펙도 내가 쌓아 줄 수 있어.”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필요해서 주는 것이니 받아. 내 검술 예동으로 너를 들일 거고 그러면 훗날 황손의 검술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황족의 스승을 다른 귀족들도 마냥 평민으로 놓아두지는 못할 거야. 황실의 체면이 있으니. 그대에게 받을지 말지 결정하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줄 거니까 받을 준비나 하라고 통보한 거지.”
그건 아멜리아식의 애정 표현이었다.
부와 명예에 완전히 욕심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이겠지만, 그렇게 화려한 걸 원한 건 아니었다. 분에 넘치는 것을 쥐고 있어 보아야 속만 시끄러워질 뿐이다.
그저 안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황녀는 그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쥐여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원하는 걸 주는 것과 별개로 자기가 주고 싶은 것도 전부 받으라고 했다. 그걸 다 받아먹자니 체할 것 같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원하는 것’이라는 게 ‘받을 사람이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주기를 원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황녀다. 거부권은 없었다.
그러나 엘비어스라면 원하는 것을 말했을 때 그대로 협상해 줄 것 같았다. 물론 황녀가 아니라 공작과 협상을 하겠지만.
어쨌든 엘비어스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고 그걸 해줄 이유도 있다.
“원하는 걸 정확하게 얘기해.”
“제대로 된 기사 작위를 원해. 크로이젠 공작령에서 약식으로 서임하고 공작가의 기사로 서류만 처리해 줘. 그런 다음에는 다른 지역으로 갈 거야. 황도에서 멀면 멀수록 좋으니 적당히 야망 없고 인망 좋은 백작 하나 소개해 줘. 기사 추천서 하나만 써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가만히 듣고 있던 엘비어스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각이 안 나온다.
“그건 우리 가문의 체면이 있어서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다음 순간 아르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엘비어스와 로이드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계보에서 파내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