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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11화 (111/148)

111화

해가 막 떠오르던 새벽에 출발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오후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오늘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잡아 놓았던 터라 신전에서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고 보니 대신관이었다.

백발의 대신관이 신전 입구의 계단에 앉아 있다가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지팡이를 붙잡고 일어섰다.

“앗! 이렇게 나와 있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날이 좋아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많이 기다리셨나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덜미가 싸했다. 오늘 오후 즈음 오겠다고 얘기를 해놓긴 했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분이 하는 오래전이라는 이야기가 마치 ‘오늘 아침 일찍’을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더 까마득한 옛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신관님과 함께 간단한 샐러드와 연어 스테이크로 늦은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면담실로 향했다.

“마나를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셨지요?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요? 신관들께서는 활동에 제약이 많아서 괜찮을까요?”

“신관이 아닙니다. 소개해 드릴 수는 있으나 그분이 전하를 따라가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군지 알려만 줄 테니 설득은 나더러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식당에서 면담실로 향하며 신전의 중앙 로비를 지났다. 로비에는 신전에서 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각종 성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은빛 돌고래 모양 단검이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서 그것을 조금 길게 쳐다보자 대신관이 물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간을 되돌리는 성물이군요.”

“오호, 그 성물의 모양을 알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그 성물에 대해서는 존재만 떠돌아다닐 뿐 상세한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신학과 신화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시간의 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좀 있었거든요. 황궁의 도서관에는 질 높은 자료도 많고요.”

그는 자연스럽게 그 성물이 전시된 전시대의 유리관 앞에 멈춰 섰다. 마치 내가 그것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는 마음을 읽은 듯 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살짝 비스듬히.

목덜미에 차가운 환촉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턱밑, 목덜미 어디쯤을 쓸어내렸다. 맥이 뛰었다.

“부디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유리관 속 새파란 보석이 눈알에 박힌 은빛 단검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것보다 훨씬 투박했다. 내 기억 속의 그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은색 날 위로 푸른빛이 흘렀다.

유리관 속 단검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섬세한 세공은 모르는 사람에게 진품이라 말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성스러움은 없었다.

단검 밑에는 레플리카라고 쓰여 있었다. 당연했다.

“모조품이네요.”

어쩐지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걸음을 떼자 대신관은 다시 신전의 왼쪽 복도를 향해 앞장섰다. 그러면서 말했다.

“허허허, 진품을 이런 곳에 내놓겠습니까.”

“어차피 진품도 신전에 없잖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곧 면담실에 들어섰고 문을 닫고 소파에 앉자마자 나이 어린 신관이 허브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물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하얀 비단과 빈 나무상자였다.

보는 순간 역시나 싶었다. 신전에서는 오늘 내가 진품 성물을 들고 올 것을 예상했던 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간의 신의 신전에서 어쩌면 오늘 내가 오는 이유 같은 짧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대신관이 물었다.

“그래서 진품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역시 날 기다린 게 아니라 이거 기다린 것 맞죠?”

나는 돌고래 모양 단검을 꺼내 놓았다. 대신관은 단검을 들어 확인하는 작업도 없이 대번에 답했다.

“진품이 맞네요.”

“어떻게 알아요?”

내가 놀라 묻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해주었다.

“은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이 아닙니다. 은이라면 이런 빛에 반사되었을 때 이렇게 선명한 푸른빛이 돌지 않지요. 반짝하고 빛이 날 수는 있어도 이리 은은하게 물결처럼 빛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건 마나가 흐르면서 나타나는 무늬인데 밀도가 높아서 일반인의 눈에도 보일 정도가 된 것이지요. 이런 금속을 미스릴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금실로 수를 놓은 흰 비단으로 단검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런 다음 비어 있는 편백 상자 안에 넣었다.

그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이 단검이 사용이 이미 된 것인지도 확인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슬쩍 떠보듯 물었다.

“모조품에는 눈알이 있던데요.”

대신관은 상자 뚜껑을 닫아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런 다음 나를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마치 알면서 떠보지 말라는 듯한 분위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있습니다.”

조금 답답해졌다. 가져오면 무언가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제가 이거 가져올 거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주 13신의 신전에는 민간에 공개되지 않은 성서의 내용이 많습니다.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한데 주로 신어의 해독이 덜 되었거나 혹은 예언에 관한 자세한 내용 중 일부가 비공개 처리가 되어있지요.”

“예언편에 제 이야기가 적혀 있던가요?”

대신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방금까지는 그저 늙은이의 감이었습니다. 사실 제 쓸모를 다한 이 미스릴 단검을 보기 전까지 이 성물이 세상에 존재하리라 확신했던 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바닥으로 편백 상자를 쓸어내렸다.

“그 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을 것 아닙니까?”

몇 해 전 대 가뭄 시기에 물의 신의 대신관께서 늙은이의 감이라며 비가 올 날을 예측하셨던 것이 사실은 그가 오랜 세월 물을 연구하며 얻은 과학적 지식에 근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무언가 있을 것 같았다.

조급해졌다.

내가 모르는 두 번째 시간 축에서, 아르만이 알고 있는 그 시간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궁금했다. 대체 지난 시간, 내 삶은 어디서부터 꼬였던 것인지도.

무엇보다 왜 하필이면 내가 되돌아간 때가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돌아가신 이후였는지, 조금 더 빨랐을 수는 없었던 건지까지 모두 다 신이 원망스러웠다.

늙은 신관은 한참 말을 고르다 어깨를 툭 떨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금만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의 신이 약속했던 제국의 멸망 순간에 시간을 되돌릴 두 번의 기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지요. 공개된 예언의 일부입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나도 회귀 후에 황궁 도서관에서 열심히 찾아보았던 내용이었다.

“701년 말 즈음에 성서의 한 부분이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정말 얼마 되지 않았지요. 시간을 되돌리는 성물의 첫 번째 사용에 관한 기록이었습니다. 전하께 보여 드리려고 내용을 좀 베껴 왔습니다.”

그가 돌돌 말린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라기보다는 마치 가느다란 끈을 돌돌 말아 놓은 것 같았다. 그 종이띠를 펴는 사이에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703년에 성물의 두 번째 사용에 관한 기록이 해독되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예언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래 지난 과거형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두 부분이 해독되기 전인 701년까지는 시간을 되돌리는 성물이 제국에 두 번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부분이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게 저를 오랫동안 기다린 것과 무슨 관련이죠?”

“701년과 703년, 두 해를 기점으로 예언이 이미 실행이 되어 과거로 바뀌었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시간의 신전과 크게 교류가 없던 황실에서 갑자기 연락이 오더니 전하께서 마나를 보는 신관을 찾으러 오신다고 해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나머지는 그저 감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아르와 내가 각각 돌아갔던 시간이었다. 신의 조화라는 것이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직접 겪은 일임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뒤로한 채 두 손 위에 다 펼쳐진 종이를 향해 고개를 떨구었다. 끈처럼 가늘고 길쭉한 종이띠 위로 문장 두 개가 가로로 길게 적혀 있었다.

「즉위식조차 치르지 못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임종을 지켰던 충신은 자신의 남은 생명을 바쳐 제국의 시간을 되돌렸다.」

그 순간 목이 메어 왔다.

「즉위식 직전에 제위를 빼앗기고 유배된 황제의 임종을 지키던 마지막 기사는 자신의 기억을 바쳐 황제의 시간을 되돌렸다.」

종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 위로 떨어진 물을 타고 잉크가 번지다 어느 순간 띠의 가운데 마디가 톡, 끊어졌다. 두 손바닥 안에 종이를 모았다.

손가락에 얽힌 종이 끈을 그러쥐자 허리가 동그랗게 앞으로 굽어져 말렸다.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이마가 처박혔다. 허리도 고개도 펼 수가 없었다.

종이 위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말했다. 네가 힘들었던 것보다 그가 희생했던 것이 훨씬 크다고.

마치 내게 역정을 내는 것 같았다. 목이 타들어 가고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그렇게 나는 한참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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