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파란 손수건에 ‘E’를 새기기 시작했다.
글자가 거의 완성될 즈음, 민티아가 물었다.
“로이드 님께 드릴 것이 아닌가 보네요. 누구 드릴 거예요?”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살짝 컸다. 마치 내게만 슬쩍 물어보는 것보다는 다들 귀 기울여서 들어 보라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고모님이요.”
“아…… 황제 폐하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한 개 더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로이드에게 줄 것도 만들어 여기서 보여 주기식 쇼라도 해야 차라리 뒷말도 안 나오고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고모님께 드릴 손수건을 곱게 접고 새로운 천에 ‘R’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이 드디어 잠잠해졌다. 방해가 없으니 이것도 금방 끝났다.
하나 더 할까? 너무 쉬운 걸 고른 걸까. 비록 잘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간단했던 만큼 금방 끝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만큼 더 만들기로 한 나는 새로운 천 위에 ‘A’를 천천히 새겨 나갔다.
***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타 출발하자마자 리엘라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어딜 감히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우리 오빠를 건드려!”
그녀는 자신의 사촌 오빠가 눈앞에서 구설에 휘말릴 뻔했다는 사실이 분한지 씩씩거렸다.
“오빠는요, 개인적으로 장신구 선물은 잘 하지 않아요. 그게 오빠가 준 선물인가? 공작가에서 백작가로 보낸 선물을 오빠가 들고 간 거지!”
“알고 있어요.”
나는 리엘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화나요! 진짜 그 자리에서 머리채를 잡고 싶었는데 얼마나 참은 줄 아세요? 오빠는 그런 틀에 박힌 선물 안 보내요. 상대방이 정말 필요했던 거나 갖고 싶었던 걸 귀신같이 알아내서 선물하지.”
그건 그랬다. 로이드는 어릴 때부터 상당히 섬세한 구석이 있어서 나에게 정말로 개인적인 선물을 할 때는 늘 실링 왁스나 실링 스탬프 같은 것을 주었다. 그런 것들을 수집하는 내 취미를 알고 하는 거였다.
게다가 슬슬 실링 왁스가 많아져서 수집용 유리장이 넘쳐날 때에는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는 잔뜩 밀린 실링 왁스를 써먹을 만한 것을 보냈다. 간결한 카드, 편지로 보내기 좋은 필라그래피였다.
“로이드 님이 상당히 섬세하긴 하죠.”
어느 날 그는 실링 스탬프와 실링 왁스로 꽉 찬 진열장을 보더니 다음에 입궁하면서 내게 필라그래피가 예쁘게 그려진 편지지를 잔뜩 선물해 주었다.
그곳에는 화려한 색감과 유려한 글씨체로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 말고도 몇 장은 또 ‘우리의 우정을 소중히 하고 싶어요.’ ‘함께 차 한잔 어때요?’라든가 맞춤 제작을 한 것인지 직접 그린 것인지 ‘할바마마, 사랑해요.’ ‘고모, 사랑해요.’까지 쓰여 있었다.
“저는 아직도 그때 전하가 신나서 보내 준 편지지를 가지고 있어요. ‘우정을 소중히 하고 싶다.’고 적힌 그 편지지요. 정작 전하께서는 편지 봉투를 봉한 씰이 신상 실링 왁스라며 색감이 너무 예쁘지 않냐고 자랑하셨지요.”
리엘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도 멋쩍게 웃었다.
“로이드 님이 센스가 있어요.”
간단한 말을 전하고 싶은데 편지를 쓰자니 말 한마디 쓰자고 나머지 공간을 수다로 채우기에는 골치가 아플 때. 그렇다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며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자니 없어 보일 때.
그럴 때 로이드의 필라그래피는 한 장 적당히 골라 그냥 봉투에 넣어 실링만 하면 되어 매우 유용했다.
동시에 그게 너무 편하고 재미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 핑곗거리만 생기면 편지를 보내 대니 묵은 실링 왁스나 얼른 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실링 왁스를 얼른얼른 써 없앨 수도 있었다.
“그 덕분에 오래 묵은 실링 왁스 실컷 써서 행복했어요.”
리엘라가 가슴을 쫙 펴고는 자랑스럽게 외쳤다.
“그럼 행복하셔야죠! 오빠들이 그거 엄청 열심히 그렸다고요.”
“엘비어스 님도 같이요?”
“사실 그려 넣을 문구는 오빠들이랑 제가 같이 뽑았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도 그렇고…… 다들 손재주가 없어서 필라그래피로 그리는 건 로이드 오빠 혼자 했지만요.”
그 순간 다시 크로이젠의 셋째 공자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문득 리엘라에게 묻고 싶어졌다. 사촌이니까 어쩌면 알지 않을까?
그러다 마차는 프리체 백작 저택 앞에 도착했고 리엘라는 다음에 만나자며 인사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머뭇거리며 인사하다 그만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르가 내 검술 수업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생각이 났다.
‘맞다! 크로이젠 공작령에 버려두고 왔지.’
이 상태가 한 달째다.
처음에는 내게 자세히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적당히 조사하는 척하고 돌아와 적당한 선까지만 알려줄 줄 알았는데, 열흘이 넘어갔을 때는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진짜 제대로 조사할 생각이라 오래 걸리는 건가?’
그러나 이게 한 달이 다 되어 가기 시작하자 또 바뀌었다.
‘이대로 잠적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내가 먼저 불러낸다면 돌아오긴 할 것 같은데 차마 불러내서 어디까지 조사했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르가 사실은 내 사람이 아니라 크로이젠 공작의 사람일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째 되던 날, 올 것이 왔다. 그가 내 드레스룸의 비밀통로를 통해서 방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내일 들을게.”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오늘 이야기하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짧습니다.”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셋째이며 제국령 698년 10월생. 크로이젠 공작가의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알려 드릴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698년 이전부터 공작가에 있던 고용인들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왜?”
“제가 직접 물어보면 전하께서 공작가의 뒷조사를 한다는 것이 티가 나니까요.”
“그래서 알아 온 것이 없다?”
“……예.”
예상한 일이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겠어.”
“더 조사할까요?”
그 목소리에는 내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기색도 없었고 내 뜻을 물어보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 기계적인 질문이었다.
그 순간 날 기만하느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렇게 울컥해서 쳐다보자 그가 한 걸음 움찔 물러섰다.
“더 조사하라고 하면…… 더 알려 주긴 할 거야? 경이 누구의 사람인지 잘 알았어.”
아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전하……!”
“더는 조사하라고 해봐야 의미 없을 것 같으니 때려치우라는 소리다!”
“알려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알려 드릴 겁니다!”
내가 소리를 높이자 그가 함께 언성을 높였다.
“내게 알릴 수 있는 것과 알릴 수 없는 것을 그대에게 판단하라고 한 적 없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한 것이지.”
“제가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고 이건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내게는 아직 크로이젠 공작가의 힘이 필요하니 그대의 배신은 잊어 주겠어. 그러니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 입 다물어.”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저는 전하만큼 자유롭지 않습니다.”
“닥쳐! 이중 스파이. 네 첩자 노릇을 참아 주는 건 여기까지야. 내 방에서 나가.”
그는 나가는 순간까지 굽히지 않았다.
“전하께서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저까지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색했다. 내가 화를 낼 때면 늘 그가 물러섰다. 내게 한두 마디 더 한 적은 있어도 대화의 끝을 그가 낸 적은 없었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참았던 숨이 길게 떨려 나왔다.
할바마마께서 크로이젠 공작과 혼인동맹을 약속했고, 나 역시 엘비어스와 흥망을 같이하자며 손을 잡았다. 그러니 크로이젠 공작의 사람인 아르가 내게 아군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적일 리는 없다.
그러나 ‘적이 아니다.’라는 말이 곧 ‘아군’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 사람인 것과 우리 편인 것도 다르다.
지금까지는 그가 나를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저 크로이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방향의 끝에 그저 우연히 내가 서 있었던 것이지 그가 나를 바라보려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참기 힘들 만큼 버거웠다.
***
황립 아카데미에 연구 지원을 하기로 했던 일의 서류가 완전히 정리되었을 무렵이었다. 마나 뒤틀림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던 고고학 교수님의 편지를 받았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마나를 보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신전에서 수행을 오래 한 신관들이 마나를 보는 눈이 뜨이곤 하지만 아무래도 신관들은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제약이 있다 보니 가능할까 싶었다.
그래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나는 비는 날짜를 잡고 황도에서 가까운 몇몇 신전들을 추려 낸 다음 신뢰할 수 있는 신전을 다시 골라냈다. 그렇게 골라내는 과정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곳이 있었다.
시간의 신의 신전.
시녀들은 굳이 황도에서 가깝고 내게 우호적인 대지의 신전을 놓아두고 시간의 신전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농번기에 황실을 대표해서 풍작 기원 기도를 하러 대지의 신전에는 해마다 갔으나 시간의 신전과는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시녀들이 그런 소리를 할 법했다.
그러나 어차피 그들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모른다. 내가 황립 아카데미의 고고학 교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물론이고 그를 왜 찾아갔었는지조차 모른다. 물론 내가 신전을 찾는 목적도 모른다.
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대강 말하고는 아침 일찍 호위는 셋만 데리고 간소하게 출발했다.
사실 대지의 신전도 상관은 없었는데 신전에 전해 줄 물건이 있기도 했고.
나는 아주 어릴 때 발견해 지금까지 숨겨 두었던 돌고래 모양 단검, 시간의 신의 성물을 가지고 성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