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09화 (109/148)

109화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한 내 재료들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린 건 바늘과 실이 아니라 종이 위에 멋지게 그려진 필기체 글자들, 도안 샘플이었다.

자수는 크게 흥미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가장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이니셜을 새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 무슨 글자를 새길지는 고르지 못했다. 딱히 누구 줄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이쯤 되니 누군가의 이니셜을 새겨 선물해야만 할 것 같았다.

“글쎄, 아직 안 정했어요.”

“로이드 공자님이 계시잖아요.”

“그건 황실과 크로이젠 공작가 사이의 약속이고 아직 약혼 안 했어요.”

“그럼 한 거나 다름없죠. 어차피 황실과 크로이젠 공작가 사이의 혼인이라면 전하와 로이드 님밖에 더 있나요?”

이건 뭐 주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역시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떠드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편하다고 쉽게 자리를 뜰 수도 없다.

“그래도 자수가 마음에 들게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다음에요. 무엇보다 로이드 님이 저보다 손재주가 좋기도 하고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민티아가 말했다.

“크로이젠의 둘째 공자께서 손재주가 좋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어요. 특히 그림을 잘 그리신다면서요. 워낙 섬세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시죠.”

“예술 감각도 뛰어나시고 섬세하신 분이 약혼자라니 좋겠어요.”

이야기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약혼자와 이상형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민티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리카 양은 약혼자가 없죠?”

“네…… 아직.”

리카는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영애였다. 황도에 자리를 잡고 살 정도의 세력 있는 백작가 영애이나 나와는 황궁의 어지간한 파티 자리에서 스치듯 보았던 듯 낯만 살짝 익은 정도였다.

“이상형이 있나요?”

“아뇨, 그건…….”

“말해 봐요. 전 이미 영애께서 누군가에게 액세서리 세트를 선물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어머, 진짜요? 어느 분께 받은 거예요?”

사람들이 보채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사실 어느 파티 무도회 참석했다가 어떤 분과 춤을 추었거든요. 그분께서 드레스를 실수로 밟아서 찢어졌는데 그냥 사과의 의미로 보내 주신 거예요.”

“그분께 손수건을 보내실 건가요?”

누군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역시 고작 드레스 조금 상한 것 가지고 액세서리 세트까지 받기에는 너무 과분한 것 같죠?”

곧 테이블에 앉은 소녀들이 “어머, 어머!”를 연발하며 까르륵거렸다. 그러던 중 조용히 앉아 있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 파티에서 리카 양의 드레스가 찢어졌던 걸 봤어요. 그런데 그 영윤은 약혼녀 있지 않아요?”

“그분이 어느 가문의 영윤이세요?”

곧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분이었어요? 그분, 약혼녀가 있을 텐데요.”

리카 양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서렸다. 사람들이 말이 없자 민티아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그냥 사과한다고 보낸 액세서리만 받고 끝내세요. 아무래도 직접 수놓은 손수건을 다시 보내는 건 그분 약혼녀에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이 목걸이에 얹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지 힘없는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 또 눈치 없이 물었다.

“그분이 주신 목걸이예요?”

“아……!”

황급히 내린 손은 오히려 확실한 대답이 되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물어본 사람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흠칫 굳었다.

‘아, 난 그냥 황궁에서 파티 열지 말까?’

내가 주최한 파티에서 이런 분위기 나오면 도저히 수습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황실의 일원으로서 황궁 내의 작은 파티를 주최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이런 모임은 인맥 형성을 위해서 중요한 일이다. 참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해마다 한두 차례씩 적당한 타이밍에 모임을 주최하는 것도 중요하다. 세력이 크면 클수록 더 중요하다.

결국 나는 이 불편한 적막이 싫어서 입을 열었다.

“사과의 의미로 주고받은 것인데 아무렴 어떤가요? 실례될 일을 하고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어물쩍 넘기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목걸이 정말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곧 리카 양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다가 짜내듯 힘주어 말했다.

“저기…… 전하께서도 머리핀이 정말 예뻐요. 잘 어울리세요.”

응? 머리핀?

나는 손을 들어 머리핀이 꽂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보석의 감촉이 손끝에 감겼고 단풍잎 모양 머리핀이 닿았다.

예전에 엔델포프에서 내가 아르에게 사주었던 단풍잎 모양 머리핀이었다.

“뭐야? 이걸 왜 다시 나한테 주는 거야?”

“저하께서 쓰십시오. 저는 어차피 쓸모도 없고…….”

“그럼 대체 왜 멍하니 쳐다봤던 건데? 마치 사달라는 것처럼.”

“사달라는 게 아니라 제가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날 줘?”

“저하께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때는 얼결에 되돌려받았는데 이걸 구석에 처박아 두자니 돌려받은 의미도 없는 것 같아서 생각나면 가끔 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미소를 지으시는 걸 보니 설마 로이드 님이 주신 건가요?”

“그러게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어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반짇고리 뚜껑에 달린 거울을 힐끗 바라보았다.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황급히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아니…….”

아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게 사주고 싶어서 쳐다보고 있었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애써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내가 샀어요. 길 가다가 너무 예뻐서.”

“그러면 로이드 님께는 액세서리 같은 거 뭐 받았어요?”

“그것보단 그때그때 제철 꽃을 자주 보내 주세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이 많으니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크로이젠 공작가에서 특별한 날에 이것저것 내게 준 선물은 많았지만, 로이드가 수시로 직접 챙겨 주는 건 늘 엘비어스와 함께 저택 화원에서 골랐다는 꽃 세 송이였다.

물론 특별한 날에는 이따금 센스 있는 선물도 했다. 그건 내가 굳이 약혼녀가 아니라도, 친구사이에서 마땅한 선물을 보낼 만한 날에 한정되었고 몹시 로이드다운 선물이었다.

그러자 민티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꽃 말고 액세서리는요? 지난달에 란슈아 백작 영애의 생일 파티에 그분이 액세서리 숍 블루문에서 나온 루비 목걸이를 선물하셨던데 전하께 하는 선물은 얼마나 더 화려할까요?”

“세상에! 블루문에서 세공한 액세서리를요?”

굳이 로이드가 지난달 누군가에게 생일 선물 준 것과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액세서리 숍의 세공품이라는 것까지 언급하는 것은 나를 한 방 먹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귀족 영애의 생일 선물로 가장 무난한 것은 장신구였고 크로이젠 공작가쯤 되는 가문에서 블루문의 세공품이 아니면 그 위세가 살지 않았다.

로이드가 주었다는 루비 목걸이도 사실 공작가에서 백작가에 보낸 선물에 더 가까웠다. 다만 로이드가 공작가를 대표해서 이런저런 사교계 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준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민티아가 특별하다는 듯 언급한 것이 사실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다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내가 받은 선물이 무엇인가에 더 집중한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선뜻 후작 영애인 민티아에게 그것을 지적할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인지 그저 내 대답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민티아에게 지목당한 란슈아 백작 영애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도발에 넘어갔었구나.’

작은 파티장 정치질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무늬만 황위 계승권자라며 비웃던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지금 다시 보니 가소롭다.

‘네가 말했던 정치질이 이거였어?’

겨우 이런 도발에 기죽었던 내가 우스웠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도 이렇게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을 특별하다는 듯 민티아가 엮었다. 당시에 내가 로이드에게 목을 매달았던 만큼 그것은 더욱 특별한 사건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갈등이 깊어졌을지도 몰라.’

나는 조그맣게 숨을 내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란슈아 백작 영애가 받았다는 그 루비 목걸이 말인데요. 제가 골라 드렸는데요.”

아주 거짓도 아니었다.

아직은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로이드와 주기적으로 만나고는 있으나 요즘 내가 여기저기 사교 모임을 돌아다니느라 뜸해지긴 했다. 로이드도 슬슬 약혼하지 않을 구실을 만들어 주겠다는 핑계로 만남을 자제하자고 했다.

어쨌든 그때 백작 영애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은 로이드가 액세서리 숍, 블루문에서 카탈로그를 받아 선물을 고를 때 내가 조언을 해주긴 했다.

“어쩐지 너무 예쁘더라고요. 전하의 안목이었군요.”

민티아가 입발림을 하는데 어쩐지 아니꼬운 시선이 느껴졌다. 곧 다른 사람들도 황급히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맞장구를 쳤다.

귀족들이 불륜, 바람 등의 부적절한 염문설을 이용해 정적을 보내 버린다는 방식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아르가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이번에는 나 대신 로이드가 타깃이 되어 란슈아 백작 영애가 영문도 모르고 희생당할 뻔했는데 사전에 바로 차단할 수 있었다.

아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던 란슈아 백작 영애를 다시 돌아보자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민티아 때문에 기껏 선물받은 목걸이를 걸지도 못하고 어디 보이지도 못하고 평생 보석함에 처박아 둘 뻔한 것도 억울했을 텐데. 그것도 모자라 졸지에 황녀를 비웃기 위한 비교 대상이 되어 제물로 바쳐질 뻔했다.

그런데 내 말 한마디로 그녀는 순식간에 황녀가 직접 고른 액세서리를 받은 것이 되어 버렸다.

속이 시원해진 나는 드디어 수놓을 글자를 결정하고는 바늘을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