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식사 끝 무렵이었다. 후식이 나올 즈음, 고모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함께 식사한 지도 오래되었지.”
그 말대로 정말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였다.
할바마마가 물러나시고 고모님께서 옥좌에 오르면서 나는 데뷔탕트를 치렀고, 그날 이후로 파티 초대장을 어마어마하게 받았다. 그때부터 리엘라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교 모임에 돌아다녔다. 작은 티파티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참석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무도회나 만찬회에 참석했다.
황궁에 붙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황궁에 붙어 있는 날도 문학, 과학, 역사, 예술, 예법 등등 이런저런 수업이 많은 날이었다.
그런 내가 오랜만에 황궁에 붙어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모님께 할 말이 있어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말을 전하러 간 하인이 고모님의 만찬 초대장을 받아 온 것이었다.
“네가 이렇게 종일 황궁에 붙어 있는 것도 오래간만이고.”
어쩐지 작작 싸돌아다니라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아주 오랜 기억 속, 황궁 바깥이 위험하다며 내가 황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며 병적으로 안으로 싸고돌던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순간 푸딩을 뜨던 디저트 숟가락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접시에 닿았다. 예법에 어긋난 소리를 듣고서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럼…… 자제할까요?”
풀이 죽은 내 목소리에 의외로 고모님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계속 다녀. 이때 아니면 더 마음 놓고 못 논단다.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
그 순간 속이 개운해졌다. 그때처럼 위험하지 않은 현실이 몹시 행복했다.
“네!”
고모님은 노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사실 그곳은 작은 정치판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황궁에서 얌전하게 굴더니 대뜸 할 말 있다고 한 이유는 뭐니?”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 궁에서 파티를 열어도 될까요?”
황녀로서 황실을 대표해 여는 작은 파티. 지난 생에서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
굳이 내 라벤더궁이 아니더라도 황궁 내의 적당한 곳 어디서든 파티를 열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방으로 돌아왔다. 고모님께서는 별걸 다 쓸데없이 허락까지 받는다며 귀찮음이 섞인 잔소리를 했지만 그것마저 기뻤다.
나는 서둘러 내 앞으로 온 파티 초대장들을 끌어안고 하나하나 골라냈다. 적당한 자리에 참석해서 스리슬쩍 떡밥을 뿌려 둬야지.
대개 세력이 큰 귀족들은 파티 초대장을 보내기 전에 슬쩍 계획이 있음을 암시하곤 했다. 다른 이가 같은 날짜에 파티를 개최했다가 자신에게 손님을 빼앗기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었다.
나는 초대장에 적힌 날짜들을 쭉 훑었다.
“대부분 늦어도 일주일 전에는 초대장을 보내는구나.”
“계획은 보름 전부터 잡을 거예요.”
“그럼 나는 한 달 정도 잡아야겠네.”
내 말에 벨과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아요.”
나는 계속해서 초대장들을 꼼꼼히 읽었다. 평소에는 잘 확인하지도 않던 초대 문구들도 눈에 들어왔다. 틀에 박혀 싫증 나지 않을 문구, 간결하고 세련되면서도 정중한 문장을 작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체리에 후작가에서 온 초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민티아가 모임의 호스티스였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가 참석을 기대하지 않는 형식적인 초대장.
대개 약소 귀족들 같은 경우에는 황실에 함부로 초대장을 보내기 어렵고 눈치가 보여서 내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을 꺼린다지만 체리에는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을 가문이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대도 나는 황녀다. 그런 내게 작은 티파티 초대장이라도 거르는 것은 황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형식적인 초대장이 꼬박꼬박 날아오기는 했다. 나 역시 참석하지 않더라도 아예 무시할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참석할 수 없다는 형식적인 답장은 항상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일정이 있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의 답장을 쓰려던 찰나였다.
‘그냥 가볼까?’
체리에 후작가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파티와 모임에는 키옌 태후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도 참석할 터였다. 그들 중 세력이 애매한 이들과는 내가 직접 접촉할 기회가 흔치 않다. 문득 그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냉궁에 유폐되기 직전, 내 생일 파티장에서 민티아가 내게 했던 귓속말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방금 그거, 누가 보아도 실수는 아니었습니다. 괜찮다고 용서해 주면 착하다고 해줄 것 같나요? 다들 멍청하다고 수군거릴 겁니다.
그러니 화내 보세요. 저번처럼 제 뺨이라도 쳐보시란 말입니다. 설마 제가 또 억울하다며 울면 감당 못 하실 것 같으세요? 그것 보세요.
이런 사교계 파티장에서,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니고 전하의 홈그라운드인 황실 파티에서 벌어지는 정치질조차 제대로 못 하니까 무늬만 황족이라는 겁니다.”
그때는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힘이 약해 아무 말도 내뱉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 거다. 내가 참석했다는 사실이 꺼려져도 감히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을 터였다.
내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그 모습을 이번에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좋아. 미친 척하고 가자!’
***
다음 날 아침, 나는 민티아에게 ‘파티 참석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라는 짧은 답장을 써 하인을 통해 후작저로 보냈다.
그런 다음 황궁 도서관에 들어섰다. 곧 황궁 도서관 정면의 안내데스크에 있던 시종이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찾으시는 책이 있습니까?”
“제국 귀족들의 계보를 찾는데.”
“거긴 보안 구역입니다. 시녀와 호위가 출입할 수 없는데 괜찮으십니까?”
“알고 있어.”
나는 시종에게 서고의 열쇠를 받고는 그가 불러 준 하녀를 따라 도서관 안쪽 깊은 곳까지 걸었다. 도착한 서고의 문은 오랫동안 열지 않은 듯 손잡이에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 하녀가 문을 밀자 무거운 문이 경첩 소리를 삐걱거리며 힘겹게 열렸다.
하녀가 내게 마나 램프를 건네고는 말했다.
“저는 여기서부터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서고는 꽤 어두웠고 적당히 선선했다.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나는 한 발자국 들어서서 뒤돌아 문을 닫았다. 마나 램프의 조도를 높이자 주변만 환했다. 그 빛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원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크로이젠 공작가…….’
공작가의 계보는 가장 안쪽에 있었고 역사가 깊은 가문인 만큼 계보가 차지하는 책장, 공간은 상당했다.
원하는 책장, 원하는 책을 찾는 데에는 한참이나 걸렸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직계만 모아 놓은 계보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현 크로이젠 공작과 공작 부인의 이름 아래로 세 명의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엘비어스 폰 크로이젠 (693)] [로이드 폰 크로이젠 (695)] [알테어 폰 크로이젠 (698)]
***
파티 주최 경험이 없는 나는 크로이젠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파티를 준비했다. 무작정 티파티를 열겠다고 말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모임의 주제조차 정하지도 않고 도와 달라고 한 나를 보고는 공작 부인은 처음에는 굉장히 난처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내게 후작저에서 민티아가 주최하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라며 기뻐했다. 내가 혼자 가서 어색하면 안 된다며 리엘라도 함께 나섰다.
“잘 생각하셨어요. 적을 이기려면 적을 잘 알아야 해요.”
공작 부인은 내 드레스 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쉴 새 없이 말했다.
“모르는 게 있거든 저나 리엘라에게 바로바로 물어보세요. 나중에 물어봐야지, 하면서 지나가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체리에 후작가는 저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후작저에서 주최하는 파티들은 주제를 선정하고 모임을 진행하는 요령이 상당히 좋습니다. 주제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공간을 꾸미고 다과를 준비하는 방식도 상당히 질 높아서 배울 점이 많을 겁니다.”
나는 공작 부인의 상냥한 배웅을 받으며 리엘라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
후작저에 도착했을 때 파티장으로 안내하는 시종의 표정도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얼떨떨했고,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는 아주 순간 정적까지 흘렀다.
짧은 정적 이후에는 조금 놀란 듯한 소리가 곳곳에서 조그맣게 웅성거렸다. 그 누구도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자 민티아는 파티의 호스티스로서 능숙하게 소란을 잠재웠다.
“세상에, 황녀 전하! 후작저에는 처음이시죠? 환영합니다. 프리체 백작 영애도요.”
말은 그렇게 하는데 그녀도 나의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던 답변이 빈말인 줄 알았던지 상당히 당황한 억양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긴, 데뷔탕트를 치른 것도 거의 2년은 되어 가는 황녀는 그동안 정적으로 간주 된 가문에서 받은 초대에는 어떤 모임이든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으니 그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그동안 할마마마의 본가에는 정말 오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늘 다른 일이 겹쳐서요. 드디어 시간이 맞았네요.”
모임의 주제는 자수였는데 참석자는 10대 중후반의 영애들과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귀부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이 많이 피곤할 수도 있는 주제라는 점을 고려한 것인지 강렬한 색의 꽃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바닥은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잎사귀가 넓고 푸른 나무들로 녹음이 우거져 사방을 시원하게 덮었다.
‘역시 공작 부인의 말씀대로 센스 있네.’
사람들은 넓은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후작저에서 준비한 반짇고리를 열어 보고는 색색의 실들을 꺼내 색을 감상하기도 했다. 몇몇은 정원 한편에 진열한 꽃 그림이나 새 그림 몇 점을 구경하며 어떻게 자수를 놓을지 상의하기도 했다.
작은 규모인 줄 알았는데 화려할 것이 없어도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모여 있었다. 나와 리엘라는 민티아의 안내를 받아 적당히 자리를 잡고 도안을 고르기 시작했다.
동그란 테이블에 예닐곱 명씩 둘러앉아 조용히 수만 놓던 사람들이 따분해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조금 지나자 수다를 떨었다.
“리엘라 양, 솜씨가 좋네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리엘라의 손으로 향했다.
“그러게요. 붉은 장미가 정말 섬세해요!”
내가 곁눈질로 힐끗 리엘라의 손수건을 보자 붉은 실로 만든 꽃잎 여러 장이 겹치듯 수가 놓여 있었다.
‘튤립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슬쩍 리엘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다가 곧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누구 줄 거예요? 약혼자?”
다들 이렇게 놓은 자수를 누구에게 선물할 것인가를 놓고 떠들면서 어느새 자수는 뒷전이 되었다. 대개는 약혼자에게 준다고 대답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부모님께 드린다는 답이 일반적이었다.
그때였다.
“황녀 전하께서는요? 누구 줄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