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내 사람이 아니었다. 크로이젠 공작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크로이젠 공작가와 내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 그건 별 상관이 없었다. 아니, 없어야 하는데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크로이젠 공작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병약하다 소문이 도는 막내아들을 숨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쪽이야 나와 사적으로 얽힌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얽힌 관계이니까.
공작가에서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든 그냥 말을 아낀 것이든 정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르는 달랐다. 그쪽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배신감이 상승했다.
***
크로이젠 공작령 외곽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호수 근처에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크로이젠 공작가에서 별장처럼 쓰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요즘 그곳을 쓰는 사람은 크로이젠의 전 공작이었다.
그리고 최근 그곳에 꽤 오랫동안 손님이 머물렀는데 상황(上皇)이었다. 물론 별장의 하인 하녀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늙은 주인어른의 벗인가 보다, 주인어른처럼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나들이 다니시는 귀족 나리인가 보다 하며 생각하고 있었다.
엘비어스의 결혼식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공작가는 다음 날 손님들이 돌아가자 어제와 대비되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전 공작이 손님을 배웅하고 호수로 왔을 때 상황은 호수에서 뱃놀이하는 중이었다. 그는 하인을 불러 작은 배를 타고 다가가 상황의 배 위에 옮겨 탔다. 하인이 작은 배의 노를 저어 별장 쪽으로 떠나가자 전 공작이 간결한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상황의 옆에서는 평범한 수행원 혹은 하인 정도로 위장한 호위기사가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을 향해서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아멜리아 황녀께서는 아직 환궁 전인데 정말 안 만나 보실 겁니까?”
“지난달에 봤어. 그나저나 늦었지만 축하하네. 후계자인 장손을 장가들였으니 한시름 덜었겠군그래.”
“시원섭섭합니다. 그리고 아직 둘째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쪽도 서두를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황실은 손이 꽤 귀해서. 그럼 약혼식 이후에는 약속대로 그 녀석을 다시 데리고 갈 건가? 슬슬 원래 자리로 불러서 제대로 대접해 줘야지.”
상황이 호수 속 물고기를 향해 빵가루를 한 자밤 뿌리고는 넌지시 말했다. 그러자 전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안 오겠답니다.”
“아니, 대체 왜?”
“난들 압니까?”
전 공작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상황은 입꼬리를 비틀며 장난스레 물었다.
“자네, 내가 허락해 줬다고 아주 대놓고 황실의 고급 정보를 빼가려고 수작 부리는 거 아니지?”
“이미 모르고 싶은 것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모르고 싶은 거 뭐?”
“가령…… 몇 해 전에 온천에서 쓰러지신 이유라든가.”
“아아, 그거? 의원이 그러더군. 저혈압이 있으면 그 차를 마시면 안 된다고. 하물며 온천욕 직후에……. 나도 태후가 모르고 먹였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네.”
상황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건 차의 효능을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황궁 도서관에서 시녀가 세계의 차(茶)에 관한 서적을 빌려서 가지고 나간 기록이 있거든. 다만 ‘시녀’가 빌려 간 거라 그거 가지고 몰아가기엔 좀…… 부족할 뿐이지.”
“그럼 차곡차곡 모았다가 한꺼번에 쏟으면 됩니다. 우연이 겹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설령 정말로 우연이라도 사람들은 필연이라고 믿게 될 테지요.”
“그래서 그 문제는 아직 아껴 두고 있네. 그거 말고도 또 무슨 말을 전하던가?”
상황의 질문에 전 공작이 슬쩍 옆에서 노를 젓고 있는 호위기사를 바라보았다.
“다양한 걸 알고 있습니다. 태후 마마라든가, 라파트니 대공이라든가…….”
“난 별로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꽤 많은 걸 알고 있네.”
상황은 호수를 쳐다보며 피식 웃더니 물고기에게 주던 빵가루 그릇을 들고 호수에다 탈탈 털었다.
“그런데 그건 몰랐을걸? 그거 사실 라파트니 대공이 아니라네.”
***
아르를 크로이젠 공작령에 남겨 두고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로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공작령에 며칠 눌러앉아서 직접 조사를 해볼까 싶었지만 다른 약속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몇 달 전 디엘로니 교수님께 부탁했던 일 때문에 잡은 약속이었다. 고대 마법 시대의 역사, 문화와 그 시기의 마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고고학 교수님을 소개받는 자리였다. 듣기로는 그 시기의 마법사와 마법에 대해서 특히나 전문적으로 파고든 학자라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마법 시대에 대한 고고학 연구를 황실에서 지원하려는 것이었고 사실은 레이하임이 이야기한 ‘마나 뒤틀림’을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키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밑밥을 깔기 위해서 자그마치 2년이나 아주 천천히 준비했다. 마치 정말로 비주류 학문 연구를 지원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다행히도 이런 식으로 아카데미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일은 황실이 해마다 해오던 일이었다.
교수 연구실의 한쪽 벽면은 손때 묻은 서적들로 가득했고 반대쪽에는 책상이 있었다. 정면의 창문에서 햇살이 들이쳐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자와 탁자를 둘러싼 소파 위로 쏟아졌다.
자리에 앉자 따뜻한 홍차가 나왔다.
“디엘로니 교수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마법 시대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라고 보기에 그 교수는 생각보다 상당히 젊었다.
나는 황실과 아카데미 사이의 연구비 지원 계약서를 탁자에 내려놓아 그의 앞으로 쭉 밀어 주었다.
“서면으로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내용입니다.”
그가 연구비 지원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되었다. 그가 계약서를 받아 내용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제게 의뢰할 연구가 있으십니까?”
역시 눈치가 빨랐다. 단순히 학문 발전을 위한 황실의 지원이라기에는 지원 규모가 굉장했다. 눈치 없이 덥석 받아먹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연구 지원 규모를 보면 아시겠지만…… 무섭다면 거절해도 좋아요.”
하지만 그는 이미 지원 내용의 규모와 황실의 문양이 선명히 찍힌 계약서를 보곤 눈이 돌아간 듯 서둘러 서명을 한 뒤 탁자 위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바짝 당겼다.
“합니다! 이 연구, 제가 꼭 해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그동안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물었다.
“마나 뒤틀림을 조금 자세히 알고 싶은데요.”
“마법 시대를 쇠퇴시킨 그 유전질환 말입니까?”
교수는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끙- 하는 소리를 내다가 설명했다.
“원래 생물의 몸에 흐르는 마나는 피가 심장에서 동맥으로 나가고 정맥으로 들어오는 방향이 있는 것처럼 몸 바깥에서 안으로 드나들고 몸 안에서 순환하는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마나 뒤틀림은 이 방향이 불규칙해서 마나가 역류하거나 마나가 몸속에 고여서 더러워지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때 호흡기와 신경계가 손상됩니다.”
“그거, 완치가 가능한가요?”
“증상을 없앨 수는 없어도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마법으로 번성했던 지역인 라파트니 공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발견된다고 합니다만. 마법의 영역이라 의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질병은 아닙니다.”
“제국에서는요? 발병이 보고된 적이 있었나요?”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질문이 영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역으로 질문하는 대신 계속해서 대답해 주었다.
“3대 이내 조상 중 라파트니 공국 사람이 있는 경우에 드물게 보고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걸 모르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라파트니 공국에는 아직 고대의 마법을 수호하는 기적의 신의 신전이 있는데 그 근처에 모여 살면서 신전에서 매일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국에서 발병하면 원인도 모르고 죽거나 운이 좋아서 마나 뒤틀림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돈 있는 사람은 라파트니 공국으로 이민을 하게 되죠.”
말이 길지만 필요한 부분만 요약하자면 제국에는 쓸 만한 자료가 없다는 거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금방 그 정체를 깨달았다.
‘레이하임은 마나 뒤틀림을 확인하려면 약 복용을 중단시키면 된다고 했는데 발병해도 원인을 모르고 죽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약만 끊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닌 거야.’
약을 먹지 못하게 하고 그걸 진단하는 건 별도였다.
“그럼 교수님, 마나 뒤틀림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죠?”
“이 마나 뒤틀림이라는 게 의학적으로는 진단할 수 없습니다. 일반인은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거든요. 어느 신전이든 수행을 상당히 오래 한 신관이나 아주 드물게 마나를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을 오래 한 신관을 구하는 건 쉽다. 제국 내에는 영지마다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고 황도에는 제국 내 신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인 대지의 신전이 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마지막 질문을 했다.
“혹시 박하가 마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십니까?”
“아, 고대에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나를 정순하게 하기 위해서 박하로 추정되는 식물을 복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럼 그게 마나 뒤틀림에 약효가 있을까요?”
“그야 이미 제국에서 예전에 연구하던 일입니다. 박하만 가지고 되지 않아요.”
“박하 말고 다른 것이 더 있다는 말이군요.”
그쯤 되자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그런데 황녀 전하께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마나 뒤틀림이 궁금하신 건지…….”
나는 대답 대신 종이를 몇 장 내밀었다.
그중 반에 제론 자작이 관찰한 볼테르의 식사와 일과, 습관 등이 정리되어 있었고 나머지 반에는 볼테르가 여름에 키옌을 만난다는 핑계로 황궁에 눌러앉았을 때의 식단이 적혀 있었다. 키옌의 궁에 심어 둔 주방 하녀를 통해서 입수한 것이었다.
“마나 뒤틀림이 있는 사람의 일과와 식단입니다. 박하 말고 다른 게 있는지 찾으세요.”
곧 교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거 궁정 요리 식단 아닙니까? 이, 이분 혹시…….”
그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마치 자신은 아무 말도 안 했고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입구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호위기사를 돌아보았다. 섀도 나이트 소속이었다.
“네 밑으로 두 명 더 붙여 줄 테니 연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교수님을 24시간 경호해.”
나는 그 교수의 파르르 떨리는 손과 다리를 못 본 척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