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06화 (106/148)

106화

10. 시간을 달리던 운명

엔델포프에서 시작되어 제국 영지 대부분을 집어삼킨 의문의 전염병은 체리에 후작가에서 뿌린 치료제로 잠잠해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가벼운 감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종말론을 설파하던 리만은 어느 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어 황도의 남쪽 들판에 반년이나 효수했다. 심증으로는 체리에 후작가에서 도망치려던 그를 입막음 한 것 같은데 타살 흔적이 없어서 결국에는 실족으로 인한 사고사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해가 몇 번 바뀌고 나는 열세 살이 되었다. 할바마마는 고모님께 양위하셨고 그와 동시에 황녀가 된 나는 데뷔탕트를 치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초대장 폭격이 시작되었다.

파스텔 색깔의 알록달록한 편지 봉투가 쟁반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매일 하루의 끝은 그 초대장을 열어 보고 반드시 가야 하는 파티와 가고 싶은 파티를 골라 일정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들 사이에 이따금 특별한 것도 섞여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끼워 놓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섀도 나이트가 가져온 제론 자작의 편지였다.

‘자작도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혀를 차며 편지 칼로 봉투 끝을 잘랐다.

옆에서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을 녹이고 있던 유모가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제론 자작이 수완이 좋네요.”

“그럼 뭐 해. 제일 중요한 건 못 찾고 있는데.”

제론 자작과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는 않았다.

라파트니 공국에 다녀왔을 때부터 제론 자작이 자꾸 옆에서 얼쩡거렸는데 정말 귀찮았다. 어떻게든 내게 잘 보여서 황도로 진출하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러나 딱히 악의도 보이지 않았고 내게 해를 끼칠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놓아두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제론 자작이 필요해진 거였다.

내게는 볼테르가 몰딘에 가 있는 겨울에서 초봄 사이, 볼테르를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황궁에서 황후의 눈이 멀어지는 그 시기에 볼테르가 수상한 약을 먹고 있는지 감시할 사람.

이유는 모르겠지만 볼테르는 제론 자작에게 굉장히 의지하고 있었다. 황도에서 가장 먼 곳에서 지내면서 대화할 귀족이라고는 제론 자작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반면 자작은 내 쪽에 줄을 대고 싶어했으므로 어찌 보면 내게는 호재였다.

자작과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편지를 이렇게 은밀히 주고받으면서 자작도 이 일이 익숙해진 것인지 어느새 내게 볼테르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주었다.

어쨌든 자작이 보낸 편지 봉투 안에서 편지를 꺼내 펼치자 단정한 글씨가 드러났다. 지난 한 달 자작이 기록한 볼테르의 이야기였다. 물론 있는 기록보다 없는 기록이 더 많았지만, 볼테르와는 정말 부지런히 친해진 것인지(볼테르가 일방적으로 자작에게 매달리는 것 같지만) 꽤 자세했다.

“아무리 봐도 꾸준히 먹는 약은 없는 것 같은데.”

유모는 여전히 내 어깨너머로 자작의 편지를 힐끔거렸다. 그 순간 유모가 마치 진리를 깨우친 사람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앗! 아아아!”

“깜짝이야!”

“전하, 이거!”

유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글자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후식 메뉴였다.

“박하사탕이 왜?”

“스피아민트요.”

황후가 정원에서 키우던 스피아민트, 숙부의 방에 늘 있던 민트향 방향제, 그리고 그가 제일 좋아하는 차로 알려진 허브티는 스피아민트티였다.

“……약처럼 먹은 게 아니었어.”

***

여기는 황도에서 멀지 않은 곳, 광활한 목초지를 소유한 크로이젠 공작령이다. 영지 곳곳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공작성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정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향기 짙은 꽃들이 화려했다.

함께 온 시녀 제니가 황홀한 눈빛으로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와아! 제가 크로이젠 공작성에 다 와보다니!”

“그러게, 다시 오기 힘들겠지?”

공작성은 외부인을 들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황도에 있는 저택에서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긴 해도 공작성에 외부인을 초청한 파티는 10년 가까이 없었다. 그런 공작성이 거의 10년 만에 열린 이유는 다름 아닌 후계자 엘비어스 크로이젠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다시 오기 힘들긴요. 로이드 공자님이 계시니 자주 오실 거예요.”

제니는 자신의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곤 차마 그 약혼은 사실 로이드가 파투 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알려 줄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로이드가 마중을 나왔다.

“당일 일정은 피곤한데 전날 오시지 그러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을 텐데 제가 일찍 와봐야 폐가 되죠.”

“하객이 많지 않아 괜찮습니다.”

확실히 화려한 것에 비해서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많은 귀족이 후계자를 결혼시킬 때 자신의 권력과 재력,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귀족과 거상, 학자나 예술가들을 하객으로 초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하긴, 크로이젠 공작가 정도 되면 그런 겉치레는 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 위세를 알고 있지.’

공작의 친인척을 비롯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귀족들이 조금 왔을 뿐이었다. 조금이라고는 해도 공작가의 명성에 비해 조금일 뿐 이 인원도 상당히 많은 것이지만.

그리고 어쩌다 보니 황실에서는 나 혼자 오게 되었다. 할바마마는 황도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어느 별장에 계시고 고모님은 황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몹시 바빴기 때문이었다.

나는 로이드와 함께 엘비어스를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빠졌다. 주인공인 엘비어스가 몹시 바쁘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나를 힐끔거리는 귀족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황실 행사도 아닌 자리에서 주인공이 아닌 내게 대놓고 접근하는 것은 공작가에 실례이니 아마 밤에 열릴 피로연 파티를 기대하고 있을 거다.

그 때문에 귀찮은 일은 없었지만 몹시 심심했다. 리엘라가 그런 나와 함께 있어 주었지만 그마저도 공작 부인 쪽 가문 사람들이 찾는 바람에 금방 떠나 버렸다.

‘그럼 나는 이제 조용한 곳에서 산책이나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정원 중심에서 벗어나 외곽을 걸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몇몇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은 나처럼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산책하며 식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는 진짜 잘 잡았네.”

화창했다. 솜털 같은 구름이 적당히 해를 가려 뜨겁지 않으면서 바람은 선선하게 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공작성의 웅장한 자태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년이나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막내 도련님이요.”

라파트니 공국에 갔을 때 대공의 먼 친척 조카이자 대공의 양자가 될 수도 있다는 소년이 해주었던 이야기.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반쯤 잊고 살았는데 심심해지니 떠올랐다.

공작령 밖으로, 아니 영지가 아니라 공작성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도 않아 서로 편지만 주고받는다고 했던가.

‘그래도 오늘이 형 결혼식인데 얼굴은 비추겠지.’

그 순간 호기심이 동했다.

“찾아보자!”

그때였다.

“네?”

로이드였다.

“으악! 깜짝이야!”

맞은편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로이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뭘 찾으시는데요?”

“그, 크로이젠 공자님…….”

“저요? 아니면 형님?”

순간 위화감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작가에서 국내 귀족들에게 의도적으로 존재를 숨긴 거라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라파트니 공국에서 만났던 그 도련님은 크로이젠의 막내 공자가 병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흔한 이유였다.

“가문 어른들이 정말 피곤하게 해서 도망 왔어요. 산책하고 계셨나요?”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걸었고 어쩌다 보니 나는 그를 따라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로이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곧 어른들이 정식으로 약혼을 추진하실 겁니다.”

이는 전과 같은 어른들끼리의 구두 약속이 아니라 공식적인 발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그래, 딱 이맘때가 적당하다. 그래도 로이드에겐 늦고, 아직 내게는 빠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이어서 말했다.

“슬슬 구실을 만들어 드릴까요? 오래전에 약속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가벼운 말만 오갔다고 하더라도 황실과의 약속이다. 그렇게 쉽게 깨버리지는 못한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로이드가 만들어 주겠다는 구실이라는 건 사실 뭐가 됐건 위험했다. 단순히 하기 싫다고 버틴다고 할바마마도 고모님도 크로이젠 전 공작과 현 공작도 “오냐.” 해줄 문제가 아니라는 거였다.

“괜찮아요. 마음에도 없는 정략혼보다 그냥 저 혼자 사고 하나 크게 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게 괜찮지 않은 문제 같은데요…….’ 어쩐지 불안했다.

***

엘비어스가 신혼여행을 떠나고 공작령에서는 밤새 피로연이 이어졌다. 밤샘 피로연에 참여한 하객들에게는 각각 손님방이 마련되었고 나 역시 오늘은 하루 자고 다음 날 돌아갈 계획이었다.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나와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단을 두 층 정도 올라갔을 때 맞은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왔다. 아르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틀어 벽을 등지고 서서는 허리를 숙였다.

“너도 왔어?”

“예.”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가 엘비어스, 로이드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파티장에 갈 옷은 아니네.”

옷감은 상당히 고급스러웠으나 연미복은 아니었다.

“시끄러운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따가 내 방으로 와. 네가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었을 즈음에는 내가 아르를 불러냈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고 있었다.

방을 정해 준 공작가의 하녀들과 제니가 나가고 그가 내 방문을 두드렸을 때가 되어서야 잊어버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시키실 일이 뭡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날 라파트니에서 만난 그 소년이 말해 준 이름을 불렀다.

“알테어 폰 크로이젠.”

움찔.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알아?”

“모릅니다.”

“아는 것 같은데.”

차가운 시선이 얽혔다.

“모릅니다.”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래? 그럼 누군지 알아 와. 크로이젠 공작가가 그를 왜 숨기는지까지.”

“알겠습니다.”

평소처럼 몹시 반듯한 대답이었다.

“가봐.”

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방향으로 몸을 틀자 그가 나를 불렀다. 미묘하게 다급한 목소리였다.

“전하, 그 이름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치밀었다.

“……그건 경이 알 필요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