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테라스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커튼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치더니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라파트니 대공이었다.
“황태손께서 여기 계셨군요.”
“저를 찾으셨나 봐요?”
내가 간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라파트니 대공이 가볍게 손을 저으며 내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냥 앉아 계세요. 아까 인사했으니 겉치레는 생략하죠.”
그 순간 나는 그가 내게 무언가 제안을 하러 왔다는 걸 깨달았다. 혹은 나를 통해 할바마마께 은밀한 제안을 한다든가.
그가 본론부터 말했다.
“황제 폐하께 제 얘기 좀 전해 주겠습니까. 폐하의 것으로 추정되는 쥐새끼를 한 마리 데리고 있는데 돌려주면 제게 성의를 좀 보여 주실 수 있는지.”
싸한 한기가 돌았다. 목덜미를 차가운 바람이 핥고 지나간 것처럼 등줄기가 서늘했다.
침착하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레이하임을 데리고 있으며 그를 돌려주겠다는 말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대체 무슨 배짱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레이하임은 황후와 대공의 관계, 나아가 볼테르와 대공의 관계에 대한 것을 조사하러 왔다. 그리고 무언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모양인데 대공에게는 치명적일 터였다. 그런데 그걸 감수할 만큼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대공과 눈이 마주치던 그 찰나 눈꺼풀이 한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 찰나 머릿속에 몹시 오래된 목소리가 스쳤다. 유모의 것과 잔느의 것, 지금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내 목소리가 마구 뒤섞인 듯했다.
“라파트니 대공의 육촌 동생이 역모를 꾀하다가 걸려서 처형당했다네요.”
“역모를? 웬 역모?”
“대공이 방계의 먼 친척 아이를 양자로 들이려고 했거든요. 여태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 양자를 들이겠다니 거기에 반기를 든 거죠.”
“응? 아니었으면 뭐가 달라져?”
“대공이 진즉 양자를 들였으면 이럴 일이 없었겠죠. 대공이 양자를 들이지 않으면 적법한 계승권은 그 육촌이 가지고 있거든요. 그간 대공은 자신의 육촌 동생을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 먹었어요. 마치 후계자로 키우는 것처럼 굴면서요.”
“맞아요. 그러다가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곧바로 양자를 들였거든요.”
“한계까지 이용하려고 희망 고문을 했던 거네.”
“비슷하지만 달라요. 그 육촌 동생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대공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을지도 모르죠. 아니, 그랬을 거예요. 사실 어쩌면 역모도 누명일지 누가 아나요?”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대공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할바마마는 햄스터 안 키워요.”
“음…….”
대공이 피식 웃으며 의자 팔걸이에 걸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햄스터는 제가 키우는데요. 제게 햄스터를 돌려주신다고 하는 걸 보면 뻐꾸기 새끼가 아쉽지 않은 모양이네요.”
멈칫.
팔걸이를 두드리던 대공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의 몸이 앞으로 슬며시 기울었다.
“혹시 대공께서 원하는 것이 뻐꾸기 바꿔치기라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어요. 굳이 대공 전하가 아니더라도 저는 뻐꾸기 새끼만 내 집에서 영원히 쫓아내면 족하거든요. 원하신다면 뻐꾸기 새끼의 목숨은 붙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끼는 햄스터를 살려 주시겠다니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줄 수 있거든요.”
“저하의 귀여운 햄스터들이 자신의 친구를 찾으러 갔을 겁니다. 저도 고양이는 이미 치웠답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닫아 두었던 테라스 손잡이를 잡았다. 곧 고개를 돌려 나가려던 그의 이어진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미 다 큰 새끼 뻐꾸기라면 저 또한 오랜 골칫거리였으니 그냥 함께 처리해 주시길…….”
***
아무리 도서관이라지만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기본적인 경비는 있었지만 정말 기본적이었다. 경비에 빈틈이 너무 많았다.
“함정 아니야?”
“그냥 우리가 잘못 짚은 거 아닐까?”
함정이든 잘못 짚은 것이든 좋은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도서관 복도 안쪽 깊은 곳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밀렌이 재빠르게 수어를 했다.
[신발 굽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있어.]
[그런 것치곤 허술한데?]
그래도 일단은 몸을 숨겨야 했다. 검은 형체들이 벽에 붙어 그림자 뒤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몸을 숨긴 코너에 발소리의 주인이 막 도착했을 때였다.
곳곳에 숨죽이고 있던 섀도 나이트들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저하?’
‘저하!’
먼저 몸을 드러낸 건 가장 가까이 있던 아르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피곤해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길 안내해 주던 하인을 놓쳐서 길을 잃어버렸지 뭔가요? 이 말은 미리 준비했던 거였고.”
아멜리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금 함정인지 아닌지도 모를 상황에서 마냥 해맑은 그녀의 모습에 아르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쉿! 일단은 별채로 모시겠습니다.”
“대공이 경비를 물리고 레이하임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서둘러 데려와. 지하 2층 동쪽 복도 끝방에 있다고 했어.”
밀렌을 비롯한 섀도 나이트들은 눈을 감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약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최악을 가정했다. 어쩌면 대공이 함정을 파놓고 황태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빨라지려는 심장박동을 늦추기 위해 몸을 이완했다.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대공이 함정을 팔 만큼 허술한 거래는 아니었다.”
루비빛 눈이 단호하게 반짝거렸다. 여전히 섀도 나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는 그런 그들을 대변해 의사를 전달했다.
“혹시 모르는 겁니다.”
“나와 대공의 거래가 정말로 함정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내가 대공의 정적을 대신 제거해 주기로 했어. 그러려면 레이하임이 알아냈다는 그 정보가 내게도 필요하거든.”
대공은 제 육촌 동생을 희망 고문하고 죽였다. 역모도 사실인지 누명인지 모른다. 그저 다들 쉬쉬했을 뿐이었다. 대공은 아마 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뒤통수가 따가웠을 거다. 역사가 영원히 그 의혹을 기록할 거고.
하지만 이번에 그가 제국을 이용해 볼테르의 친부를 자신의 육촌으로 바꿔치기한다면 훨씬 안전하게, 역사에 오점 없이 그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제국 측에는 황후가 불륜으로 볼테르를 낳았다는 이 엄청난 사건에 사실 친부가 공국의 귀족이더라 하는 정보 하나 더 붙는다고 손해가 눈에 띄게 심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진실 그대로 대공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제국에게도 이편이 나을지 모른다.
아멜리아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듯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운다는 건 그녀의 가치관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대공의 육촌 동생이 느낄 억울함보다 레이하임의 안위와 체리에를 향한 복수가 더 중요했다.
섀도 나이트들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아멜리아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밀렌이 천천히 수어를 전했다.
[단장을 구하러 가자.]
***
공국과 협상은 그럭저럭 잘 끝난 모양이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허브 공급이 원활해질 무렵이 되어서는 엔델포프를 비롯한 그 주변 영지들은 빠르게 안정되고 있다. 그렇다곤 해도 여전히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완벽히 통제하는 건 사실상 힘들었다.
할바마마는 할바마마의 일을 했고 고모님은 고모님의 일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했고.
레이하임이 가져온 정보는 꽤 고급 정보였다. 위험할 만했다.
“선천성 마나 뒤틀림이라…….”
“유전병입니다. 지금이야 마나가 램프 같은 발광 장치나 가벼운 동력장치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사람이 직접 마나를 변환하는 마법이라는 것까지 존재했던 고대에는 꽤 흔한 유전질환이었다고 합니다.”
레이하임이 설명했다.
“유전질환이라……. 마법을 독점하기 위해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끼리 근친을 하면서 생긴 것이겠지.”
“맞습니다. 약물을 통해 지속적인 관리를 하지 않으면 단명하기에 십상이랍니다. 약에 드는 돈도 만만치 않고요.”
라파트니 공국은 고대 마법 시대에는 다수의 마법 능력자를 보유하며 번성했던 왕국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독점하기 위해 근친이 반복되면서 그 부작용으로 쇠락을 거듭하다 제국의 속국이 되었고 비교적 최근에 독립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역사였다.
그러나 그 마법사끼리의 근친 부작용이 ‘마나 뒤틀림’이라는 희귀병 형태이며 그것이 라파트니 대공 혈통의 유전질환이라는 건 처음 들었다.
“숙부에게도 그 병이 있을 가능성은?”
“어렵지만 확실히 확인할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요.”
“어떻게?”
“약을 못 먹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마나 뒤틀림 증상이 나타납니다. 근처에 마나 램프든 뭐든 마나 장치를 가져가면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키죠.”
말만 들으면 그 방법이 매우 간단히 느껴졌다.
하지만 애초에 경로도 알 수 없게 몰래 들여오는 물건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황후가 어디선가 마련해서 황궁으로 가져오는 것일 텐데 마차로 싣고 와야 할 정도로 커다란 것도 아니고 고작 조그만 약 하나 들여오는 것이다. 황궁에 드나드는 측근 하나 시켜서 주기적으로 가지고 오는 건 매우 손쉬운 일일 터였다.
그런데 그걸 막는다고?
“그게 가능해?”
“방법을 찾아봐야겠지요. 그나저나 정말로 대공과 손을 잡으시는 겁니까?”
“왜?”
“황태자 전하의 사건에 공국이 관련 있지 않습니까.”
그가 상당히 민감한 주제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의문이 있다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늦겨울에서 봄 내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결론은 하나였다.
“내 부모님을 죽여서 대공이 이득을 볼 게 없어. 나는 그가 볼테르를 황제로 만들고 황후와 손을 잡아 제국을 입맛대로 주무를 생각인 줄 알았거든.”
“아닙니까?”
“그런데 혹시 모를 후환이 두려운지 숙부를…… 아니, 숙부도 아니지. 볼테르를 없애려는 목적이 결과적으론 나와 같더라고. 제 손을 더럽히기 싫으니 내가 대신 더럽히래. 그 조건으로 그대를 빼 온 거였고. 대체 황후하고는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어.”
그러자 레이하임이 번뜩 생각난 듯 외쳤다.
“전 지금 들어 보니 그 관계 알 것 같습니다.”
“뭔데?”
“황후 폐하 성격에 공국과 손을 잡고 사이좋게 제국을 나눠 먹을 것 같습니까? 태후 자리를 꿰차고 아들을 허수아비 황제로 앉힌 다음 공국까지 다시 제국의 속국으로 집어삼키면 삼키겠죠.”
그건 꽤 일리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