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협박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내 방에서는 언제 나갈 생각이지? 얼른 숙부께 가서 내 말을 전해야 할 텐데?”
방문을 턱짓하며 내리는 축객령에 그는 기계 같은 예법에 맞춰 내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잔느가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유모는 자신이 다 뿌듯하다며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속이 시원하네. 잘하셨어요. 그나저나 에스코트는 진짜 어쩌시게요?”
에스코트라니 정말 귀찮아 죽겠다. 성년이 된다면 굳이 에스코트는 필요가 없지만, 무도회의 파트너 개념이나 친분 과시를 위해서 형식적인 에스코트를 주고받곤 했다.
하지만 미성년인 나에게 이런 자리에서는 에스코트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어디를 가든 보호자가 필요했다. 특히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이번 여정에서 할바마마가 내 보호자 권리를 위임한 사람은 숙부가 아니야. 프란츠 공작이지. 공작에게 보호자 노릇 좀 해달라고 하지, 뭐. 숙부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나는 곧 프란츠 공작에게 보내기 위해서 깨끗한 편지지에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황후가 돌연 제 의붓딸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황제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조그맣게 티파티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작은 사건이 하나 터진 것이었다. 규모가 작은 만큼 황후파 귀족들만이 초대를 받았는데 분위기가 무르익으니 자연스럽게 세간에 떠도는 에오넬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때 키옌이 에오넬 황태녀를 의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던 한 백작 영애의 뺨을 올려붙인 것이었다. 황족을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그 백작 영애가 선을 넘은 것도 있었지만 평소의 키옌이라면 제게 유리한 발언을 굳이 막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위험 수위가 높아 막는다 하더라도 말로 돌려칠지언정 이렇게 파급력이 클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에오넬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침 황제와 함께 있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겉으로는 ‘에오넬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겠다.’ 하던 약속을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그런 발언을 한 어느 백작 영애를 황후가 손찌검했다는 소문이 같이 퍼지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이 ‘백작 영애가 한 문제의 그 발언이 무엇이었기에 그 사달이 난 것인가.’에 모였기 때문이었다.
“황후와 거래했느냐?”
“그런 셈이죠.”
황제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멜리아가 공국에서 보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심각한 얼굴을 하곤 편지 봉투를 뜯었던 칼로 솜이 가득 든 빨간 눈의 토끼 인형 배때기를 부욱- 찢었다.
그러자 어지간한 사람만큼이나 큰 인형 안에서 하얀 솜이 꾸역꾸역 밀려 나왔고 그 안에는 모래를 담은 앰풀 여러 개와 꼬깃꼬깃 접힌 종이도 있었다.
“그건 뭔가요, 아바마마?”
“네 무고함을 증명할 것들.”
“뒤에서 그런 거 모아 주고 계셨어요?”
“네게는 움직일 명분이 없으니 내가 해주어야지.”
황제의 말에 에오넬은 서운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조작된 증거들 숨기는 것 말고 제게 해주신 게 있으셨나요?”
“공국이…… 얽혀 있단다.”
아무도 없는 방이지만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황제의 말에 에오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리에 후작가가 아니라요?”
“주범은 체리에 후작이 맞겠지. 그런데 공범이 제국 귀족이 아니라 공국이라는 건 상당히…….”
황제는 말을 마치지 못한 채 이를 으스러지도록 다물었다.
“공국은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겠지요. 제국 귀족이라면 강제로 수사할 수 있겠지만, 공국을 상대로 아주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추궁하기 힘들어요. 증거가 빈약하다면 오히려 우리가 불리해지겠죠. 아바마마의 입장을 이해해요. 제가 서운한 것과 별개로요. 황제란…… 그런 자리니까.”
에오넬은 조그맣게 숨을 내쉬며 먼 곳을 바라보듯 고개를 돌렸다. 역시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었다.
설령 증거가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공국이 제국의 황태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리 만무하다. 인정했다 하더라도 제국에 적절한 보상을 내놓을지, 그것을 제국민도 공국민도 받아들일지 역시 미지수다.
공국민은 공국의 범죄를 부정하며 누명이자 제국의 횡포라 할 것이고, 제국민은 황태자의 죽음에 공국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할 것이다.
최악은 전쟁이다.
***
환영 파티장에 초대된 공국의 인사들은 공국의 외교관들과 고위 귀족들이었다. 내가 프란츠 공작과 함께 등장했을 때는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작은 환영회라고 하기에는 꽤 규모가 크네요.”
내가 프란츠 공작에게 속삭이자 공작이 대답했다.
“제국의 황위 계승권자에 대한 호기심일 겁니다. 무도회 형식이라 남녀 비율을 어느 정도 맞추려면 초대해야 할 귀빈들의 숫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이 파티가 제국의 황태손이 참석하는 자리이니 다들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왔을 겁니다.”
곧 몇몇 공국의 귀족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고 몇몇은 뜬금없이 내게 자신의 아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내게 아직 공식적으로는 약혼자가 없으니 일어나는 일이었다.
로이드는 제국 내 고위 귀족 사이에서나 황태손의 예비 약혼자라고 소문이 돌고 있고 황실도 소문을 부정하지만 않을 뿐 아직 정말로 약혼을 한 건 아니었다. 그 덕분에 황도의 소식에 어두운 하급 귀족들이나 타국의 귀족들은 로이드에 대해서 잘 몰랐다.
‘으, 귀찮아.’
공작, 후작급 귀족들, 그것도 자국 귀족이 아니라 타국 귀족이다. 대화를 일부러 피하기도 힘들었다.
이럴 때는 잠시 화장을 고치러 간다는 핑계로 테라스로 빠지는 것도 답이다. 내가 막 테라스 쪽으로 빠지려는데 프란츠 공작이 슬쩍 막았다.
“저하, 피곤한 줄은 압니다만, 저분까지는 만나고 가시지요.”
프란츠 공작이 힐끗 시선을 던진 곳에는 나보다 네다섯 살 즈음 위로 보이는 귀족 영윤이 있었다.
“누군데요?”
“대공의 먼 친척 조카이자 직계 후손이 없는 대공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몇몇 방계 자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윽!”
이건 진짜 빼면 안 된다. 내가 황제가 됐을 때쯤엔 쟤가 대공이 된단 소리잖아! 어찌 보면 내게는 지금의 라파트니 대공보다 저 애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더티블론드 머리카락은 어둡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무게감을 풍겼고 대공가의 상징과도 같은 싱그러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굉장히 맑았다. 살짝 어두운 피부는 건강해 보였고 잡티 없이 매끄러웠다.
“잘생겼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감탄사에 프란츠 공작은 살짝 터져 나온 웃음을 삼켰다.
그는 내게 직선으로 다가와 나와 프란츠 공작에게 간결하게 인사를 했고 우리는 식상한 날씨 이야기를 좀 하다 곡이 바뀌자마자 홀 가운데로 향했다.
춤이 시작되고 그가 물었다.
“공국은 처음 오신다고 들었는데 방문하신 소감이 어떠세요?”
“이국적인 게 이런 거구나 싶네요. 신선해요. 음식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고요. 무엇보다 기후가 달라서 그런지 정원에 그림으로만 봤던 꽃들이 많네요.”
“제 친구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 녀석도 제국 귀족인데 처음 공국에 와서 했던 말이 신선하다는 말이었어요.”
“제국에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제국에는 오신 적이 있나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친구가 왔었죠. 해외 관광차 왔었는데 어머니끼리 친분이 있어서 마침 저희 저택에서 열렸던 티파티에서 만나서 그때부터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얼굴 본 건 몇 년 전이에요. 제국에서 보면 안부 좀 전해 주실래요?”
아무렇지 않게 안부 전해 달라는 거 보면 그쪽도 상당한 고위 귀족 영윤인 모양이었다.
“누군데요?”
“크로이젠 공작가의 막내 공자님이요. 예전에는 하인 통해서 보냈는데 고작 편지 한 통 보내자고 해외까지 사람을 보내는 것도 영 못 할 짓이더라고요. 그렇다고 우편으로 부치자니 여기저기 거치는 곳이 많아 편지 한 통 전달하는 데 한 달은 걸리더라고요.”
그가 배시시 웃었다. 로이드가 사교성이 좋은 줄은 알았는데 그 규모가 이렇게 글로벌한 줄 몰랐다.
“로이드 공자님께 공국의 친구가 있었군요.”
내 대답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처음 편지를 전달하던 공작가 하인 말로는 막내 도련님이 병약해서 공작령 밖으로는 잘 나가지도 않고 공작성에서 요양 중이라 제국 내에도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설마 황태손께서도 알테어를 모르실 줄은 몰랐네요.”
“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
라파트니 대공성의 가장 좋은 귀빈 별채는 아멜리아 황태손이 차지했다. 그 별채에는 자잘하게 딸린 방들이 많았는데 귀빈의 수행원들을 위한 방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커다란 방을 섀도 나이트가 차지했다.
황태손이 환영 파티에 참석한 사이, 시녀와 하녀들, 호위기사들은 모처럼의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모두가 별채의 정원과 후원을 탐방하거나 지하에 있는 커다란 대욕장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섀도 나이트들만 보이지 않았다.
아멜리아의 귀빈 별채 가장 큰 방, 그러니까 섀도 나이트들의 방에 짙은 회색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레이하임의 생존 신고를 가져왔던 그 전서구였다.
전서구는 아멜리아의 마차 안에서 황태손의 애완조로 위장하여 데려왔고 섀도 나이트는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아멜리아에게서 전서구를 받아 온 다음 파티가 시작되고 날려 보았다. 경비 인력이 파티장에 집중된 만큼 몰래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전서구가 창문으로 들어온 순간 밀렌이 물었다.
“몇 분?”
그러자 누군가가 모래시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15~20분 정도 걸렸습니다.”
전서구에게 물과 말린 애벌레를 챙겨 준 아르는 전서구가 들어온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다른 커튼까지 빈틈없도록 꼼꼼히 확인했을 때 로팅엄이 종이를 쫙 펼쳤다. 라파트니 대공성의 귀빈에게 제공한 안내도였다.
귀빈 별채를 중심으로 정원과 온실을 비롯한 귀빈에게 개방된 시설들만 나온 안내도였지만 섀도 나이트들이 곳곳을 몰래 돌아다니며 지도를 보완했다.
로팅엄이 귀빈 별채에 시작점을 찍고는 그 위에 자를 대고 화살표를 하나 그렸다.
“이 방향으로 날아갔었고. 15~20분이면…… 이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의 직선 위에 점이 하나 더 찍혔다. 곧 밀렌이 지도의 귀퉁이를 길게 찢어 반 뼘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간이 컴퍼스를 만들어냈다.
길게 찢어진 종이의 한쪽 구멍에 바늘을 넣어 지도 위의 점에 꽂고 다른 쪽 점에는 잉크를 묻힌 깃펜을 꽂아 종이를 팽팽하게 만들어 깃펜을 돌렸다. 깔끔한 원이 생겼다.
“오차를 고려하면 이 원의 안쪽 어딘가.”
곧 나이 지긋한 다른 섀도 나이트가 깃펜을 가져가 잉크를 묻혔다. 그러고는 원 안에서도 몇 군데에 X 표시를 했다.
“이곳들은 사용인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울 정도로 경비가 허술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사람을 몰래 가두기에 적합한 용도의 건물이 아니야. 그렇다면 남는 곳은…….”
로팅엄이 손가락으로 남은 곳을 가리켰다.
“이곳뿐이군.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경비가 적당히 엄하면서 사람을 가둘 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곳.”
밀렌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동시에 높으신 분이 짐꾼을 명목으로 수행원들을 데리고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자주 들락거려도, 오래 머무르든 짧게 머무르든 전혀 이상하지 않을 곳.”
대공성의 대도서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