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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03화 (103/148)

103화

“범인이 황후가 아니야?”

“범인은 체리에 가문이 맞을 겁니다. 다만 공국에 공범이 있을 뿐이죠. 그럼 이제 상상해 보세요. 만약 저하가 황후 마마라면 황태손이 남작의 토지 대장에 기재된 유령 별장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잠깐, 이거 너무……!”

윌리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차마 뒷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달 떨었다.

“윌리엄 에덴 경. 내가 그대에게 시킬 일은 어렵지 않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아닙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윌리엄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는 황후를 정적으로 둔 황태손의 호위기사장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밀렌의 말대로 눈을 감고 황후에 빙의하고자 노력했다. 내가 황후라면, 그녀 성격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타인의 정치적인 입장, 그들의 계략을 추측하고 분석하는 건 그동안 디엘로니 교수님과 많이 훈련해 왔다. 그 덕분에 금방 생각이 정리되었다.

“할마마마라면…… 황후는 한낱 노예상 따위가 자신을 등쳐 먹을 가능성보다 공국이 배신했을 가능성을 더 염두에 둘 거야. 이 사건의 배후, 공범이 공국에 더 있다고 했어. 황후는 노예상을 의심하는 대신 자신의 공범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

“맞아요. 저들끼리 내부 분열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상대가 너무 커 보일 때는…….”

밀렌이 내 소파 앞 테이블 위의 커다란 쿠키를 하나 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반으로 쪼갰다.

파삭!

쿠키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가루가 밀렌의 손끝에서 폴폴 떨어졌다.

“만만해 보일 때까지 쪼개 버리는 것도 답이 될 수 있거든요.”

‘마치 황후가 나와 고모님을 이간질했던 것처럼.’ 내리깐 눈 속으로 밀렌 손안의 쿠키가 보였다. 커다란 쿠키 안에 숨어 있던 꾸덕꾸덕한 초콜릿 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혹시 아나요, 숨어 있던 것도 드러날지.”

밀렌이 혀로 초콜릿 잼을 핥았다. 그런 그의 표정, 손짓과 목소리가 소름 돋을 정도로 농염했다. 위험한 육식 토끼의 살기가 날카롭게 공기를 찔렀다.

헛웃음이 나왔다.

어른이 되면 때로는 간단하게 생각해도 될 일을 꼬아서 생각하곤 한다던 고모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그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 밀렌이 키득거렸다.

“제 생각엔 어른이 되면 복잡해지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단 그냥 권력을 가진 자들의 습성이 그런 것 같아요. 손아귀에 가진 것이 많을수록 사람이 복잡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전 커터칼 이론을 좋아합니다. 뭐든 단순한 게 최고거든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밀렌이 붉은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디엘로니 교수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어. 너무 복잡한 것보다는 의외로 가장 간단한 것이 정답이라고 하셨지. 그런데 커터칼 이론, 그건 과학 아니야?”

“원래 학문의 근본은 다 같은 거라고 황제 폐하가 그러셨어요.”

그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정말이지 한 마디를 안 지는 토끼 새끼였다.

그때 조금 정신을 차린 듯 윌리엄이 말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뭡니까?”

“아, 맞다!”

오늘도 아르가 끼어 있지 않은 나와 밀렌의 대화는 어느새 샛길로 빠져 버렸다.

나는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절벽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꼼지락꼼지락 종이 끝자락을 매만졌다.

별장이 있던 집터에서 공국 방향으로 바라본 반대쪽 절벽 면. 그림 위에는 붉은 점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밀렌은 내가 펼쳐 들고 있던 종이를 슬그머니 가져가 그림을 반으로 접었다. 그림의 한쪽이 완전히 뒤로 넘어가고 남아 있는 반쪽에 남은 붉은 점은 세 개뿐이었다.

“사고가 있던 그해, 공식 조사 때는 지금 보이는 이 반밖에 조사하지 못했어요. 여기가 공국과의 국경이거든요. 공국령 쪽은 공국이 조사해서 결과를 서면으로 보내 줬는데 저희가 어젯밤 조사한 것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이거 붉은 점이 폭발 흔적이죠?”

“예. 각 점마다 샘플을 채취했습니다. 만약 샘플에서 전부 화약이 검출된다면 어마어마할 겁니다.”

“얼마나요? 추적 가능 할 정도일까요?”

“물론이죠. 이 근방 영지의 당시 화약류 관리 장부를 압수해 뒤져 보거나…… 밀수업자를 잡아다 족치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절벽에 폭약을 설치한 범인이 제국 쪽 사람이라는 가정하에요.”

바꿔 말하면 공국 쪽 사람일 때는 찾기 힘들 수도 있다는 뜻이군. 마음을 비워야겠다. 잘 풀려 가나 싶다가도 결정적일 때는 정작 뜻대로 되는 게 없을 때가 더 많은 법이었다.

나는 더 이상 보다가는 눈알이 빠질 것처럼 어지러운 그림을 처음 상태로 조그맣게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그림 누가 그렸는지 엄청 못 그렸네.”

“저하가 총애하는 예동님이 그렸는데요.”

밀렌이 키득거리며 흙 샘플을 채취한 통들을 담은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둔 붉은 점 찍힌 그림과 함께 윌리엄에게 건넸다.

“내일 점심 직후에는 경이 근무를 서요. 할바마마께 보낼 기념품을 사러 갈 예정인데 솜인형을 살 겁니다. 솜 안에 이것들을 넣어서 할바마마께 이 편지와 함께 보내세요. 편지를 봉할 실링 왁스는 반드시 펄 없는 붉은색으로.”

윌리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자와 함께 아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겁니다만, 혹시 서거하신 전 태자 전하의 사건을 다시 조사하고 계신 겁니까?”

“네. 숙부가 그러더군요. ‘내가 죽였다.’라고…….”

윌리엄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자 전하가 자백했다고요? 체리에 후작가가 진짜…… 그, 그랬던 겁니까?”

나는 긍정 대신 윌리엄을 보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난 생에서 사약을 받기 직전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굳이 어쭙잖은 말 돌리기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완전 범죄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죠.”

“사실 내가 죽였단다. 멍청한 것.”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손이 파르를 떨리고 이가 갈린다.

고모님은 모든 계획을 한 수 한 수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기를 좋아했다. 그런 고모님의 단점은 수가 정교한 만큼 예상에서 벗어나는 수가 나오면 무너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모님의 단점을 이용해 황후가 내게 한 짓은 나의 배신을 유도하는 것.

‘이번에는 내가 먼저 허를 찔러 주겠어. 감히 황궁에서 뻐꾸기 새끼를 키웠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까발려 주지.’

그러려면 레이하임을 구출하고 그가 내게 필사적으로 전해 주고자 했을 정보를 얻어야 한다.

***

대공성에 도착한 건 막 오후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된 귀빈실에서 잠시 쉬는 중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벨이 나갔다 들어왔는데 그녀의 손에는 하늘색 편지가 한 통 들려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보낸 파티 초대장이네요. 사절단을 환영하는 파티예요.”

“환영 파티? 무도회야? 만찬 초대가 아니고?”

“네.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벨이 건넨 초대장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무도회가 맞았다.

무도회라면 남녀 비율이 어느 정도 맞아야 재미가 있다. 굳이 재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협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이런 사절단 환영식의 목적은 대개 본론에 들어가기 전 서로를 살짝 떠보면서 상대에게 자신이 이 협상에서 내줄 수 있는 것을 은근슬쩍 어필하는 것이다.

“누구랑 춤추겠다는 거야, 이거?”

협상을 할 생각은 있는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잔느가 조심스럽게 내 손에 들린 초대장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저하, 잠시…….”

나는 순순히 잔느에게 초대장을 넘기고 내 앞에 선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라파트니 대공은 협상에 관심이 별로 없을 겁니다. 어차피 일시적인 교역이 될 거고 뭐가 되었든 이번 협상은 제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상 공국에 매우 유리할 테니까요.”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잖아.”

“그보다는 미래의 황제를 관찰하는 것이 더 큰 이득이 될 거라 판단한 거겠죠. 만찬에 저하를 초대해 보았자 웬만한 질문은 프란츠 공작이 중간에 쳐내 버릴 겁니다. 하지만 무도회라면 프란츠 공작의 방해를 완벽하게 피할 방법이 있죠.”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래 봤자 어린애랑 심도 있는 정치 얘기를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견제가 반갑지는 않았다. 솔직히 조금 겁도 났다.

내 정보만 있는 대로 노출하면서 정작 나는 대공에 관한 정보는 하나도 못 건지는 거 아닐까 모르겠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볼테르 쪽에서도 에스코트해 주겠다며 시종을 보내 왔다. 황후가 제 아들에게 붙여 놓은 새로운 시종장이었다. 볼테르가 황궁 밖으로 가출하다가 걸렸을 때 황후는 시종장부터 갈아 치웠다. 깐깐한 건 물론이고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들었다.

“저하께서는 황족이시니 같은 황족인 볼테르 황자 전하께서 에스코트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생각됩니다만.”

미묘하게 올라가는 말꼬리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했다.

“숙부께서 나를 에스코트하고 싶다고 말씀하던가?”

그는 잠시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예.”

“그럴 리가.”

“예?”

“숙부님은 혼자 가면 혼자 갔지 대외적으로 보일 이미지 생각해서 스스로 조카를 에스코트하겠다고 나설 분이 아니란 말이다만.”

나는 그가 미묘하게 올린 말꼬리를 똑같이 따라 했다. 제가 모시는 분의 험담을 들은 시종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를 에스코트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당장 생각해 봤을 때 하나였다. 국제적인 그의 이미지. 그러나 그것이 내게 이득 될 건 없었다.

게다가 지금 내게 하는 이 제안이 과연 볼테르 머리에서 나온 것은 맞을까 의문이다. 아마 황후가 붙인 저 시종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 거다. 볼테르는 시종이 내민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다겠지.

숙부의 시종은 내 비아냥거림을 속으로 삼켜 내는 데 성공한 듯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파티 시작 30분 전에 모시러 올 겁니다.”

이건 숫제 강압적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내가 거절할 거라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듯했다.

“올 필요 없는데.”

“파티 참석 안 하십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무례와 정중 사이 어디쯤 아슬아슬한 선을 타던 그의 말투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그 순간을 노린 듯 잔느가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나는 잔느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그리고 시종을 향해 말했다.

“그대 작위가 백작이던가, 남작이던가? 뭐 어쨌든, 경은 내가 숙부인 줄 아느냐? 경이 숙부에게는 위압적으로 하든 말든 그건 숙부가 저질렀던 지난 일 때문에 할마마마께서 묵인하고 계시니까 내 알 바가 아니야. 그런데 황자께 그리 무례하게 대해도 황후께서 가만히 계시니 황태손인 나도 만만해 보이던가?”

“제가 언제 저하께 무례하게 굴었다고 그러십니까.”

뻔뻔하기까지 했다.

“듣는 내가 기분이 나빠서 그러니 숙부께 전해. 이리 기분 나쁜 에스코트 제안은 처음이라 조카님 충격이 좀 심하시다고.”

어안이 벙벙한 것인지 시종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저하께서 환영 파티에 빠지시면 뒷말이 나올 텐데요.”

“그건 경이 알 바가 아니야. 경은 숙부의 말을 전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나를 협박하러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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