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섀도 나이트들에게 어두운 밤을 달리는 건 익숙했다. 하지만 거기에 일반인 하나 껴서 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하아! 조금 천, 천천히…….”
검은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꽁꽁 싸맨 시즈가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짚었다. 그런 그녀의 등을 로팅엄이 두들겼다.
“거, 젊은 사람이 체력이 많이 부족하구먼그래.”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지만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쉴 때 쉬더라도 바닥만 보지 말고 좀 둘러보면서 쉬시오. 여기 맞소?”
시즈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그냥 낯설었다. 아니, 다 모르겠고 일단 조용히 숨이나 돌리고 싶었다. 그녀는 한쪽 손을 휘휘 내둘렀다.
“모르겠는데요…….”
은백색 머리카락이 검은 두건 밖으로 삐죽 흘러나왔다.
그때 선발대가 돌아왔다. 선발대라고 해봤자 아르 한 명이었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별장터로 추정되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터만 남았다고? 별장까지 없앤 걸 보면 확실하다고 봐야겠군.”
“터에 돋은 식물들의 상태로 보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 노예들을 팔고 도망가면서 없앤 별장이 아니라 그 전부터…….”
로팅엄이 손을 들어 아르의 말을 끊었다.
“이 여자 말대로 노예들이 혹은 노예 중 누군가가 보면 안 될 것을 봤군.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서 남작에게서 노예를 전부 사 간 다음 죄다 죽였을 수도 있겠어.”
시즈가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자 누군가 턱짓으로 시즈를 슬며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는 살아 있는데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음…… 노예상이 이중장부를 만들었을 거예요. 전부 죽였다고 해놓고 몇몇은 몰래 살리네, 마네 떠들더라고요.”
“왜?”
“왜긴요. 몰딘 남작의 노예들은 대부분 상품 가치가 높은 노예니까요. 노예상들이 잘 안 팔리던 적당한 노예들을 죽이고 시체를 뒤섞어서 의뢰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전부 죽였다고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몰딘 남작에게 사들였던 노예값에 수수료까지 얹어서 받고, 우리들 신분을 세탁해서 한 번 더 팔아서 돈을 이중으로 챙길 수 있거든요.”
시즈는 기분이 더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겸사겸사 안 팔리던 노예들…… 사람한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길 밥만 축내던 재고를 처리했다면서 좋아하더라고요. 그걸 노예 창고에서, 당사자들 앞에서 잎담배를 태우면서 낄낄대며 이야기하다니, 그 새끼들 인간도 아니에요.”
로팅엄이 조용히 아르의 귀를 막았다.
“어린애는 듣지 마라.”
“다 들립니다.”
살인 경험 한 번씩 다들 있는 암살자들끼리 별 유난을 떤다며, 아르는 제 귓가에서 꼼지락대는 로팅엄의 손을 부드럽게 쳐냈다.
다른 섀도 나이트들도 아르를 꼬맹이 취급 하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로팅엄은 유난히 그를 어린애 취급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걸어 드디어 협곡의 양쪽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도착했다.
꽤 큰 공터였는데 일부 지역의 풀이 옆의 다른 땅에 비해 특히 낮게 자라 있었다. 로팅엄은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쓸었다.
“주춧돌이 있던 흔적이군.”
그때 조그만 유리판을 눈앞에 대고 절벽 건너를 바라보던 섀도 나이트가 조그맣게 말했다.
“단장 쪽에서 신호가 왔습니다.”
작은 유리 너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파란 불빛이 반짝였다. 밀렌이 이끄는 팀이 보내는 마나 램프를 이용한 신호였다. 깜빡거리는 신호가 완전히 꺼지자 로팅엄 역시 마나 램프를 켜서 신호를 보냈다.
한편 그 반대쪽 절벽 위.
로팅엄의 신호를 받은 밀렌이 말했다.
“시작하시죠, 선배님들.”
“예, 단장.”
곧 섀도 나이트들이 기다란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3인 1조로 이루어진 몇 개의 조, 한 조에서 두 명은 위에 남아 밧줄을 붙잡고 나머지 한 명은 아래로 내려가며 이따금 허리에 매단 램프를 켰다 끄곤 했다.
그들이 내려가는 절벽 아래, 깜빡이는 마나 등불을 보며 밀렌이 중얼거렸다.
“많이도 설치했었네.”
보르데넨 협곡은 국경이다. 그리고 고작 100미터도 채 되지 않는 간격을 사이로 로팅엄이 있는 곳은 체르무트 제국의 영토이고 밀렌이 있는 곳은 라파트니 공국령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밀입국을 한 셈이었다.
‘참 애매한 곳에서 사고가 났어. 조사하기도 힘들게…….’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 공국에서야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진짜로 적극적으로 협조했는지 알 게 뭔가, 남의 나라 일. 공국 입장에선 제국이 혼란스러우면 어부지리를 얻기 쉽다. 말만 공국이 제국의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지 사실 그 당시에는 이것저것 걸리적거리는 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거 공국 놈들도 뒤가 너무 구린데……. 황후야 그렇다 치고, 얘넨 뭐 하러 위험하게 제국 황태자 암살에 끼어들었지?”
현재까지 알아낸 바로는 득보다 실이 많아 보였다.
곧 제국 국경 수비대 초소 쪽에서 횃불을 밝혀 놓은 곳이 거대한 판으로 가려졌다 곧바로 열렸다.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라파트니 공국 쪽에서도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들켰다. 서둘러 철수한다.”
이윽고 양측의 국경 수비대가 각각 절벽 위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공국과 사전에 협의한 인원에 맞추어 호위 인력을 가지치기하니 출발할 때보다 많은 인원이 줄어들었다. 대신에 공국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기사단은 곧 군대다. 아무리 내가 황태손이라 해도 타국에 사절로 가는 이상 군사 도발을 할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경호 인력만 남기는 것이 예의였다. 물론 내 개인 호위기사들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공국에서 사전에 안내한 경로를 따라 공국의 수도까지 움직이며 예정된 장소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다. 물론 이것도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렇게 공국에서의 첫날 밤이 되었다. 적당한 규모의 도시에 위치한 호텔에서 저녁 식사 후 잔느에게 내일 아침 기상 시각과 출발 시각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이상입니다. 일찍 주무셔요.”
“아, 잔느 잠깐만.”
“왜요?”
“트리샤 경과 에덴 경 좀 불러 줘.”
잠시 후 밀렌과 내 호위대장인 에덴 경이 함께 들어왔다. 나는 잔느를 내보내고는 둘을 가까이 불렀다.
“밀렌 트리샤 경, 윌리엄 에덴 경.”
“네?”
“예. 저하!”
“둘이 서로 통성명은 잘했나요?”
“예!”
“그럼요.”
각이 잡혀 있는 에덴과 달리 밀렌은 여전히 풀어져 있었다.
“서열 정리도 잘했고?”
“아, 그건…… 서열 정리가 아니라 그…….”
밀렌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못 들은 척 넘겼으나 에덴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했다.
“윌리엄 경도 슬슬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정식으로 자기소개 좀 해주세요, 트리샤 경.”
***
밀렌이 간략한 자기소개를 마쳤을 때 윌리엄의 얼굴은 반쯤 혼이 나가 있었다.
“와, 세상에! 섀도 나이트가…… 와…….”
그런 윌리엄을 향해 밀렌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제국의 거대한 음모론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표정 지을 것까진 없잖아요. 에덴경?”
한 마디 한 마디 정곡을 찌르는 단어는 보는 내가 다 얄미웠다.
“솔직히 너희들이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건 맞지 않나?”
사실 에덴을 그냥 부른 건 아니고 시킬 일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그의 상태를 모르는 척했다.
“그건 그렇고 보르데넨 협곡은 어땠어? 실제로 별장이 있어?”
밀렌은 대답 대신 몇 겹으로 접혀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평범한 책과 비슷한 넓이의 종이는 펼쳐 놓고 보니 굉장히 거대했다.
“보르데넨 협곡의 절벽이구나. 제국령에서 공국령을 바라보는 방향 같은데…….”
“맞아요. 정확히는 별장의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바라본 반대쪽 절벽 면입니다.”
“터? 별장은?”
“네. 터요. 당연히 별장은 없었죠. 주춧돌이 있었던 것 같은 자리는 미세하게 파여 있고 주변과는 다른 잔디가 네모나게 남아 있었는데 그 평수는 시즈가 말했던 별장의 크기와 비슷해 보였어요.”
“증인이 있을까 봐 인멸했다는 거네. 하긴, 오히려 빈 별장만 남아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겠어.”
충분히 예상은 했지만 영 입안이 썼다.
“환궁하는 길에 황족 권한으로 남작의 토지 대장을 열람하세요.”
“서류상으로는 빈 땅일 거야. 남작이 불법 노예를 가두던 곳인데 제대로 등록된 건축물일 리 없잖아.”
“저하더러 확인하라고 한 말은 아니고요. 대놓고 확인하는 척을 하시라고요.”
눈이 절로 가느다래졌다. 그걸 확인하는 모습을 적에게 보여 줘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고민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저 가장 신임한다면서요.”
“내가? 그대를 신임한다고? 언제?”
“저 단장으로 임명할 때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사람 뽑는 기준이라고 했잖아요.”
밀렌이 ‘분명 그랬는데…….’ 중얼거리면서 눈을 피했다. 분명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긴 한데 밀렌의 표정을 보니 부정하고 싶어졌다.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내가 묻지 않은 부분까지 귀신같이 짚어내서는 대답했다.
“저하께서 그걸 뒤져 보신다면 적들이 분열하겠죠. 저하께서 그날 별장에 있던 증인을 확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그들에게 흘린 거니까요. 분명 확실히 없앤 줄 알았던 증인이 살아 있다. 그런데 그 증인이 하나일지 둘일지 얼마나 많은 걸 아는지 그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게 왜 내부 분열까지 이어져?”
“아! 저하는 시즈가 공국에 팔려 간 이후 이야기는 못 들으셨구나. 별장 노예들은 그 사고 이후 바로 공국으로 팔려 갔다고 했잖아요. 그거 공국의 높으신 분이 노예상한테 시켜서 매입하게 한 다음 전부 죽이라고 했대요.”
그 순간 나와 윌리엄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잠깐! 제국 귀족이 아니라 공국 귀족이라고?”
“귀족일 수도 있고…… 어쩌면 대공일 수도 있죠.”
밀렌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죽이라고 했는데 시즈는 탈출한 거야?”
“설마요. 노예상이 높으신 분들의 통수를 친 거죠. 남작의 노예는 예쁘고 젊으니까 몰래 비싸게 팔아 버리고 대신 잘 안 팔리던 노예를 죽여서 위장한 거래요. 그렇다면 아마 그날의 목격자들은 시즈처럼 대부분 살아 있을걸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담 범위가 상당히 좁혀져. 제국의 귀족을 협박해 노예를 강제로 매각시켜 한 번에 전부 매입할 수 있고 그의 은밀한 별장까지 태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권력도 돈도 많은 자. 게다가 공국의 공식 노예상을 움직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간도 크게 제국의 황태자 암살에 끼어들 수 있으면서,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공국 사람.”
머릿속에 라파트니 대공의 얼굴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