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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101화 (101/148)

101화

깊은 밤이 되었다.

인원이 지나치게 많아 늦어진 것일까, 너무 촉박하게 잡았던 일정 때문일까. 결국 숙박 예정지였던 도시에는 해가 떨어지도록 도착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야영할 준비를 했고 나는 마차 안에서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유모는 많이 피곤했던 것인지 램프의 불을 끄자마자 잠들어서는 코를 골았다.

호위는 마차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한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도 마차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설레기도 하고 익숙지 않은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하여 일어나 붉은 불빛이 아른아른 새어 들어오는 커튼을 찾아 슬며시 걷었다. 유리창 바깥은 여전히 분주했다.

그때 드디어 마차 문에서 기척이 들렸다.

똑똑-.

“저하.”

아르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나방 들어오니까 얼른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아르와 함께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페일이었다.

“뭐야, 둘이 같이?”

“예.”

참으로 묘한 조합이었다.

“어쩌다? 마차 밖에서 양쪽이 아주 잘 싸우길래 번갈아 들어올 것 같더니.”

아까 마차 밖에서 내 호위대장과 밀렌이 한판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조용하던 것이 나중에는 어찌나 시끄럽던지, 유모가 나가서 한마디 해야겠다고 하는 것을 내가 저들끼리 알아서 서열 정리 하게 놔두라고 했다.

어차피 조만간 그들의 관계는 글로렌스와 레이하임의 관계와 똑같아질 거다.

“레이하임 경, 황제 폐하의 호위대장은 그대들의 존재를 알고 있나요?”

“글로렌스 경이요? 당연히 알지요. 그들이 양지에서 폐하를 호위한다면 우리는 음지에서 폐하를 호위하니까요. 따로 대화한 적은 없지만, 서로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아이고, 의미 없다. 정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살짝 걷어 두었던 커튼을 완전히 쳐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붉은 빛이 희미하게 새어들어 마차 안에서 일렁거렸다.

나는 옅게 비치는 아르와 페일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로들 못 믿겠다고 해서 같이 들어오기로 합의를 봤군.”

“예. 단장 말로는 근무 시간표도 양측이 각자 짜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르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럼 내 호위대장님과 트리샤(밀렌의 성姓) 경 성격 보면 뻔하지, 뭐. 페일은 막내라고 가서 간 좀 보고 오라고, 뭐냐…… 속된 말로 짬 맞은 거고. 아르는 황태손의 예동님이 가서 기선 제압 하고 오라고 보냈겠지.”

별다른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잘나셨어.”

나는 혀를 한번 차고 침대에 누웠고 아르와 페일은 마차 양쪽에 달린 문 앞을 각자 지켰다.

마차 밖도 슬슬 조용해지고 잠이 들락 말락 할 즈음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네 자리였어.”

페일이 말했다. 마차 안에서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순간 다가오던 졸음이 싹 달아났다.

맞다. 페일이 가진 저 자리는 내 계획대로라면 아르의 것이었다.

그리고 견습 기사 중 실력대로 호위를 선발하겠다던 공식적인 발표까지 하고 뽑았던 상황. 거기서 그 당시의 견습들은 전부 머릿속에 아르의 독무대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페일의 말을 들은 아르가 대답했다.

“알아.”

객관적인 사실을 긍정하는 것처럼 담백하고 평온한 말투였다. 마치 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르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페일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 거면 됐어. 네 탓 아닌 거 알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묘했다. 사이가 나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것 같았다.

“황후 폐하께서…….”

페일이 서두를 열자 아르의 만사 귀찮아하는 듯한 한숨이 들린 것 같았지만 일단은 무시하자.

“나에게 유리하도록 대진표를 만져 준다고 했었어. 그런데 아무리 대진표를 만져도 너는 못 이길 것 같더라.”

빼꼼 실눈을 뜨고 바라보자 옅은 횃불에 비친 둘의 얼굴이 보였다. 마차의 출입문에 등을 기대고 앉은 두 사람의 표정이 빛을 받아 붉게 스쳤다.

처연한 웃음이 닮은 듯 닮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 하기가 무섭게 밤이 되자마자 네가 다쳤다더라고. 연습하다 팔이 베였다나 잘렸다나 뭐라나? 난 안 믿었어. 말이나 되냐? 우습잖아. 견습 기사단의 원탑이라는 애가 혼자 있다가 검이 미끄러졌는데 하필이면 공중으로 솟았다가 그게 또 하필이면 팔로 떨어진다는 게…….”

그의 입에서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이 흘렀다.

“하, 나중에는 네가 돌아오지 않고 출궁했다고 하니까 사실은 팔이 잘린 거라는 소문까지 나더라. 그래서 여태 난 황후 폐하께서 널 쫓아낸 줄 알았어. 날 여기 꽂아 넣으려고.”

“그래서, 내가 황궁에 멀쩡히 잘 붙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의 짐은 좀 덜었어?”

페일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저하의 검술 예동이라니 네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면서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내 부정을 합리화하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는 다 우리 가문이 줄을 잘 대서 높으신 분들이 나를 잘 봐주신 거라고 그러셨는데, 난 그딴 비겁한 걸 바란 적 없어. 명예? 정의? 하, 하하! 이런 더러운 기사 작위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마차 안을 맴돌았다.

“황후가 쫓아낸 거 아니니까 그 부분은 마음의 짐을 덜어도 좋아. 그리고 대진표 조작은 황후 폐하의 짓이 맞는데, 나를 저하의 호위로 쓰지 않은 건 황제 폐하의 뜻이었어.”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페일은 고개를 들어 아르를 쳐다보았고 아르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그나저나 다행이네.”

“뭐가?”

“황후는 네가 자신의 편인 줄 알 테니까.”

아르는 페일이 더는 자신에 관해 묻지 않도록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황후가 너를 여기 꽂아 넣어서 뭘 하려고 했을지 잘 생각해 봐. 네 아버지가 가져다 바친 금은보화가 체리에 후작가의 눈에 차기나 할 것 같아? 그런 황후가 너를 이 자리에 거저 넣어 주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럴 거면 차라리 널 꽂아 넣지 왜 날 넣어?”

‘그건 그렇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수 있지.’ 나는 나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락 이불 소리가 나자 둘이 나를 힐끔 돌아보았고 나는 그대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여기서 과연 아르가 무슨 대답을 할까 귀 기울였다.

아르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눈을 맞추었다. 사실 어둠 속에서 실눈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잠에서 깼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계속 눈만 질끈 감았다가 조그맣게 실눈을 뜨는 순간 눈이 마주치길 반복했다.

그러다 한참 후에 아르가 나를 쳐다보며 페일에게 말했다.

“나야 모르지. 본질은 이거야. 황후는 네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너는 황후 편이 되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럼 확실히 정해.”

“뭘?”

“아버지가 정해 준 줄 잡고 가지 말고 황태손 라인을 타. 저하께서 널 적으로 간주하기 전에. 황후는 조만간 너를 황태손과 호위기사의 염문설에 이용하고 가문째로 버릴 생각이니까.”

“저하는 아직 한참 어린데 무슨 염문설……! 아니, 이거 확실한 거야? 그보다 나한테 이거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너 나 싫어하지 않았어?”

“전혀. 그냥…… 한때 견습기사단에서 한솥밥 먹던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전우에게 베푸는 선의랄까.”

***

라파트니 공국과는 협곡 하나를 두고 맞닿아 있는 국경 도시, 몰딘. 한때는 남작령이었으나 지금은 황제가 황자에게 하사한 땅이니 조만간 못해도 백작령이다.

제국 중심부의 황도에서 변경까지 수일에 걸친 여정에 사절단 모두 녹초가 되었으나 이제 겨우 절반 왔을 뿐이다. 보르데넨 협곡을 지나면 지금까지 왔던 것만큼 더 가야 한다.

변경의 유서 깊은 영지인 만큼 고성은 운치 있었고, 몰딘 남작이 쌓았던 부를 증명하듯 그 고성을 중심으로 새로 올린 영주성은 거대했다.

우리 일행이 영지로 들어섰을 때, 우리를 마중하러 온 사람은 숙부가 아니라 제론 자작이었다.

방으로 안내받는 동안 프란츠 공작이 물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야만족들이 너무 끈질기게 약탈을 해대는지라…… 지금 지휘초소에 계십니다.”

‘그 숙부가?’ 설마 황후가 여기 오거든 엉뚱한 데 가지 말고 지휘초소에만 있으랬다고 설마 프란츠 공작까지 왔는데 거기서 꼼짝 않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생각해 놓고도 너무 신빙성 있어서 순간 소름이 돋아 버렸다. 그러자 프란츠 공작이 물었다.

“저하, 추우십니까?”

“아뇨, 그냥…… 성이 너무 거대한데 볼 것은 없으니 허해서요.”

내가 대충 둘러대자 제론 자작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몰딘 남작령 시절에 이곳에 왔을 때는 온 복도가 화려한 예술품들로 가득했답니다. 그때는 이리 허하지 않았지요. 이제 황자 전하께서 이곳의 주인이시니 곧 무언가 들어차긴 할 겁니다.”

“그렇게 돈이 많았으면 야만족 경계할 궁수 탑이나 더 쌓을 것이지.”

“과장 좀 보태서 궁수 탑은 물론 저 넓은 농토를 전부 둘러쳐 성벽을 쌓고도 남을 돈이었지요. 그러잖아도 일전에 황자 전하께서 성벽을 올려 버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제론 자작이 겉으로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소탈한 웃음에서는 숙부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는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얼결에 황실의 골칫덩이를 떠맡은 제론 자작이 불쌍하기도 하여 조금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돈이야 그렇다 쳐도 그 성벽을 다 쌓도록 야만족이 퍽이나 놔두겠군요.”

“허허허, 그래서 못 하는 겁니다. 너무 넓고 무엇보다 지반도 약한 부분이 많고……. 설령 친다고 하더라도 너무 길어서 유지 보수 할 돈도, 그 긴 성벽에서 경계를 설 병사들 머릿수도 부족할 겁니다.”

나는 좀 더 숙부를 돌려 까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제론 자작이야 숙부의 멍청함을 이미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고, 프란츠 공작도 말은 하지 않지만 숙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 터였다.

여기서 내가 더 입을 열어 봤자 숙부 뒷담화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프란츠 공작에게 가벼운 인상이나 주기 쉬울 터다.

프란츠 공작은 아군으로 얻기는 힘들 사람이지만 적어도 친하게 지낼 수는 있다. 굳이 뒷담화를 주도하는 행동을 해 좋을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일단 공작에게 잘 보이기로 했다.

“공작님.”

“예, 저하.”

“우리 조금 있다가 숙부님을 좀 뵈러 갈까요?”

“저야 왔으니 전하를 알현하러 갈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같이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오시면 인사 나누시지요. 힘드실 텐데 쉬시고요.”

“야만족이 잘 보이는 곳에 올라갈 겁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 좀 비추는 거 어렵지 않잖아요. 제 호위를 명목으로 기사들을 몇몇 차출해서 함께 올라가 잠시 전망 좀 구경하고 오죠.”

그 순간 프란츠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생각이랄 게 뭐 있나요? 겁이나 좀 주려는 거죠.”

“그럼 기사단을 하나 잠깐 보내시면 됩니다.”

“그냥 냅다 보내면 불만이 생길 것 같아서요.”

고작 야만족에게 나가서 검을 휘두르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비추러 가라고 하면 명색이 황궁 기사인데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닐 터였다. 하지만 황태손의 호위를 한다고 하면 그건 좀 멋있어 보이지 않은가.

이건 사람의 기분과 사기 문제다. 같은 일을 해도 기꺼이 하느냐와 싫어 죽겠는데 억지로 하느냐는 일상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꽤 중요한 문제라고 밀렌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맞는 말 같았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의 충성도를 관리하는 건 내게도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란츠 공작이 내게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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