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냥 가고 싶다고 하면 될 줄 알았지만 역시 고모님은 만만치 않았다.
공국에 가서 레이하임의 행방도 조사해야 하고 밀렌이 데려온 그 여자에게는 가는 길목에 있는 보르데넨 협곡을 보여 줘야 한다.
정말 할 것이 많은데 일단 가는 것부터 쉽지 않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끄응-.”
“앞으로도 공국에 갈 기회는 많아요. 조금 더 크면 그때는 힘들고 질려서 가기 싫어도 가야 할걸요?”
유모가 내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난 당장 가야 한다고.”
“아이고, 고집 피운다고 될 일이 아니랍니다.”
고집이 아니라 진짜로 지금 당장 아니면 안 된다고!
내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자 유모는 어린애가 벌써 이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며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때 잔느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뭐가?”
“황태녀 전하의 목소리가 뭐랄까? 묘한 뉘앙스를 좀 느꼈어요.”
내가 고모님께 공국에 가보고 싶으니 사절단에 넣어 달라고 졸랐을 때는 내 곁에 잔느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황궁 안에서는 늘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가 이따금 내가 짚어내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곤 했다.
잔느가 내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황태녀 전하께서는 저하를 공국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내게 조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하셨지요.”
“그게 그거 아니야?”
“바꿔 말하면 황태녀 전하가 아니라 다른 분께 조르면 해결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를테면…….”
“할바마마라든가!”
“그거예요. 예쁘게 꾸미고 가볼까요?”
잔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
그래, 어쩐지 이상했어.
지금 할바마마는 국정을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의 업무 대행은 황태녀인 고모님이셨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무역 사절단의 대표가 외교부 수장인 프란츠 공작이 아니라 볼테르 숙부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황후의 등을 후려쳐도 세 번은 더 후려칠 수 있는 이 상황에 갑자기 숙부 얼굴에 금칠해 준다니!
분명 황후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다. 그런고로 표면적으로는 고모님이 사절을 직접 꾸려서 황자를 대표로 보내는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세는 황후였던 거겠지.
그렇다면 둘 사이의 거래를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무시할 수 있는 할바마마를 꼬신다!
할바마마의 침실에 도착해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외교부의 프란츠 공작이었다. 프란츠 공작은 제국의 네 공작 중 가장 중립적이었다. 더 큰 권력보다는 절대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이 가문을 오랫동안 유지한 비결이었다.
‘지난 생에서는 내가 볼테르 숙부의 편을 들자마자 프란츠 공작과 그의 가솔들이 황도 생활을 정리하고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공작령으로 떠났지.’
프란츠 공작과 할바마마는 라파트니 공국으로 보낼 사절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공작의 모습은 아파서 황도 생활까지 청산하고 영지로 내려가 틀어박힐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볼테르 숙부만 아니었다면 사절단을 직접 이끌고 라파트니 공국으로 가서 말로만 허브를 강탈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근처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는 할바마마의 말씀대로 얌전히 앉아 있다가 프란츠 공작이 방문을 나서는 순간 외쳤다.
“저도 공국에 갈래요. 보내 주세요!”
***
제론 자작은 마음속으로 울면서 공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 상대는 황자다. 자작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당장 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으면 시골 영지의 촌구석 귀족에서 벗어나 황도 귀족으로 진출하는 것도 꿈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게 몇 년이나 갈까.
그동안 도통 황도에는 연이 닿지 못해서 에오넬 황태녀 라인을 탈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볼테르 황자라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싶지는 않아서 숨죽이고 살았건만!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옆 동네 남작이 초대형 사고를 쳐서 바로 이웃 영지가 황제 직할령이 되질 않나, 갑자기 황실의 문제아로 찍힌 황자가 여기로 온다질 않나, 그러더니 당분간 황자를 보좌하라며 황제의 칙령까지 내려왔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옆 영지’라는 이유 단 하나 때문이었다.
‘젠장. 젠장, 젠자아앙!’
그렇게 한참 황자를 따라서 공국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주인 나리!”
“들어와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인이 달려 들어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리, 이거 일이 커지게 생겼습니다.”
“뭐가?”
“프란츠 공작님도 가신답니다.”
자작은 코를 찡긋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생각보다 거물이 오시네.”
하긴, 황실이 황자를 이런 지방 영지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내 놓고 이런 큰일을 그냥 맡길 리 없지. 그래서 황자는 얼굴마담이고 실무자로 최소 백작급 이상이 올 줄은 알았지만 설마 외무대신인 프란츠 공작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골치 아팠다. 프란츠 공작은 철저한 중립이고 안전을 추구하는 실리주의자다. 그는 황실의 권력 다툼에 얽히는 것을 피했고 그런 만큼 조금 잘 보이는 정도로는 쉽사리 공략할 수 없는 상대다.
단순히 공작에게 잘 보일 수 없다면 차라리 포기해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번에 황자가 그를 보좌로 지목해 동행하겠다고 말한 이상 그것도 어림없다. 황자가 아주 자그마한 사고라도 치는 날에는 자신이 함께 뒤집어쓸 수도 있다.
잘 보이기 어려운 것과 반대로 밉보이기는 매우 쉽다는 말이었다.
뭔 짓을 하든 득이 될 건 하나도 없고 실만 가득하다. 아니,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황자가 사고를 치는 순간 재수 없으면 몰딘 남작 꼴이 날지도 모른다.
“와, 환장하겠네. 몰딘 남작, 그 양반은 자기가 잘못한 거니 억울하지라도 않지.”
“아이고, 나리. 더 있습니다.”
“뭐가?”
“프란츠 공작 나리께서 직접 오시는 이유가…….”
하인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손 저하의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폐하가, 아니 폐하께서 황태손 저하를 보내신답니다. 프란츠 공작님은 저하를 교육하러 오는 거고요.”
일개 자작은 이제 감히 입도 뻥긋 못 할 정도로 판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작은 환승 각을 쟀다.
‘아예 황태손 라인을 찔러 봐?’
***
키옌은 속이 쓰렸다.
에오넬은 분명 볼테르를 사절단 대표로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갑자기 그 일행에 황태손이 끼어든 것은 약속 밖의 일일 뿐만 아니라 에오넬이 한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이었어.’
황태손이 돌연 자기도 보내 달라고 황제에게 조른 것도 우연이었고. 마침 그걸 본 프란츠 공작이 후계자 수업이라 생각하고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첨언한 것도 우연이었다.
필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에오넬이 부탁을 했다 치더라도 프란츠 공작이 그대로 움직여 줄 리 없다. 그는 황제에게는 좋은 신하이긴 하지만 황자와 황녀의 황권 다툼에 참견하는 것만큼은 극도로 꺼렸다.
그러므로 그가 라파트니 공국에 자신도 가겠다고 끼어든 것은 그저 황제가 아멜리아 황태손의 후계자 교육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키옌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이 몹시 썼다.
***
드디어 사절단 출발 당일이 되었다.
내부에 침대까지 있는 초장거리 8두 마차가 황궁 문밖을 벗어났다. 이런 으리으리한 마차 안에 유모와 단둘이라니 넓어도 너무 넓어 휑하기까지 했다. 반대로 바깥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빼곡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사절단과 사절단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줄지어 궁에서 성곽까지 이어진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 사절단을 구경하려고 4층 건물 창문까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창문 밖으로 보였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들은 이 사절단 일행 중 가장 화려한 나의 마차를 향하고 있었다.
마차 창문 밖, 맞은편 건물의 3층 즈음에서 내다보던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내 마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옆에서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황급히 아이의 팔을 잡아 내리며 얼른 고개를 눌러 숙이게 했다.
“윽!”
나는 괜히 내다봤나 싶어서 얼른 커튼을 치고 고개를 돌렸다.
“왜요, 저하?”
유모가 물었다.
“너무 부담스러워.”
“협상은 공작님과 황자 전하께서 하실 거예요. 저하께서는 그냥 구경하러 가시는 거니까 부담스러우실 건 없어요. 그럼 이쪽은 어때요?”
유모가 내 등을 토닥이고는 반대쪽 커튼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난 별로…….”
그러나 이미 유모의 손은 커튼을 반이나 열어 버린 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짠! 보세요, 저하께서 총애하시는 예동이에요.”
내가 부탁한 대로 할바마마께서는 이번 일정이 역대 최장 거리에 공식적인 해외 순방 일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호위를 늘려 주셨으나 그것이 마냥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기존의 호위기사들이 할바마마 앞에서는 티 내지 않았으나 뒤로는 꽤 많은 불만을 토로했다. 갑자기 이렇게 결정해 버리면 자신들은 뭐가 되느냐, 어느 기사단에서 데려오는지도 왜 말씀을 안 해주느냐 등등.
물론 그런 불만은 내 검술 예동이 들어온다는 소리에 쏙 들어가 버렸다. 아르를 비롯해 전부 섀도 나이트들로 은근슬쩍 끼워 넣었는데 이렇게 쉽게 조용해질 줄은 몰랐다. 물론 내 앞에서만 그런 것 같지만.
아마 저들끼리는 텃세도 부리고 밀려나지 않으려 기 싸움도 좀 하는 등의 마찰은 있을 거다. 그래도 뭐 어때? 내 앞에서만 쫑알대지 않으면 그만이지.
밀렌이 말하길 원래 직장생활이란 게 그런 거고 이 정도 막무가내 인사이동이 있는데 텃세 정도로 그치는 거면 귀여운 수준이라고 했다.
‘그래도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감히 내 예동을 건드리진 않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다른 섀도 나이트들은 뭐, 알아서 하겠지.
유모는 커튼이 창을 가리지 않도록 가지런히 모아 묶었다.
“총애는 무슨.”
나는 유모의 말에 뒤늦게 대답하며 시큰둥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덩굴처럼 장식된 금색 창틀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절도있게 행진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것 같은 장면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마치 데자뷔 같았다.
지난 삶에서 고모님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날은 무슨 축제인지는 몰라도 황도에서 큰 축제가 벌어져 고모님과 함께 황도의 중앙대로를 마차로 행진했었다.
내 마차의 창문 옆에는 그가 있었다. 실용성이라곤 없는 공식행사용 새하얀 정복이 유난히 빛나는 날이었다.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마차 안의 나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의미였구나…….’
그때는 눈이 마주쳤다는 것이 그저 반가워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환하게 웃어 답했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
“커튼 쳐줘.”
“아휴, 괜히 그러신다. 저번에 기사님들이 호위도 동료끼리 손발이 맞아야 한다느니, 새로운 사람들에게 일 가르쳐 가면서 해외 출장은 말도 안 된다느니 했을 때 말이에요. 저하께서 예동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하셨다면서요?”
유모가 커튼을 치기는커녕 보란 듯이 커튼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사람 막 뽑은 거 아니냐길래 내 검술 예동이라고 알려 줬을 뿐이야.”
“그게 그거죠. 벌써 시녀들 사이에서는 저하께서 검술 예동을 총애하기 때문에 감싸 준 거라고 소문이 났답니다.”
“내 자존심 때문에 감싼 거니까 잔느에게 말해서 입단속 시켜. 괜히 나 사교계 데뷔하는 날부터 염문설처럼 쓸데없는 소문 나게 하지 말고.”
고개를 돌렸어도 여전히 그 특유의 슬픈 듯한 웃음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익숙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