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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99화 (99/148)

99화

“그러니까 8년 전이었어요. 날짜까지 기억해요. 왜냐하면 전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서 돌아가신 날이거든요.”

시즈라는 이름의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보르데넨 협곡 근처에 있었다고?”

전 황태자 부부, 그러니까 부모님의 마차 사고가 났던 장소였다. 협곡에서 바퀴가 망가져 수리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 위로 산사태처럼 바위가 무너져서 좁은 협곡을 지나던 사절단을 덮쳤다.

그리고 목격자는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가 마부였지만 그는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어 그날의 사고를 증언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목격자가 더 있었다니.

내가 놀라 밀렌과 옆에 앉은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그곳이 보르데넨 협곡인지 확실하진 않아요. 바깥이 보이지도 않는 짐 상자 속에서 이동해서 멀미를 종일 했거든요. 별장에 갇힌 뒤로는 외출도 못 했고요. 그래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 근거는?”

“저와 로엔은 남작의 별장에 갇혀 살았어요. 남작은 우리를 그곳에 가둬 놓고 잘 찾아오지 않았죠. 그는 저처럼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이나 눈을 가진 여자 노예를 수집하는 이상한 취미가 있었거든요.

너무 심심한 나머지 제 취미는 창문 밖으로 하늘을 보면서 내일의 날씨는 예상하는 것이 되어 버렸죠. 제 기억 속 별장의 기후가 몰딘 지방의 기후와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확실히 시즈의 반짝이는 은발과 하늘색 눈동자는 몹시 독특하고 신기했다. 어떤 점에서 변태 남작의 수집욕을 자극했는지는 대강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혐오스러웠다.

“남작의 취미는 대강 알고 있어. 그리고 고작 날씨 기억하는 정도로는 범위를 특정하기 힘들어. 객관적이지도 않고.”

남작의 취미는 남작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거였는데 참 악취미였다. 아르가 말하길 내가 특이한 모양의 실링 스탬프나 예쁜 색깔의 실링 왁스를 모으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했다. 도대체 이런 고상한 취미와 그의 변태 같은 수집벽이 뭐가 같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른 근거는?”

“어쨌든 우리가 갇혀 있던 남작의 별장은 어떤 절벽 위에 있었어요. 창문으로는 맞은편에도 길게 절벽이 보였으니까, 무슨 협곡인지는 몰라도 협곡은 맞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호위를 붙여 주겠다. 직접 보르데넨 협곡에 데려가서 맞는지 확인해 보면 돼. 별장이든 그 흔적이든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넌 거기서 뭘 봤는데?”

“그 사고가 있던 날 밤, 몇 시인지 모르겠지만 한참 잠을 자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쾅! 하고 엄청나게 커다란 소리가 들렸어요. 그렇게 큰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봤어요. 심장까지 욱신거릴 정도였거든요.”

시즈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거릴 때마다 찻잔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소리가 끝이 아닐 텐데?”

사고 기록에는 바위 더미가 무너졌다고 쓰여 있었다. 그 소리가 그저 ‘쾅!’ 하고 끝날 리 없다. 내 질문에 그녀가 아까보다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네. 그 소리가 나고 바로 그것보단 조금 작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큰 소리가 연이어 들렸어요. 그러면서 지진이 난 것처럼 계속 건물이 흔들렸어요.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남작이 보냈다는 사람이 왔어요. 그러면서 밤사이 지진이 났는데 수집품이…… 그러니까 우리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고 했죠. 이상했어요.”

“뭐가?”

“그보다 더 전에 우리 중 누군가가 이렇게 노예로 평생 살 수 없다면서 별장에 불을 질러 노예들이 여럿 죽었을 때도 사람을 보내 확인하는 데 나흘이나 걸렸거든요.

그런데 지진 좀 났다고 득달같이 사람을 보내다니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은 별장에 있던 우리들을 전부 팔아 버렸어요. 그것도 제국의 불법 노예상이 아니라 공국의 공식 노예상에게요.”

확실히 의심스러운 정황이긴 하다.

“밀렌, 그날 제국 내에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규모로 큰 지진이 일어난 장소가 있는지도 조사해. 있다면 근처에 협곡이나 협곡으로 착각할 만한 지형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그걸 제가 조사해요?”

밀렌이 마시던 홍차를 내려놓고 사레가 들린 듯 캑캑거렸다.

“그럼 내가 이걸 그대들에게 시키지 누구한테 시킬까? 단원들 업무 배정이 단장의 일이라며.”

“아! 그럼 아르 시킬게요.”

“맘대로. 그리고 그때 남작에게서 공국의 공식 노예상에게 팔려 간 노예들도 추적해. 남작의 노예들은 전부 신분을 한번 세탁한 노예들이었어. 그렇다면 공국에는 합법 노예로 기록되어 있을 테니 노예 매매 서류가 자세히 남아 있을 거다. 공국에 등록된 위장 신분을 이용해서 발견하는 족족 사들여. 중요한 증인이니까. 돈은 얼마가 들든 대주겠다.”

“노예를 밀수입하신다고요? 불법인 건 아시죠?”

“알고 있으니 너희에게 시키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남은 홍차를 마저 마셨다.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돈은 세르피스 후작가를 통한다면 구할 수 있다. 외할아버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을 만들어 내실 거다.

“뭔가 짚이는 게 많으신가 보네요.”

밀렌이 히죽 웃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들렸다는 그 ‘쾅’ 소리가 폭음이라면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사고는 아닐 거다. 그리고 그 정도 규모의 지진은 두 번에 걸쳐 오는 게 일반적이야. 전조 증상이 먼저 있고, 후에 오는 여진이 보통 피해가 더 크지. 게다가 이 여자의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니라면 처음 들었다는 그 커다란 ‘쾅’ 소리도 전혀 지진의 양상이 아니거든.”

“남작 뒤의 더 큰 세력이 그걸 은폐하려 했다는 거군요.”

밀렌이 고작 사람 하나를 10년 가까이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밀렌 정도면 알아서 찾겠지 하며 놔두었던 할바마마가 결국에는 섀도 나이트를 동원해 잠깐 도왔을 때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고 했다.

무려 황태자 부부를 사고사로 위장한 사건에 얽혀 있었으니, 아무리 섀도 나이트라도 어중간한 추적으로는 그 냄새도 맡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홍차를 더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부르는 종을 울리려던 찰나, 은발의 여자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로엔을 찾는 거라면 로엔은 팔리지 않았어요.”

“그럼?”

“그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 사라졌어요. 사라지기 전날 ‘남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건 지진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곧 우리들을 모두 죽일 거라고. 마치…….”

“마치?”

“그날 밤, 창밖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았어요.”

***

몰딘 지방은 북동쪽으로는 라파트니 공국과 이어지는 협곡이 있고 북서쪽 국경에는 약탈을 주업으로 삼는 야만국이 인접한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꽤 험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말이 황제가 아들에게 출가 선물로 하사한 땅이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멀쩡한 황자에게 줄 땅은 아니란 말이었다.

초봄의 건조한 바람이 성곽을 훑었다. 내성 망루 중 가장 안쪽에 있는 지휘관 망루에는 볼테르와 몰딘 지방의 섭정, 제론 자작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볼테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냥 저기에다 이렇게 쭈욱 성벽을 높게 쌓아 버리면 안 되나?”

제론 자작은 옆에서 귤을 까먹으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볼테르를 보고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골 때리는 놈이네.’

말이 되는 소리냐며 한 소리 늘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성벽을 쌓는 것도 오래 걸릴 것이고 그만큼 돈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길이의 성벽을 쌓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야만족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설령 돈과 시간이 있다고 해도 효율이 많이 떨어지고요. 지금처럼 외성 성벽에서 불화살 좀 쏘고 쫓아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밭이 좀 약탈당하긴 하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낫다. 밭에 불을 지르면 다음 해에 좀 더 비옥해지는 것도 장점 아닌 장점이었다.

야만족도 적당히 밭의 작물만 약탈하고는 물러난다. 그들도 목숨은 아까울 테니까. 서로 큰 출혈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주고받는 것이다.

“그럼 그냥 싹 다 밀고 죽여 버리면 되잖아.”

아무리 야만족이라도 군대를 동원해 밀어 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국제적인 비난도 감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인근 영지민을 징병하는 과정에서 사나워질 민심도 걱정해야 한다.

물론 야만족을 먼저 침략한다면 볼 것도 없이 대승을 거두긴 하겠지만 그만큼 이쪽도 전사자들이 반드시 나올 거다.

“우리에겐 그다지 아쉽지 않은 작물입니다. 어차피 우리도 어느 정도 빼앗길 건 예상하고 농사를 짓는 거니까요. 고작 작물 몇 포대가 사람의 목숨만 하겠습니까?”

제론 자작은 옆 동네, 자신의 영지 쪽을 쳐다보았다. 바로 옆 동네라는 이유로 임시 섭정으로 지목당한 것도 서러운데 몰딘보다 더한 놈이 오다니!

몰딘 남작이 인성에 좀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볼테르처럼 멍청하지는 않았다.

‘황자가 왜 유배를 왔는지 알겠군.’

너무 멍청해서 황제의 미움을 샀거나, 너무 멍청해서 황태녀에게 당했거나, 둘 다거나.

제론 자작은 요 며칠 볼테르만 관찰하면서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황도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황태녀 쪽에 줄을 서야 하나?’

여자라는 이유로, 여황제의 전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녀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제론 자작이 보기에 황태녀의 약점은 ‘사회적 편견’ 딱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초의 여황제라는 것은 잘만 하면 장점이 아닌가. 최초라는 타이틀은 확실히 임팩트가 크니까.

그때 기사 하나가 망루 계단을 올라 볼테르에게 다가와 커다란 종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황궁에서 온 임명서입니다.”

“웬 임명서?”

봉투의 주둥이에는 황금색 자잘한 펄이 섞인 실링 왁스가 발려 있었고 그 위에는 황제의 실링 스탬프의 문양이 선명했다.

“아바마마께서?”

그는 서둘러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그걸 읽던 볼테르는 제론 자작을 쳐다보곤 말했다.

“라파트니 공국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임명서라는 종이는 볼테르를 사절단 대표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함께 온 서찰에는 곧 사절단이 몰딘 지방을 통과할 예정이니 그때 사절단에 합류하여 바로 출발하라는 말과 함께 안델루아 허브의 수입을 최대한 유리하게 협상해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볼테르에게서 그 내용을 듣는 순간 제론 자작은 황궁에 대고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드디어 이 머저리가 떠나는구나! 이제 자유다.’

그 순간 볼테르가 울상을 지으며 제론 자작을 돌아보았다. 자작은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불길함은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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