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곧 제국에 남아 있는 안델루아 허브가 바닥난다. 지금 제국의 안델루아 허브 수요는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곧 대량 수입을 위해서 사절이 파견될 거다.
“곧 라파트니 공국에 사절을 보낼 것 같으니 그때 가도록 준비해 둬.”
그때 밀렌이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그건 볼테르 황자님이 간다고 합니다.”
“진짜? 그걸 어떻게 알았어?”
“폐하께 들었어요. 정신이 드신 이후로는 제가 가서 뵙고 있거든요.”
할바마마든 고모님이든 숙부에게 무언가 직책을 맡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의외라뇨? 저 이래 봬도 단장입니다! 어지간한 제국 내 정보는 다 꿰고 있다고요.”
나는 잠시 밀렌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고민하다가 이내 우리 의사소통에 아주 작은 오해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대가 찔리는 게 있긴 한 걸 보니 양심은 남아 있구나.”
***
황궁 밖에서는 전염병으로 난리가 나고 황궁 안에서는 내 부모님을 누가 죽인 거네 아니네 흉흉한 소문이 도는 요즘. 나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한동안 내 궁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평화로운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이 깨진 건 어느 날 아침 일찍, 아르가 밀렌의 편지를 들고 몰래 찾아왔을 때였다. 오후에 시간 비는 거 알고 있으니 나오란다.
황태손 스케줄까지 첩보 대상이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살짝 나쁠 뻔했지만 사실 일정이 없다는 것이 아주 비밀인 것은 아닌지라 그러려니 했다.
그보다 황태손을 오라 가라 하다니 한동안 내가 많이 봐준 건가?
심지어 나오라는 곳이 황궁 밖, 로즈벨리아 거리의 어느 카페였다. 다행인 건 가벼운 나들이를 핑계로 나오기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라는 점이다.
마차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카페로 들어갔고 예약한 개인실 앞까지 도착했다. 카페의 3층, 창문이 없어 전망도 좋지 않은 자리였다. 요일도 시간도 몹시 애매한 데다가 가격도 매우 비싼 3층의 개인실은 밀렌이 예약한 한 칸 빼고는 전부 빈방이었다.
나를 따라 올라온 호위기사가 유일하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밀렌이 아주 살짝만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밀렌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눈 다음 호위기사를 향해 뒤돌아 말했다.
“아는 사람이다. 확인했으니 됐지? 이제 가봐.”
내가 호위기사를 데려왔다는 것을 안 밀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 호위기사가 밀렌에게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인지 신분을 알아야겠습니다.”
“할바마마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고지식한 호위기사는 도통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교대로 근무하는 내 호위기사 중 이 기사님이 있을 때는 어지간하면 계획 없던 외출을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몰래 나가지도 않았다. 내가 잘 있는지 한 시간 단위로 확인했다. 사실 한 시간 단위로 확인하는 게 FM대로 맞긴 맞는데 실제로 누가 호위를 그렇게 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밀렌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게 아무 때나 불러내지 말라고.’
아르를 통해서도 시간과 장소는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지 않았던가.
곧 밀렌은 내 호위기사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꺼내 보였다. 바로 황궁 소속 기사단의 단장 증명 패. 황궁 기사단의 무늬 위로 각 기사단의 고유 문양이 덧그려진 패 아래로 단장을 상징하는 줄이 네 개 새겨져 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기사들은 황궁에 있는 수많은 기사단의 세세한 문양까지 전부 외우지 못한다. 하지만 내 호위기사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처음 보는 기사단입니다. 무슨 기사단의 단장입니까.”
그때 육식 토끼 기사님의 눈이 빨갛게 빛났다. 그는 대답 대신 귀찮다는 듯 호위기사를 향해 말했다.
“그럼 황제 폐하께 보고해 보든가.”
“예?”
“못 들었나? 폐하께 보고하라고. 호위기사단 단장에게 보고하여 말씀 올리든 저하가 폐하께서 안다는 기사를 은밀히 만났는데 폐하는 알고 계시냐고 직접 말씀을 올리든 그건 알아서 하고. 다만 그랬을 때 벌어질 일은 알아서 책임지도록.”
분명 그만하라고 밀렌을 뜯어말려야 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나오는 살기가 숨 막힐 것 같아서 나는 슬금슬금 밀렌 뒤로 숨었다.
“저는 저하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고. 저하께서 누굴 만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법도에 맞습니다.”
“흠…… 법도라? 우리처럼 황궁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처음 입궁했을 때 듣는 주의사항을 기억하나?”
“…….”
호위기사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거슬리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밀렌을 올려다보았다.
“첫째, 윗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이상 하지 않는다. 일단 어느 기사단 소속이든 단장은 다른 기사단의 단원들보다 가장 계급이 높지. 고로 내게 이 이상 내 신분에 대해 질문하지 말 것. 그리고 둘째, 수상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 것. 그대는 날 수상히 여기고 있고 여기 자네의 윗분께서는 수상하지 않다고 했으니 자네는 응당 못 본 척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주의사항이라는 것도 있구나……. 법도라고 하지 않은 걸 보면 일종의 불문율인 것 같았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불문율.
생각해 보니 시녀들도 그렇고 다들 내게 비슷한 내용의 질문은 연달아서 세 번까지 한 적이 없다. 한 번, 그리고 재차 두 번째도 내가 함구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밀렌은 아무 대답이 없는 내 호위기사에게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가까이 서 있는 내게도 아주 간신히 들릴 정도로만 작은 소리였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자네는 훗날 황제의 호위기사가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모르고 싶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길 거야. 그걸 벌써 알려고 하지는 마. 그리고 자네의 안전을 위해서 그 입이 무겁길 바라네.”
나는 이 이상의 긴장감은 더 버틸 자신이 없어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하고 그대는 내려가서 기다려. 우리는 들어가고.”
나는 내 호위기사님이 반듯하게 예를 갖추는 것을 지켜보다가 밀렌을 향해 말했다.
“야. 육식 토끼.”
“토끼는 초식인데요?”
나는 언제 살기를 풍겼냐는 듯 금세 온순해진 백금발의 가증스러운 토끼를 향해 눈을 흘겼다.
“너무 많이 알려 준 거 아니야? 내 호위기사를 암살할 생각은 아니지?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착실해서 마음에 들거든.”
“괜찮습니다. 저런 부류가 너무 고지식해서 그렇지 저하를 배신할 타입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 경고를 못 알아먹고 무시할 정도로 멍청한 타입도 아니고요.”
밀렌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더니 방문을 열었다.
방문 안에는 새하얀 은발에 하늘색 눈동자를 한 마른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내 옷을 입고.
“뭐야?”
그녀는 내가 아지트에 잔뜩 사다 넣어 놓은 가벼운 나들이용 드레스를 입고 얼굴이 잘 가려지는 털 달린 챙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멍해졌지만 곧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노예시장에서 사 온 여자구나.”
“맞아요.”
나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대가 찾던 사람은 아닌 것 같구나. 어쨌든 굳이 나에게 보여 줄 필욘 없는데?”
“보여 줄 필요가 있으니 불렀어요. 정말 우연히, 우리가 어떤 진실을 알게 될 것 같거든요. 일단 음료부터 주문하죠.”
밀렌은 문 옆에 달린 가느다란 새끼줄을 당겨 종업원을 불러 음료를 주문했고, 종업원이 홍차를 들고 들어올 때까지도 우리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한참의 정적, 손가락만큼이나 작은 모래시계 속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착각할 정도로 적막했다. 그렇게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고 밀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찻주전자를 들었다.
“그대의 손맛을 내가 믿어도 될까?”
이 숨 막히는 정적을 깨기 위해서 말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저놈이 찻주전자 잡는 방법부터 아주 글러 먹어 눈까지 거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럴 거면 종업원한테 알아서 마실 테니 나가라고 하지를 말았어야지.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밀렌이 들고 있는 찻주전자를 빼앗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에서는 완벽한 향이 풍겼다.
“영광으로 알거라.”
나는 자리에 다시 앉아 찻잔을 들어 코앞에 가져다 대고 잠시 숨을 크게 쉬었다. 내 눈앞에 앉은 은발의 여인은 나를 가만히 관찰하다가 쭈뼛쭈뼛 찻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와!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던 탄성을 급하게 멈추고 찻잔을 ‘달그락’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우연히 알게 될 것 같은 진실이 뭔데?”
“일단 제가 찾던 사람과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고요. 이 사람이 오래전에 남작의 성노예이던 시절에 머물던 곳이 아무래도 보르데넨 협곡 같아요. 그리고 그날, 8년 전의 그 사고가 터지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이 돌연 그 협곡의 별장에 있던 노예들을 모두 팔아 버렸다고 했어요. 그것도 제국 노예상이 아니라 공국의 노예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