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어둠 속에서 시선이 빤히 느껴졌다. 마주친 시선 끝으로 따뜻한 숨도 느껴졌다.
“농담으로 듣겠습니다.”
“칫! 재미없어.”
“그런 농담이 재미있었겠습니까?”
“농담으로 듣겠다면서 진담처럼 대하지나 말아라.”
“농담을 진담처럼 말하지나 마십시오.”
“그대가 농담이라고 한 것이지. 나는 진짜라니까?”
***
황권 다툼에서 패했을 때의 도주 자금.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터져 버릴 것 같던 심장은 머리가 안다고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농담이라 말해 준다면 진정될까 싶어 다시 물었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대답이 어째 원했던 대답보다 더 반가웠다. 모순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도망치는 상상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마치 그런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아져서 묘한 죄책감도 들었다.
그러니 결국엔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최대한 형식적인 대답뿐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게 할 겁니다.”
***
임시 노예 거래소는 황도에서 멀지 않은 숲속이었다. 우리는 그 거래소와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 마차를 세워 두었다.
나를 따라온 섀도 나이트의 호위는 꽤 됐지만, 거래소 천막 안까지는 나와 아르, 밀렌 이렇게 셋만 초대장을 내고 입장했다.
이렇게 암암리에 아는 사람에게만 초대장을 건네는 것으로 운영하는 이들의 방식 때문에 쉽게 들어오기 힘들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쪽으로 인맥이 없어도 돈만 많다면 초대장을 구하는 건 의외로 쉬웠다.
정보 길드의 VIP를 찍은 다음 돈을 왕창 쥐여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 길드의 VIP를 찍는 방법은 정말 별것 없었다. 그냥 꾸준한 거래면 충분했다.
그리고 섀도 나이트는 그 업무 특성상 사설 정보 길드의 정보를 구매할 일이 많았고 제국 내 난다 긴다 하는 여러 정보 길드들에 어지간하면 VVIP를 찍어 놓은 상태였다.
천막 안에 들어서서 밀렌이 앞장섰고 그의 옆을 내가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리고 아르가 우리 둘 뒤에서 조용히 따라다녔다.
철창에 갇힌 노예들을 보며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르가 내 귓가에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인상 펴세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십시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천막 안을 한 바퀴 다 돌아도 원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밀렌의 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로엔! 로엔!”
발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우리는 일제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철창 아래로 깡마른 사람의 손 하나가 불쑥 나와 있었다.
철창으로 둘러쳐진 상자는 흡사 짐승의 우리처럼 높이가 낮아 도저히 사람이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 노예 거래소의 대부분의 노예 감옥이 그러했다.
밀렌은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노예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살짝 고개를 숙여 철창 안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눈처럼 새하얀 은발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삐쩍 마른 몰골로 엎드려 있었다.
“로…….”
그녀는 밀렌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제 손을 철창 안으로 숨기고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밀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에 매달린 태그를 확인했다.
나는 밀렌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찾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 사죠.”
그렇게 “앗!” 하는 순간 밀렌은 내가 줬던 금화 1천 골드를 그 자리에서 써버렸다.
***
생각이 짧았다. 마차를 하나 더 대여했어야 했다. 황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르와 함께 말 위에서 달리고 있다.
나는 아르의 품에 안긴 채 안장 위에 달린 손잡이를 꽉 잡았다. 승마를 배우기는 했지만 역시 몸을 쓰는 일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배우려 해도 말을 타고 걷는 것은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달리는 것까지는 도무지 무서워서 할 수가 없었다.
“역시 난 승마는 그른 걸까?”
내가 고개를 돌려 묻자 아르가 내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괜찮습니다. 마차 타고 다니시면 됩니다.”
꾸준히 배우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역시 난 몸 쓰는 일은 글렀어.’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서 덜컹거리며 달리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마차 안에는 아까 밀렌이 충동적으로 사버린 노예가 자고 있다. 정확히는 밀렌이 기절시킨 것이지만.
조금 전, 밀렌이 값을 치르고 노예 거래소의 사람들이 그녀를 철제 우리 밖으로 끌어낼 때까지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그러자 밀렌은 아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시끄러운 노예네. 데리고 가기 편하게 좀 기절시켜 볼래?”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아르는 그녀의 뒷덜미를 가볍게 내리쳤고 그녀는 그대로 픽 쓰러졌다. 그리고 밀렌은 가볍게 내 입 앞에 제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마치 조용히 있으라는 것 같아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천 골드나 주고 산 거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아까 난 시끄러워서 저 여자가 하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너는 뭔가 들었어?”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 밀렌이 찾던 그 사람 이름인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밀렌’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어렸을 적에 함께 노예로 갇혀 있던 친구일 수도 있죠. 이따가 직접 물어보십시오.”
하긴, 밀렌도 노예 출신이라고 했지.
그렇게 우리는 밤새 달려 황궁으로 도착했다. 밀렌은 은발의 노예를 섀도 나이트 숙소까지 업고 갔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기상 시간까지 두 시간 남은 시간을 확인한 뒤 허겁지겁 잠이 들었다.
***
짹!
통통-.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조그맣게 들린 건 아침 식사가 끝나 갈 즈음이었다.
벨이 성큼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어머! 웬 비둘기죠?”
“그냥 둬.”
나는 조금 남은 후식을 입에 털어 넣었고 시녀들이 내가 먹은 식사를 정리하고 하녀들이 그 뒤를 청소하는 동안 발코니에 나갔다.
익숙한 비둘기였다. 섀도 나이트와 황궁 내에서 주고받는 편지를 전달하는 전서구.
할바마마야 같은 황제 궁 내에 섀도 나이트가 이용하는 은밀한 통로가 있다고 하지만 내 경우는 그게 아니니까.
“아침부터 웬…….”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돌돌 말린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딱 두 마디만 쓰여 있었다.
「레이하임. 연락.」
***
레이하임은 연락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섀도 나이트로 전서구를 보냈다. 그리고 섀도 나이트는 그 쪽지를 모아 일전에 내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전서구가 다리에 매달고 온 것은 종이가 아니라 찢어진 옷조각이었다. 그리고 그 옷조각에 적힌 내용은 피로 쓰인 서명이 전부였다.
짬이 생긴 즉시 혼자 섀도 나이트를 찾아온 나는 곧바로 중앙 회의실로 직행했다. 오자마자 만난 이에게 밀렌을 불러 달라 말했고 나머지는 그냥 만나는 대로 일단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회의실에는 밀렌을 포함하여 여섯 명이 모이게 되었다.
“오후에 일정이 있어. 시간이 별로 없으니 예는 생략하고 빠르게 이야기하도록 하지.”
“예.”
시원시원하니 좋군.
“레이하임에게 생존 신호가 왔다면서?”
“단장, 아니 전 단장한테서 말입니까?”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나 보네. 요점만 이야기하지. 그대들은 임무에 실패한 인원을 찾지 않는다고 했어. 그가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레이하임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생존을 알렸고.”
나는 피로 서명된 천 조각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의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헙!”
“이건 목숨만 간신히 달려 있다는 뜻이겠지?”
“그럴 겁니다.”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침울하게 답했다.
“레이하임은 그대들의 전 수장이야. 그렇다면 임무 중 실종자는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대들의 불문율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고. 그런데 왜 생존 신고를 했을까? 단순히 살아 있으니 구해 달라는 신호 같지는 않거든.”
긴장된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한겨울 바람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엔 레이하임이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이쪽에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곧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일전에 이들에게 거절당했던 안건을 다시 상정했다.
“그러니 지금 모인 이 인원이 라파트니 공국까지 나를 호위해. 그곳에 공식적으로 갈 명분은 내가 곧 가지고 오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