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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96화 (96/148)

96화

“설마 섀도 나이트 동원했습니까?”

“응.”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예상은 지나치게 큽니다. 남작이 노예를 여러 군데도 아니고 한 군데에서 대거 처분해서 도주 자금을 마련할 정도면 기본적으로 자금력이 상당하다는 겁니다.”

“알아.”

“그것도 그냥 자금이 아니라 급하게 세탁할 수 있는 현금만 해도 어마어마하다는 거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음…… 신중해야 한다?”

“잘 알고 계시네요. 설마 잠입해서 빼 오라는 건 아니시겠지요? 우리 둘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불법 노예를 취급하는 암시장인 만큼 후작가의 저택에 잠입할 때와는 경비 수준이 다를 겁니다.”

“무슨 소리야? 나도 일 크게 키울 생각 없어. 아무리 상대가 불법 노예 거래상들이라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선전포고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안심해. 그건 이다음에 황제가 되면 제대로 뿌리 뽑을 거야. 지금 사적인 일로 애매하게 들쑤셨다간 나중에 처리하기 더 힘들 거거든.”

“그럼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당연한 걸 뭘 물어? 가서 돈 주고 사 오면 되잖아.”

그 순간 아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저하…… 이거 불법인 건 알고 계십니까?”

나는 마구 찔리는 양심을 외면했다. 그렇게 아르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는 밀렌의 반응을 살폈다. 그 역시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치만 전 노예를 살 만큼 돈이 없는데요. 그렇담 역시 집을 팔아 버려야…….”

“잠깐! 이 집 내 거야!”

“무슨 소리세요? 제집입니다!”

“넌 이름만 빌려 줬잖아!”

“집 파는 데는 문제 없어요.”

이런 양아치……!

“거짓말입니다. 안 팔아요. 이거 잘못 팔면 배탈 날 것 같아요.”

밀렌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노예상의 리스트를 여러 번 접어 제 품에 집어넣었다.

“고마워요, 황손녀님.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응? 뭘 어떻게 알아서 하는데? 집 팔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밝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불안했다. 꼭 사고라도 칠 것만 같았다.

“그럼 혼자서 뭘 어떻게 해결하게? 돈도 없다며. 얼마나 필요한데?”

“황손녀님이 주려고요?”

밀렌이 키득거렸다. 그리고 나는 매우 진지하게 답했다.

“어. 얼마 예상하는데?”

“에이, 황실 어음은 증거가 남아서 안 돼요. 금화로만 거래해야 해요.”

밀렌이 손사래를 쳤다.

“사양하지 않아도 돼. 가성비가 괜찮을 것 같아서 투자하는 거니까.”

“웬 가성비?”

밀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고 아르 역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노예가 암살자보다 비싼가? 아닐 것 같은데.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나는 되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밀렌에게 말했다.

“노예 한 명 값으로 숙련된 암살자 하나를 얻는 거 굉장한 이득 아니야? 네가 찾는 그 노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몸값보다 비싸? 그 노예만 찾아 주면 충성이든 목숨이든 원하는 건 다 바치겠다며.”

“설마 앞으로 저 월급 안 주고 부려 먹으려는 거 아니죠? 그건 안 됩니다!”

“섀도 나이트 월급은 할바마마가 준다며? 그건 내 돈 아니니까 네가 얼마를 받든 상관없어. 대신 섀도 나이트를 움직이기는 명분이 부족한 개인적인 일들은 다 그대 몫이 될 거야.”

나는 말을 마치고 황궁에서부터 메고 나온 나들이 가방에서 뚱뚱한 도자기 인형을 꺼냈다.

“자, 그럼 넌 내 노예가 되는 것에 동의하는 거지?”

“전 분명 충성과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지 노예가 되겠다고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일단은 알았다고 할게요.”

“그게 그거지, 뭐. 그런데 그 인형은 뭐예요?”

“이거? 저금통.”

“고작 용돈 모은 수준으로 무슨 노예를 산다는 겁니까!”

“그래? 꽤 많은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볼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자기 인형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바닥에 내리쳤다.

와장창!

도자기 안에 들어 있던 금화가 도자기 파편과 함께 와르르 쏟아졌다. 10골드짜리를 포함하여 얼핏 보아도 천 골드는 가뿐히 넘어가는 액수였다. 얼마인지는 세어 봐야 안다.

“이래 봬도 전부 금화야. 은화 없어.”

“이…… 이거……. 하,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누군 평생 모아도 황도에 집 하나 마련 못 해서 남의 집에 이름만 얹어 놓고 사는데 누군 어린애가 용돈만 모아서……! 와아!”

밀렌이 자괴감 든다며 동전을 세고 있는 동안 아르가 쓰레기통을 가져와 도자기 조각을 주워 담으며 물었다.

“이걸 언제 다 모으셨습니까? 보아하니 밀렌과 약속을 지키려고 그 단기간에 모은 액수는 아닌 듯한데.”

“몰라,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됐어. 유모랑 시녀들 몰래 틈틈이 모았던 거거든.”

“이 많은 걸 어디다 쓰려고 이렇게 모으셨어요?”

나는 아르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추고는 반쯤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대와 야반도주하려고.”

***

나는 황궁으로 돌아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하루를 보냈고 평소보다 살짝 일찍 잠이 들었다. 아니, 잠든 척을 했다. 그리고 해가 지자마자 몰래 황궁 밖으로 나왔다.

‘미안해요, 고모님. 오늘은 좀…… 그렇고 그런 곳을 갈 거예요.’

나는 마차 대여소에서 미리 빌려 둔 작은 마차를 타고 황도 밖을 빠져나갔다. 고개를 돌려 머리 뒤에 달린 좁은 유리창을 내다보았다. 황도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불법 노예 거래가 이루어지는 임시 거래소의 초대장이었다.

우리가 가려는 장소가 장소인 만큼 마차 안에는 나를 밀착 호위 하기 위해서 아르가 함께 탑승했고 마부는 따로 구하지 않았다. 대신 밀렌이 마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몇이 마차 주변을 몇몇이 은밀하게 호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이번에 몰딘 남작이 도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팔아 버렸다는 노예들이 대거 나올 예정이라 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내가 떨리는 거지?”

밀렌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그는 몇십 년을 찾아 헤맸다는 사람 찾으러 가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믿기 힘들어서 현실성이 없는 걸까?”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몰딘 남작은 노예 거래를 꽤 자주 했습니다. 밀렌도 늘 그걸 주시했을 거고요. 그런데도 여태 남작이 되판 노예 중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무조건 나왔겠네.”

“글쎄요……. 10년 전에 데리고 있던 노예를 그 작자가 여태 데리고 있을 것 같지도 않군요. 아마 밀렌이 모르는 틈에 다른 곳으로 팔렸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르가 쓰게 웃었다. 나는 마차 벽 너머, 마부석 방향을 가만히 응시했다. 벽밖에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밀렌의 쓸쓸한 등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

“그렇다고 해도 밀렌에게는 10년이 넘도록 실망의 연속이었으니까요. 아마 의식적으로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뒤척였다. 가장 값이 쌌던 2인용 마차 내부는 몹시 좁아서 허리가 뻐근했다.

“으윽! 돈 좀 더 주고 비싼 거 타고 갈 걸 그랬나?”

내가 투덜거리자 아르가 마차 문고리를 잡고 슬며시 일어났다.

“나가겠습니다.”

“아니, 너 나가라고 한 건 아니고.”

“안에 있으니 답답해서 멀미 나던 참이었습니다.”

아르가 마차를 세우려고 밀렌을 부르려던 찰나, 내가 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그대는 꼭 마차만 타면 멀미가 난다고 하는구나.”

“멀미가 심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항상 내가 좁다고 해서, 내가 위험해서. 누굴 바보로 아는 것이냐? 내가 심심하니 내리지 마.”

혹여 내 말을 무시하고 내릴 것 같아 나는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손끝에서 맥이 느껴졌다. 손끝이 따뜻했다. 파닥거리는 박동도 조금씩 빨라졌다.

어느새 자리에 얌전히 앉은 그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하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바닥이 손끝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던 그 순간 이유 모를 다급함에 재빨리 그것을 움켜쥐었다.

당황하는 나를 향해서 더 당황한 표정을 짓는 아르를 향해 나는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내리지 말라 했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내릴 건데요.”

그리고 우리 둘 사이로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아르였다.

“그런데 저하.”

“왜?”

“그 많은 돈은 대체 왜 모은 겁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그대와 야반도주하려고 모았다.”

여전히 포개어진 손바닥으로 확연한 떨림이 전해졌다.

어두운 밤, 빛도 없는 공간, 마차 바깥의 말발굽과 바퀴 소리로 요란해 귀까지 먹먹한 곳에서 손바닥이 맞닿은 감촉만은 몹시도 예민했다.

“장난으로 물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장난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일이 잘못되어 지난 삶과 같은 결말이 반복된다면 이번에는 얌전히 사약을 마셔 줄 생각은 없다. 내가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구심점을 잃은 내 사람들이 무너지고 죽을 테니까.

정말로 유사시 아르와 함께 황궁 밖으로 야반도주하려고 모았던 돈은 맞다. 다만 그러기엔 지금은 고모님께서 굉장히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계셔서 의미가 없어진 돈이 되어 버린 것일 뿐.

더불어 그의 말대로 내가 반쯤 장난처럼 대답한 것도 맞다.

그에게 이렇게 장난 어린 말을 건넬 때마다 이렇듯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도리어 두근거려서 그것이 너무나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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