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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95화 (95/148)

95화

섀도 나이트들은 자신들의 건물에 불시에 찾아온 나를 향해 별로 놀라지 않은 듯 평소처럼 예를 갖추었다.

“밀렌이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새롭게 섀도 나이트의 단장이 되어 버린 밀렌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처음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밀렌, 아니 단장을 부를까요?”

“됐어. 밀렌 빼고 현재 한가한 인원을 다 불러와 줄래?”

곧 할 일 없는 사람들로 지목된 인원이 홀에 모였다. 총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로팅엄이 있었고 아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그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일전의 일은 나의 불찰이었다. 내가 생각이 짧아 그대들을 곤란하게 했다.”

그러자 그들은 내 사과가 몹시도 의외라는 듯 놀라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저하!”

“경들에게 부탁이 있어 왔다. 미리 말하지만 레이하임과 관련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령도 아니고 제국의 안위와 관련한 일도 아니니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이렇게 말해도 쉽게 거절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대답하지 말고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만 아르에게 따로 말해 주면 된다.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이 누구인지 난 어차피 이름도 아직 다 못 외워서 기억을 못 하니 걱정할 것도 없고.”

내 서두가 몹시 길어지자 잠시 후 로팅엄이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밀렌 이 개자식이 우리 저하 기를 죽였어……!”

다른 섀도 나이트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누구 하나가 말했다.

“저하, 오해가 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제국의 기사가 아니라 황제 폐하 소유의 암살단입니다.”

그게 뭐?

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일이라도 그냥 명령하시면 됩니다. 우리 월급은 제국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황제 폐하의 비자금에서 나오거든요.”

“진짜?”

“네. 물론 아무래도 모시는 이가 황제 폐하이기 때문에 황권과 정치에 관련된 첩보 등을 주로 하긴 합니다만…… 뭘 명령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사실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를 그런 정치적인 일에만 이용하셨습니다만, 사실 아주 불합리한 명령만 아니라면 아무렴 어떻습니까.”

불합리한 명령. 그건 곧 신하를 사지로 밀어 넣는 암군.

자신의 명령이 신하를 죽인다는 걸 알면 폭군이요, 모르면 암군이다. 폭군과 암군은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 끗 차이다. 그 미세한 간격은 멀리서 보면 티도 잘 나지 않아서 역사는 암군이든 폭군이든 그냥 전부 폭군으로 기억한다.

“멜리야, 성군이 되어 다오.”

나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신중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때 내가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로팅엄이 당황하며 말했다.

“저하, 진짜 괜찮습니다. 저번에 밀렌 단장이 했던 말은 그냥 흘려들으세요. 그건 밀렌이, 아니 단장이 너무 과했던 겁니다. 저희가 경험적으로 아니다 싶은 게 있다면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 순간, 이런 일에 섀도 나이트들을 써먹어도 되나 안 되나 며칠을 끙끙대면서 고민하던 내 지난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 여태 뭣 때문에 고민했던 것이며 무엇 때문에 밤마다 속이 상해 훌쩍였던 것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땅굴을 파고들어 갈 기미가 보이자 그들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하, 왜 찾아오신 겁니까?”

그 덕분에 정신이 든 나는 처음 여기 왔던 목적을 떠올렸다.

“몰딘 남작의 노예였던 어떤 여자를 찾고 있다. 남작이 도주 전에 처분했다는 노예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있을까? 아마 노예 시장에 나올 텐데 그곳에 입장할 방법도.”

밀렌이 찾아 달라 부탁한 그 몰딘 남작의 노예라는 여자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자유민으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서류를 확인한 적이 있다. 굳이 몰래 구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손에 넣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남작이 도주 직전 팔아 버린 노예들에 관한 건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고모님도 거기까지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신 것 같았다.

내 앞의 기사 아닌 기사님들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살짝 허무한 듯한 눈빛으로 외쳤다.

“겨우 그거 시키려고 그렇게 걱정을 하셨던 겁니까? 그거야말로 정말이지 별로 어려울 것 없습니다!”

***

엔델포프 황제 직할령에 가장 먼저 첫 번째 치료제가 풀렸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지역에도 연달아 치료제가 퍼지면서 사태는 사그라지는 듯했다.

직격으로 피해 입은 도시들의 경제는 거의 파탄 수준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엔델포프와 상업적으로 많은 교류를 하는 물류 도시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에오넬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귀족들은 그 돈이 전부 전염병 치료제에 들어가는 허브에 매긴 관세에서 나왔다는 걸 합리적으로 추측해 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정도면 황태녀파와 황자파 양쪽이 비교적 공평하게 이득을 취한 거라고 말했다.

황자파는 명예를 회복하고 민심을 얻었고, 황태녀파는 재난으로 파탄 난 제국 경제를 부양할 국고를 채우고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재난 통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사태가 진정이 될 무렵 사람들의 관심사는 새로운 이슈에 쏠렸다. 전 황태자 부부의 사고, 그리고 그 사고를 둘러싼 의문.

황제는 손에 든 편지를 꼼꼼하게 읽고는 마론 백작에게 넘겼다.

“없애게.”

백작은 곧 발코니로 나가 편지에 성냥불을 붙여 완벽하게 태워 버렸다.

“에오넬이 몰래 보내라고 했다고?”

말을 마친 황제는 이내 콜록거리다가 자신의 호위대장인 글로렌스를 쳐다보았다.

“예. 폐하. 황태손 저하의 검술 수업 상담을 핑계로 저를 불러내어 마론 백작 각하를 통하든 직접 전하든 폐하께 은밀히 전하라 하였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글로렌스를 내보낸 다음 마론 백작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알고 있었나?”

“무엇을 말입니까?”

“하긴, 알았다면 내게 진즉 이야기를 했었겠지.”

황제는 몸을 두어 번 뒤척이고는 이어 말했다.

“내가 에오넬에게 양위한다고 했을 때 세르피스 후작이 왜 반대했는지 알았어.”

“왜 그랬답니까? 역시 뭔가 이유가 있었군요. 세간에 떠도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그냥 믿을 분은 아니실 줄 알았습니다.”

“자네 말투를 보아하니 세르피스 후작을 의심하고 있었군.”

“아뇨, 소문을 믿는다기보다는 그냥 이유가 뭘까…….”

황제가 혀를 차자 마론 백작은 어색한 기침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후작이 한 건 별것 없어. 내가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 주려는 거지.”

황제는 “끙-”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마론 백작은 그런 황제를 옆에서 부축했다.

“세간에서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다지? 내가 황실에서 벌어진 친족살해라는 치부를 숨기려고 아들의 의문사를 사고사로 조작한 비정한 아비라고…….”

사실 그 소문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황제를 비판하는 내용인 건 아니었지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마론 백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고 황제도 딱히 그에게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내가 쓰러져 있던 동안 읽지 못한 지난 신문들을 전부 가져와. 그리고 사람을 풀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조사해. 몰래 할 필요는 없네. 사람들이 ‘황제가 이제 기운을 차리고 슬슬 정무를 볼 준비를 하려나?’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기만 하면 돼.”

“그 부분은 이미 폐하께서 정신이 드시자마자 황태녀 전하께서 진행해 두셨습니다.”

“그래? 그럼 공식적으로 발표할 이야기가 있으니 귀족 대표를 소집하게.”

***

나는 검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다며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조는 척 늘어졌다. 그렇게 방에서 지쳐 잠이 든 척 유모와 시녀들 몰래 아르와 함께 황궁 바깥으로 나와 아지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밀렌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가 방 한가운데에 있는 흔들의자에 푹 파묻혀 앉았다. 곧 아르가 우리 세 명 몫의 음료를 내오고는 밀렌 옆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이제 이야기해 주십시오. 왜 저희를 여기까지 끌고 나오신 겁니까?”

“그러게요. 은밀한 이야기라면 황궁 안에서도 얼마든지 몰래 만날 수 있잖아요. 섀도 나이트 건물이랑 이어지는 비밀통로도 찾았다면서.”

둘의 재촉에 나는 며칠 전 밀렌 몰래 섀도 나이트 몇몇을 동원해 얻어 낸 불법 노예상에 관한 자료를 그들 앞에 펼쳤다.

말이 쉬웠던 거지 사실은 섀도 나이트 여섯 명이 기존에 진행하던 임무를 전부 미뤄 버리고 이 일에만 열흘 가까이 집중 투자해서 얻어 낸 정보였다.

내가 오해를 했었다. 섀도 나이트의 ‘쉽다.’라는 말은 ‘목숨이 위험한 일은 아니네요.’라는 것일 뿐 결코 ‘간단하다.’는 표현이 아니었다.

“몰딘 남작의 노예가 있는 곳을 찾았다. 급하게 팔고 도망친 만큼 여기저기 정보를 많이 흘렸더라고.”

“그 인간은 평소에도 정보를 많이 흘렸어요. 다만 내가 찾는 사람을 못 찾았을 뿐이죠.”

문제는 그거였다. 밀렌이 찾는 노예, ‘금발에 붉은 눈을 한 밀렌 또래 여자’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이번에는 남작이 노예를 한둘만 거래한 게 아니라 한꺼번에 모든 노예를 다 처분했으니까. 혹시 모르잖아?”

몰딘 남작이 도주 직전 노예를 대거 판매한 곳이 이번 달에만 노예시장을 다섯 번이나 열 예정이란다. 다른 노예상이 달에 한 번 거래소를 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확실히 이렇게 자주 여는 거라면 몰딘 남작에게서 사들인 노예들을 빨리 처분하려는 목적이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밀렌의 목소리는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노예시장의 거래일과 거래소 리스트를 자세히 살펴본 그가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날짜가 오늘인데요?”

“그래서 오늘 급하게 부른 건데?”

그 말을 듣던 아르가 밀렌의 손에서 빼앗듯이 자료를 낚아챘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합니까!”

“그야 나도 오늘 아침에 알았으니까. 자고 일어나니까 누가 내 방에 오늘 놔두고 갔던걸?”

가만히 듣던 아르가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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