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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94화 (94/148)

94화

도대체 고모님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토목사업을 시행하겠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상세한 것을 보면 기정사실 같았다.

나는 시녀들이 구해 온 자료의 사본을 대강 훑었다. 어차피 나는 전문가도 아니라 봐도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

내가 이 자료를 찾아본 목적은 그저 고모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면서 황제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배우기 위함일 뿐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고모님도 이 서류를 내가 보도록 허락하신 거였다.

나는 훑어본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천천히 아침 식사를 들었다.

“이거 나한테 보여 주려고 만든 사본이랬지? 확인했으니 소각장에서 완전히 태워 버려.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는 자료이니 가는 길에 보이지 않도록 두꺼운 봉투에 잘 싸서 가지고 가고.”

“예.”

“그나저나 지나치게 자세해. 곧 공식적으로 시행 발표를 할 것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거 이대로 시행하면 진짜 어마어마한데요?”

“그쪽 동네에 조그만 건물이라도 좀 사게?”

내가 농담조로 키득거리자 시녀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어차피 대부분은 사지도 않을 거면서.

시녀들이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아까 본 대규모 토목사업 프로젝트를 다시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내가 중얼거리자 유모가 먹을 때 자꾸 딴생각하지 말라며 내 포크를 빼앗아 떠먹여 주며 핀잔을 주었다.

“일단 먹고 얘기해요. 자, 아~.”

“아잇, 됐어. 내가 먹을게.”

그 와중에 내가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던 말을 귀담아들은 건 잔느뿐이었다.

“저도 이상한 걸 느끼긴 했습니다. 혹시 저하께서는 무엇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황실에선 저 프로젝트를 진행할 돈이 없으니까. 고모님과 재무부에 가서 그들이 하는 일을 일주일 가까이 관찰하고 공부한 적이 있었어. 그리고 그때 황실과 제국의 1년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분배하는지도 들었거든.”

내가 말을 마치자 잔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적어도 3년 정도는 해마다 풍년이 들고 재해 발생이 최소인 수준이 유지되면서 예산을 모았어야 했을 겁니다.”

“고모님은 저 돈을 어디서 다 마련하려는 걸까?”

내가 끙끙대자 벨이 손뼉을 짝 치면서 끼어들었다.

“황후 폐하가 마련하시겠지요!”

전혀 뜬금없는 의견에 모두의 이목이 벨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을 담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왜?”

“황후 마마가 뭐 하러?”

“내 말이.”

빨갛게 변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벨이 쭈뼛거리면서 대답했다.

“그, 그야 황후 마마의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돈이 많기도 하고…….”

“그 욕심쟁이들이 퍽이나?”

“황자 전하의 체면도 있고…….”

“이번에 엔델포프 전염병 치료제를 체리에가 개발, 배포 한다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걸로 체면치레는 충분할걸?”

“그건…….”

다른 시녀들이 벨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하자 벨은 말문이 막혀 쭈뼛거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거다, 벨! 조금만 더 힘내! 네가 생각하는 게 옳은 것 같아! 지면 안 돼!

결국 벨이 대답을 포기해 버렸을 때 나는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세간에 떠도는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있으니까.”

“그래서 치료제를 공짜로 풀어 버린다는데요?”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너희 치료제의 주재료가 뭔지는 들어 봤어?”

“마나 허브의 일종인 안델루아라고 하더라고요.”

“그 허브의 원산지는?”

“라파트니 공국……! 어어?”

시녀들의 입에서 도 깨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마……!”

“맞아. 제국의 기후에서는 절대로 재배할 수 없는 허브야. 값이 싸다고는 해도 100%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약초지. 그리고 수입품목인 이상 황제의 허가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지난 삶에서 이 전염병이 제국민의 대부분을 죽인 이유 중 하나였다. 약값이 너무 비쌌다.

그때는 이렇게 약이 공식적으로 유통되어 팔리지 않았다. 후작가는 허브를 밀수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밀수입한 허브는 자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은 여러 경로로 세탁되어 음지에서 팔렸다. 여기저기 유통 과정이 길어진 덕분에 약값은 완전히 미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후작가는 볼테르 황자의 체면 때문에, 그리고 돈을 노린 자작극이라는 오명을 씻어 내기 위해서 귀족 계급을 제외한 평민층에게 치료제를 ‘무료’로 배포하기로 공식적으로 약속을 해버렸다.

‘그 와중에도 귀족들에게는 치료제를 비싸게 팔아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메꾸겠다는 거군.’

어쨌든 황제 권한 대행이신 고모님께서는 후작가와 모종의 거래를 한 후 수입 허가서를 발부해 주었을 거다.

이를테면 안델루아 허브에 어마어마한 관세를 매겼다든가.

“관세가 궁금한걸…….”

***

안델루아 허브 관세가 아무리 너무하다 한들 이미 후작가는 치료제 무료 배포를 선언했다. 후작가를 제외한 누구도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그 덕분에 생각보다 민심이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랏님은 원래 도둑님이었고 후작가의 금고는 제국의 국고보다 크니까.

‘그래도 후작가가 크게 선심 썼는데 황제가 너무했네.’

민심의 반응은 딱 그 정도였다.

키옌은 아침 신문을 읽으며 이를 꽉 물었다.

며칠 전, 에오넬의 편지를 받고 황태녀 궁으로 찾아갔었다. 할 말이 있거든 편지로 새어미를 오라 가라 하지 말고 그쪽에서 황녀가 직접 오시라고 부를 것을…… 조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곧바로 찾아가고 말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때 에오넬과 나눈 대화였다.

“라파트니 공국에 무역 협상을 위한 사절을 보내겠어요.”

“그리고 제국에 대규모 경기 부양 정책으로 가장 사태가 심각한 도시를 선정해 치료제를 우선 배포하고 정비 사업을 해서 국고에서 금을 풀려고 하는데요…….”

그러니 금을 내놓아라 이거였다. 그리고 그 금을 가져갈 명분은 안델루아 허브의 관세였다.

“그럼 황녀는 내게 뭘 줄 수 있나요?”

“볼테르를 이번 무역 협상을 위한 사신단의 대표로 공국에 보내 줄 수 있습니다.”

키옌의 눈이 반짝 빛났다. 좀처럼 회복할 수 없었던 아들의 명예를 되찾을 기회였다.

“민심에 생색내 보신 지 오래되셨잖아요.”

“그게 전부인가요?”

“추가로 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아 주세요. 저는 제 결백을 증명하는 것 이상으로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휴전 제안이군요.”

키옌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 사건으로 황제까지 모함을 당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소문이 황제를 건드린 시점에서 이미 이 싸움은 어느 쪽에도 소득이 없는 소모전이 되어 가고 있었고 그건 키옌 쪽에 더 불리했다.

이 시점에서 적이 먼저 제안하는 휴전 협정이라니 달콤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눈 대화를 기록으로 남겨 서명을 받아 낸다면 이것 역시 황녀의 약점을 쥐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황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다’가 아니라 ‘퍼지는 것을 막는다’라는 말은 소문의 근원이 체리에 후작가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키옌이 빠져나가려면 얼마고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황녀는 이미 용의자로 올라 있으므로 이렇게 작성된 휴전 협정서는 잘만 이용하면 황녀를 추가로 모함할 수 있는 카드다.

‘그런데 황녀가 스스로 이렇게 자신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내게 쥐여 줄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에오넬이 말을 거는 바람에 키옌의 생각은 거기서 뚝 끊기고 말았다.

“그럼 이 건은 1년 정도 미루도록 할까요, 어마마마?”

“좋습니다, 황녀.”

키옌은 신문을 접고 시녀들을 물렸다. 그런 다음 에오넬과 비밀리에 나눈 휴전협정서를 꺼내 다시 읽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당시엔 손해날 것이 없다고 여겼기에 문서에 서명했다. 사실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삭제) 문서는 아니지만 전략적으로 이용만 한다면 유용한 것이 이런 서류다.

이런 문서는 보통 상대의 약속 이행을 법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약속을 어기고 배신을 했을 때는, 이 서류를 세상에 공개해 너 죽고 나 죽어 보자는 것이 목적이지. 서로가 상대에게 거는 족쇄이자, 자신에게 족쇄를 채워 얻는 보험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서는 공개해도 키옌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흠…….”

키옌은 다시 종이를 곱게 접어 보석함의 바닥을 열고 깊숙한 곳에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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