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새로운 임무를 내리겠다.”
나는 소파에 깊게 등을 파묻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명치 언저리에 얹었다.
고요한 가운데 내 숨소리만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레이하임을 찾는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숨소리가 참았다 터진 것처럼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가장 나이가 많다는 섀도 나이트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안 됩니다.”
“내가 불과 5분 전에 한동안은 내게 말하기 전에 자신의 이름부터 알려 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의 반대 의사를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로팅엄입니다. 레이하임 단장이 무슨 임무 중에 실종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임무 중 실종자를 수색하지 않습니다. 그 불문율을 깰 수 없습니다.”
불문율 운운하며 레이하임을 버리겠다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했다. 그리고 그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것은 핑계일 뿐 다른 것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불문율이 악습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필요해서 남았다고 생각하나? 새 단장이 말해 볼까?”
어쩐지 로팅엄은 솔직하게 말해 줄 것 같지 않아서 나는 밀렌을 지목했다. 육식 토끼라면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내게 해줄 것 같았다.
“난 단장이 어디로 갔는지 뭘 하러 갔는지 대강 알고 있어요, 황손녀님. 연락이 끊어진 순간 단장은 임무에 실패했어요. 그건 애초에 임무 난도도 지나치게 높았고 실패하면 99%는 이미 죽음이 예견된 임무였어요.”
“하지만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전서구를 보낼 수 없는 환경이라면……!”
“전서구를 보낼 수 없는데 살아 있다……. 생포됐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 귓속을 헤집자 눈앞이 하얘졌다. 밀렌은 정말 한 마디도 돌리거나 거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요, 만에 하나의 확률로 단장이 생포된 상태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런 단장을 찾으러 거기까지 우리 몇 명을 보낼 건데요? 단장을 찾으면 끝나요? 살아 있다고 해도 멀쩡히 살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반송장을 끌고 거길 무사히 탈출해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여겨요?”
“그, 그건……!”
“단장을 되찾아오자는 건 우리 중 몇몇을 더 죽이겠다는 말과 같아요.”
“레이하임은…….”
밀렌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내 턱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 순간 아르가 검을 뽑아 밀렌의 목에 들이밀었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적당히 하십시오. 그리고 저하의 얼굴에 감히 손을 대다니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어어어, 야야야야! 아르 저거 진짜 벤다! 저놈들 말려 봐!”
“같이 잡아 줘!”
아르가 사람들 손에 끌려 멀어지며 바동거리는 동안 밀렌은 목에 칼이 들어와 새빨간 핏방울이 맺히도록 꼼짝하지 않았다.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새빨간 육식 토끼의 눈동자에 집중하면 할수록 최면에 걸린 것처럼 주변의 소란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황손녀님 머릿속은 너무 꽃밭입니다. 이게 다 폐하가 오냐오냐 싸고돌아서 그래요. 온실 속 화초가 따로 없네. 아, 이런 표정 많이 봤어요.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짓는 표정이거든요. 이건 단장을 구하지 못해 슬픈 게 아니야. 단장이 죽었을까 봐 무서운 거지.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저하가 사지로 밀어 넣어 죽였을지도 모르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맞죠? 그래서 만약 단장이 살아 있다면 본인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안도하고 싶은 건가요? 그런데 만약 단장이 이미 죽었으면 그때는 어쩌시게요?”
“그건 위선이야! 난 위선 같은 게…….”
밀렌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래요? 그럼 증명해 보세요. 정 그의 생사가 확인하고 싶거든 직접 가시든가요. 멀쩡한 우리까지 다 죽이지 말고. 저하가 단장보다 아끼는 저 녀석하고 같이 가신다면 위선이 아니라는 말은 믿어 드리겠습니다. 제국 첩자는 소리소문없이 죽였을지 몰라도, 설마 그들이 제정신이 박힌 이상 제국의 황위 계승권자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 순간 멀리 끌려가 있던 아르가 어느새 풀려났는지 달려오더니 밀렌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퍽!
“윽!”
“저하께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는 충언을 했을 뿐이야. 책상에 앉아서 펜대만 굴리는 지배자들은 몰라.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그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거. 꼭 ‘저놈 죽여라’ 해야만 죽인 줄 알거든? 황손녀님도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니까 저런 소릴 하지.”
***
아멜리아는 이미 정신이 반 이상 나가 있었다.
“내가…… 레이하임을 죽였다고……? 내가 죽였어. 내가 죽으러 가라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파들파들 떠는 그 모습에 섀도 나이트의 암살자들은 두 손을 어찌할 줄 모른 채로 우왕좌왕했다.
“어…… 그러니까 저하, 그…… 원래 이런 일은 자주 있었고……. 이게 저하 때문이 아니라…….”
“야, 너 딸 있잖아. 네가 달래 봐.”
“난 내 딸도 못 달래!”
그러는 사이에 아르는 밀렌의 멱살을 잡았다.
“미쳤어? 황족 얼굴을 맨손으로 만져? 게다가 저하가 죽였다고? 저하는 가라고 보낸 적 없어. 단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간 거지!”
그러자 밀렌은 그런 아르의 손을 뿌리치고는 반대로 그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윽!”
“우리 충성심은 거저 나와? 저렇게 신하들을 아무 생각 없이 사지로 밀어 넣는 군주에게 퍽이나 충성심이 샘솟겠군. 잘 들어, 꼬맹이. 저하가 어리고 귀엽고, 그거 몇 년이나 통할 것 같아?”
그리 말하며 밀렌은 아까 아르의 주먹에 맞아 퉁퉁 부은 볼을 움찔거렸다.
“퉤!”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어 낸 그는 통증이 심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이야 다들 ‘황손녀님이 어리니까 단장이 위험한 것만 생각하고 그 이상을 계산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저걸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면 황손녀님이 황제가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밀렌의 지적에 아르는 입을 다물었다.
“황손녀를 과보호하지 마. 그런 건 진짜 충심이 아니야. 아닌 건 아니라고, 왜 아닌지 정확히 말해야 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듣게 하는 네놈은 간신이다. 충신인 척하지도 마. 여염집 아이 같으면 철없는 어른이 되는 게 고작이겠지. 하지만 저쪽은 미래의 황제야.”
“…….”
밀렌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 그는 아멜리아 황태손이 충격받을 만한 일은 최대한 피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되도록 말을 우회해서 했다.
그의 과보호가 아멜리아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난 삶에서 그녀에게 따끔하게 충언하고 훨씬 독하게 굴었더라면, 그녀는 사약을 피할 수 있었을까?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간신을 솎아 내고 훌륭히 옥좌를 얻어 낼 수 있었을까?
지난 삶까지 포함한다면 밀렌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밀렌은 아르의 몸에서 힘이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가서 달래 줘. 그리고 앞으로 지금처럼 싸고돌지 말지는 네가 알아서 해. 다만 네가 지금처럼 황손녀님을 싸고돈다면 난 이렇게 독하게 다시는 안 해. 아니, 못 해. 내가 아무리 지랄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 오히려 황손녀님과 사이만 더럽게 나빠지겠지. 난 황제의 총애 같은 것에 욕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미움받기는 싫어. 알아들어?”
***
키옌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으……!”
불안이 극에 달할 즈음 시녀 하나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진정하십시오. 황자 전하는 괜찮으실 겁니다.”
“그게 아니라!”
키옌은 화를 내려다 말았다. 지금 시녀들은 심각하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황후가 아들인 황자를 걱정해서 저러는 거라고 여겼다. 몰딘 지방의 야만족 침입을 저지하러 간 볼테르 황자가 간간이 소식을 보내오긴 했지만 황자 얼굴을 보지 못한 것도 벌써 시간이 꽤 되었기 때문이었다.
키옌이 짜증을 내려 하자 시녀들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걸 본 키옌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볼테르는 걱정되지 않는다. 영주라는 이름 때문에 몸만 가 있는 것이지 실질적인 모든 일은 함께 보낸 참모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키옌의 걱정거리는 따로 있었다.
‘그 늙은이가 어떻게 깨어났냐는 거지!’
온천 행궁에서 황제에게 약차를 홍차처럼 내려 먹였다.
“폐하, 드셔 보세요. 사하임 대륙에서는 이것이 노년에 좋다 하여 차로 우려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혈압을 낮추는, 고혈압에 좋은 차였다. 그리고 황제는 다른 사람들이 으레 그 정도 나이가 들면 혈압이 높아져 고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혈압이 낮은 편이었다. 황제가 온천을 아무리 좋아해도 궁의가 자제하라며 늘 잔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키옌은 온천에서 온천욕과 약차의 시너지를 이용해 황제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틈에 황제가 손쓰기도 전에 에오넬을 모함할 수 있었다. 용의자인 에오넬에게는 명분이 없어서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 테니까.
만에 하나 저 약차의 정체를 들키더라도 괜찮았다. ‘효능은 몰랐다. 그저 귀한 차고 저 나이에 몸에 좋다고 많이 마신다 하여 드렸을 뿐이다. 정말 모르고 그런 것이고 억울하다.’ 하고 외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황제가 깨어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좀 위험했다. 바로 때마침 엉뚱하게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황제가 황실의 치부를 숨기려고 일부러 문서를 봉했다.」
키옌은 ‘에오넬이 진짜로 범인일 것이다’라는 소문을 원했다. 이건 정말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 황제를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 황제와 키옌이 단순히 ‘같은 편이 아닌’ 것과 ‘적’인 것은 완전히 다르다. 더불어 둘의 적대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와 드러났을 때도 명백히 다르다. 황제에게 명분을 쥐여 주게 되는 것이다.
딱!
또독!
키옌은 계속해서 손톱을 깨물었다. 조각난 손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녀들이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황후 폐하! 그만하십시오. 고운 손이 다 상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톱은 이미 지저분하게 뜯겨서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황후 폐하, 수정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금색 실링 왁스로 봉인된 하얀 봉투였다. 키옌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한참을 차분하게 읽고 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