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음지에서 도는 소문에 대해 에오넬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것들은 더욱 자극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걸 보다 못한 시녀들이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가만히 계실 겁니까? 저들이 떠드는 소문 모두 앞뒤가 하나도 맞지도 않잖아요.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게 내가 되어선 안 되니까.”
에오넬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르피스 후작이 전하의 양위를 반대한다질 않습니까! 분명 간악한 무리에게 휘둘리는 겁니다.”
“자네는 세르피스 후작을 바보로 아는가?”
에오넬이 피식 웃자 시녀는 복장이 뒤집힐 것 같았다.
“자식 일이니 또 모르지요. 그래서 전하께서는 대책이 있긴 하십니까?”
시녀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치며 한숨을 토해 냈다. 에오넬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세르피스 후작이 반대한 건 아니다. 양위를 논하기 이르다고 했을 뿐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시녀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정말 후작이 내게 반기를 든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아니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왜 내게 반기를 드는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요즘 도는 소문을 반쯤은 믿는 게 아니겠어요?”
“맞아요. 그거 아니면 설명할 수도 없고요.”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오넬은 피식 웃었다.
“그 소문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알아 왔고?”
“어지간한 수도 귀족들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다들 엔델포프의 전염병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치료제가 나오면 황도 바깥까지 소문이 퍼지는 것도 순식간일 거라고요.”
에오넬의 입꼬리에 걸린 희미한 웃음에 결국 시녀 하나가 화를 내고야 말았다.
“어휴! 전하, 그렇게 웃으실 때가 정말로 아니라고요!”
하지만 이내 이어진 에오넬의 말에 그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세르피스 후작에게 나의 양위에 대해 반대 의사를 비쳐 달라고 내가 청했단다.”
***
밀렌은 레이하임이 떠나기 전에 맡긴 편지라면서 내게 편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손으로 가리고 슬쩍 펼쳐 보니 대공국에 다녀오겠다는 몹시도 짤막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걸 내가 읽고 있을 때는 아마 자신과 연락이 끊어졌을 때일 거라고. 그래도 절대로 자신을 찾지 말라고.
나는 이를 꽉 물었다. 지난 삶에서 숱하게 보아 왔던 붉은 비명이 다시 귓가에서 울렸다.
바스락-.
종이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내 이상 징후를 가장 먼저 짚어 낸 건 아르였다. 그는 내 손에서 구겨진 종이를 빼내는 척 자연스럽게 손등을 쓸었다.
“손이 찹니다, 저하. 놀라실 필요 없고 그저 연락이 잠시 끊어졌을 뿐입니다.”
그는 내게 쪽지를 모두 확인한 것이냐 묻고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에 태웠다.
그러는 동안 나를 향해 선 섀도 나이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레이하임의 빈자리가 꽤 오래갈 것 같으니 그대들의 충언대로 새로 단장을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여태 나는 그대들의 얼굴만 알고 이름만 알고 둘을 연결할 줄을 몰랐구나. 이번 기회에 돌아가며 그대들의 이름만 간단하게 말해 다오.”
나는 밀렌과 아르를 제외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었다. 곧 누군가가 손을 슬쩍 들고 물었다.
“이름만이면 충분하십니까? 그 이외의 다른 것은…….”
“얼굴과 이름을 연결 짓는 것 빼고는 이미 다 외웠으니 상관없다.”
내가 간결하게 질문에 대답하자 모두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그걸…… 저희 수십 명을 다 외우셨다고요?”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하임을 비롯한 이 기사 아닌 기사들이 내 사람이 되겠다고 찾아왔을 무렵 마론 백작님은 내게 이들의 신상과 관련한 서류를 넘겨주셨다. 유사시 고모님을 건너뛰고 내게 곧바로 섀도 나이트를 넘기는 건 할바마마의 뜻이었다는 말씀과 함께였다.
“얼굴은 방금 한 번 매칭 해서 한동안은 엉뚱한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으니 다 외운 건 아니지. 한동안은 그대들이 날 볼 때마다 알아서 자신의 이름부터 말하렴.”
“그런 뜻이 아니라…….”
그 많은 정보를 정말로 다 외웠다는 말인지 그것을 물어본 거겠지만 굳이 대답해 줄 의무는 없었으므로 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단장 안 뽑을 건가? 일단 나보다 그대들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단장으로 적합한 이를 추천받고 싶은데.”
그런데 그렇게 묻고 보니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연륜이 깊거나 유능한 이를 앞서 추천해 주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반응이 싸한 건 조금 이상했다.
누군가 적당히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추천하면, 그가 못 이기는 척 겸손을 떨며 단장 자리를 받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혹은 자신의 실력과 경력에 자부심이 넘치는 누군가가 자신을 추천해 주길 은근히 바라며 눈을 빛내거나.
그런데 이 분위기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행여 자신이 단장이 될까 두려운 것처럼 시선을 피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럼 여기 가장 오래 있던 이는…….”
내가 천천히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눈을 마주친 그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사래부터 쳤다.
“아, 사양하겠습니다. 이런 자리는 그냥 젊은 애들한테 주는 겁니다.”
아니, 정정한다. 귀찮아하는 거였다.
“기사들은 단장 자리를 굉장히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나?”
그때 반대쪽에서 누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야 그쪽은 은퇴 이후에 ‘나 황실 기사단장 출신이오!’ 하고 떠벌리고 다닐 수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우린 그 동네 분들하고 다르게 명예가 밥 먹여 준 게 아니거든요.”
여타 기사단을 대할 때와는 상당히 달랐다. 황실 예법으로 자신을 꽁꽁 싸맨 채 이야기하는 기사들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그렇다고 무례하냐 하면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황실의 예법에는 능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대신 모든 언사가 미사여구 없이 실용적이라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대들의 생각은 잘 알았다. 그럼 내가 임명하면 누가 되었든 군말 없이 하는 것으로 알도록 하겠다.”
“예!”
이번에는 모두에게서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주저 없이 옆에 선 밀렌을 불렀다.
“밀렌.”
“저요? 저……! 그치만!”
그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밀렌의 옆에 서 있던 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누가 됐든 군말 없이 저하 뜻에 따르기로 한 거 잊었냐?”
그나저나 이 아저씨들은 내가 밀렌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벌써……!
“나 아직 밀렌이 새 단장이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전 왜 불렀나요?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뭐 좀 물어보려고. 단장이 하는 일이 뭐였는지 알고 있나?”
“별거 없어요. 우리 섀도 나이트가 현장직 실무자들이라면 사무직인 정보부는 또 따로 있거든요. 첩보 임무로 얻은 자료 중 폐하께 따로 보고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단장이 수거해서 그쪽에 넘깁니다. 그거 말고는 그냥 우리들 임무 스케줄이나 임무 분배 그리고 휴가 일정 관리 정도요.”
“별것 없구나.”
내 감상에 다들 고개를 그렇다며 끄덕였다. 그리고 그걸 본 나는 이 집단이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별것 없다면서 이게 그렇게까지 서로 미룰 일이었나?
나는 이 찝찝한 기분을 재빨리 한쪽으로 치워 버린 후 말했다.
“그럼 그대가 맡도록.”
“으아아아! 왜요? 아까는 그냥 제 이름만 부른 거라면서요! 폐하께서는 가장 성실한 놈으로 고르셨었다구요!”
“그건 할바마마 기준이고. 난 내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으로 고른 거다.”
“그럼 아르를 골랐어야죠.”
나는 그런 밀렌의 칭얼거림을 칼같이 잘랐다.
“밀렌, 그대는 내가 가장 신임하는 자가 아르인지 그대인지 무슨 수로 안다고 자신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나는 이 건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레이하임의 행방에 대해 새로운 안건을 내놓았다.
***
늦은 밤, 침대에 기대어 앉은 황제는 궁의가 가져온 약을 먹은 후 그에게 무언가 건넸다. 하얀 종이에 포장된 물건이었는데 만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궁의가 그것을 열어 보자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식물의 말린 이파리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게 무엇인지 조사해 오게. 몰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저…… 폐하. 빠르게 조사하려면 어디서 난 것인지는 알아야 할 듯한데 혹시 다른 정보가 없습니까?”
궁의가 조심스럽게 묻자 황제는 “흠.” 하고 턱을 쓸어내렸다.
“이름은 모르고 사하임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추정한다네. 듣기로는 약재로도 쓰인다 하네. 그 대륙 귀족들은 주로 차를 우려내거나 술에 담가 마신다고 하더군. 몸보신에 좋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좋은 것인지, 그리고…….”
잠시 말을 끊고는 황제가 궁의에게 손짓하자 그가 황제에게 가까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이걸 내가 먹어도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