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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91화 (91/148)

91화 ‘주종관계’, ‘쌍무적 계약 관계’. 그에게는 나와의 관계가 조국에 바치는 충성이고 제국의 녹을 먹는 자가 응당 해야 할 ‘의무’일 뿐이다. 그는 나처럼 사적인 친근감으로 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못 박던 그날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나오던 투정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리고 터질 것 같은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더 좋은 걸 주겠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말을 할 때마다 폐까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르는 그런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목검을 내밀었다.

“쉬는 시간 끝났습니다.”

내가 조금 남은 체력을 쥐어짜서 목검을 들어 올리자 그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세를 교정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게 밀착하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하, 혹시 오늘 밤에 주무시지 않고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듯했다.

밤에? 기다려 달라고? 왜?

비밀통로에서, 서월궁에서 지속해 왔던 그 은밀한 만남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줄지어 스쳐 지나갔다.

두근!

침이 꼴딱 넘어갔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려던 찰나 그가 다시 말했다.

“저희가 모시러 갈 겁니다. 잠시 섀도 나이트 기숙사를 방문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과 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졌다. 터질 것처럼 빨라지던 심장 박동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왜?”

“이따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고쳐 준 자세대로 목검을 휘둘렀다.

***

검술 수업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샤워를 마쳤다. 땀에 젖어 무겁기만 하던 몸이 거짓말처럼 산뜻해졌다. 나는 벨이 해주는 정성스러운 빗질을 받으며 잔느에게 물었다.

“내 오후 일정이 뭐였지?”

“로이드 크로이젠 공자님이 3시쯤 방문하기로 하셨습니다.”

늘 있는 정기적인 만남이었다. 그는 잊어버릴 만하면 입궁해서는 얼굴을 비추었다.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까? 대신 내가 공작저로 가겠다고 전해 줘.”

“왜요?”

“세르피스 후작저에 잠시 가야겠다. 지금 바로.”

그녀는 내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어제는 내가 루디안 오라버니와 응접실에서 시녀는 물론 호위기사까지 모두 물린 채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아마 그와 관한 일이겠거니 짐작하고 있을 거다.

잔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내 궁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차 안에서 어제 밤새도록 했던 생각을 되짚었다.

루디안 오라버니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외할아버님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결론에 도달했다.

‘황실에 시집보내지만 않았더라도 죽지 않았을 딸.’

황실의 사돈, 세르피스 후작이기 전에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로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할바마마께서 그 문서를 비밀로 봉했을 때, 외할아버님께서 황실에 느끼셨을 감정이 배신감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난 삶에서 외할아버님께서 어째서 친황제파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황실과의 관계에 그리도 소극적이었는지 깨달았다. 황제에 대한 1차원적인 배신감 때문에 대놓고 황실과 척을 진다는 최악을 선택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볼테르 황자파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면서 황실에 붙어 있는 것에 가까웠을 거다. 나를 황제로 만들고 그날의 사고를 재조사해서 어떻게든 체리에 후작가를 뿌리까지 뽑아 버릴 작정이었겠지.

어느덧 마차가 후작저에 당도했다. 급하게 연락을 받은 후작저에서는 늙은 집사가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이렇게 급하게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은 아니지요?”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해요. 그냥 갑자기 할아버님이 보고 싶었어요. 바쁘신가요?”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곧 오실 겁니다.”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서 할아버님을 기다리며 과일 차 한 잔을 다 마셔 갈 즈음 할아버님께서 들어오셨다.

***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엘비어스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래서 후작 각하께서는 어쩌시겠답니까?”

“생각해 보시겠대요.”

몇 년을 가슴으로만 삭이던 감정이 그리 쉽게 정리될 리 없다.

“그런데 제 동생 만나러 오신다더니 저에게 상담받으러 오신 거였습니까?”

“로이드 님을 만나러 온 건 맞아요. 겸사겸사 이렇게 책사님을 만날 좋은 구실이기도 했고요.”

어딘가에 이야기하고 싶은데 털어놓을 곳이 없어 결국 말한다는 곳이 엘비어스 앞이라는 사실이 퍽 우스웠다.

나는 살짝 자조적으로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외할아버님이 반대한다고 할바마마께서 결심을 무르실 리 없는데 외할아버님은 왜 굳이 반대한다는 말씀을 입 밖으로 꺼내신 걸까요?”

외할아버님이 반대하는 이유는 알았으나 그걸 표명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 아무렇지 않게, 사이 좋은 척 숨겨 오다가 대체 왜 지금에 와서 황제께 반대 의견을 내비치는 것인지를 말이다.

잠시 내 물음을 듣고 고민하던 엘비어스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양위를 결심하신 이상 누가 반대를 하든 말든 표면적으로는 변하는 것이 없을 겁니다. 황태녀 전하께서 황위를 양위받는다는 사실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표면적으로 변하는 것이 없단 이야기는 물밑으로는 무언가가 변할 거라는 말이군요.”

***

나는 엘비어스와 상담 후, 공작가에서 로이드와 만찬을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굉장히 바쁘게 지나갔다.

그렇게 자정이 되었을 즈음, 섀도 나이트 두 명이 약속대로 나를 데리러 왔다.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황제궁의 궁인들이 흔히들 창고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다. 이따금 귀신이 사는 황제 궁 속의 폐궁이라고 불린다는 소문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당직 궁인들의 휴게실로 쓰였는데 누가 자살을 해서 폐쇄한 거라더라, 300년 전 황자의 난 때 궁인들이 많이 죽은 장소라더라 하는 흉흉한 말들도 암암리에 돌았다.

공식적으로는 400년 전쯤에는 무슨 청사 건물로도 쓰였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쨌든 여태 여기가 그냥 폐건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섀도 나이트 본부였단다. 그리고 건물 한가운데는 예전에 중앙홀로 썼던 곳 같은데 군데군데 깨진 샹들리에 아래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회의실이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섀도 나이트들을 쭉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인원이 꽤 많았다. 이마저도 장기 출장 임무가 있는 인원이 빠진 거라 하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터였다. 이렇게 많으니 내 방으로 찾아오지는 못하고 굳이 불러낸 것이겠지.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건 내 아지트에서 본 이후로 두 번째네. 그래서 무슨 일이지?”

그렇게 물으며 한 명, 한 명 얼굴을 확인하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레이하임은?”

“단장님이 그동안 보냈던 겁니다.”

근처에 있던 한 명이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뚜껑을 열자 돌돌 말린 작은 종이 두루마리가 일렬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레이하임 경이 그동안 보냈던 거라고?”

그렇다는 건 지금 레이하임이 외부에 나가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것도 꽤 오랜 기간.

“저하께서 단장에게 따로 임무를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건 저희도 모릅니다.”

“아! 뭔지 대충 알 것 같네.”

아마 볼테르의 출생에 관한 조사를 하러 어딘가로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분명 레이하임은 조사한 내용을 내게는 알리지 않고 고모님께 직접 말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거 내가 읽으면 되는 건가? 이제 할바마마도 깨어나셨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저하께 저희에 관한 일을 모두 넘기셨습니다. 그러니 저하께서 보시는 것이 맞습니다. 오른쪽부터 전서구가 도착한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조사 결과를 고모님께만 말하겠다던 이야기는 레이하임과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이구나.’ 나는 상자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고작 이것만 주려고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고 모두가 모인 것 같지는 않구나.”

나는 손짓으로 아르를 불러 상자를 맡겨 놓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새로운 단장을 임명해 주십시오.”

“왜? 레이하임 경이 있잖아.”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이 이상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밀렌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단장에게서 연락이 끊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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