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파이프 담배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길게 내뱉은 체리에 후작이 혀를 찼다.
“덫이다.”
뭉글뭉글한 연기가 느릿한 말을 따라서 허공에 퍼졌다.
“그럼 이제라도 배포를 취소하는 것이…….”
“안 된다.”
후작은 제 아들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후작은 키옌을 떠올렸다. 키옌은 제 오라비보다 훨씬 더 영악했다. 때때로 아비인 그마저 감쪽같이 속이기도 했다.
딸과 아들이 바뀌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후작 자리에는 어쩌면 영악하고 주도면밀한 키옌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차분한 것만 제 오라비를 닮으면 딱 좋았을 거다.
후작은 왼손으로 흰 턱수염을 슬슬 쓸어내리며 오른손에 든 담뱃대를 재떨이에 탁탁 털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배포를 늦추고 시간을 끌면…….”
“그 전에 황실에서 치료제를 풀겠지.”
이미 후작가에서 역병 치료제 개발이 끝났다는 소문은 파다했다. 이제 와 치료제를 배포하지 않는다면 황실에서 배포할 거다. 황제의 암살단이 이미 연구 레시피를 훔쳐 갔으니까. 그렇게 되면 에오넬 황태녀의 입지가 정말로 손을 쓸 수 없이 커진다.
“이스카를 괜히 죽였어.”
차라리 이스카 전 황태자를 살려 두었더라면 에오넬보다 상대하긴 쉬웠을 텐데. 정공법과 원리원칙을 선호하던 이스카가 차라리 나았다. 그가 하는 행동은 몹시도 정직했었다.
‘아멜리아가 이스카를 닮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군.’
후작은 새로운 담뱃잎을 파이프에 쑤셔 넣고는 성냥불을 댕겼다.
“후-.”
텁텁한 탄내가 담배에서 나는 건지 가슴 속에서 나는 건진 몰라도 비강을 가득 채웠다.
“치료제를 배포해.”
“하지만 아버지. 사람들이 우리의 자작극을 의심합니다.”
“상관없다. 이게 차악이야. 최악은 피했으니 되었다.”
최선과 차선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하는 김에 돈도 좀 풀어야겠지. 체리에 후작가와 볼테르 황자의 이름으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작극이니 뭐니 하며 우리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것이 에오넬이 원하는 그림이었다는 건 후작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냥 자존심만 세울 수는 없다. 자존심이 이성을 앞서는 순간 몰락한 귀족은 역사 속에 수없이 많았다.
후작은 눈앞의 아들이 꽉 쥔 두 주먹을 가만히 응시했다.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이 시퍼렇다.
후작은 혀를 찼다.
“쯧. 자존심도 상황을 봐가면서 세워야 하는 법이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들의 억눌린 숨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이래서야 불안해서 도통 이 자리를 물려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여기까지 우리가 알아서 양보하면 에오넬도 더는 건드리지 않을 거다.”
후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황실에는 이 역병이 초래한 경제적 혼란을 수습할 돈이 부족하거든.’
***
드디어 길었던 숙제가 끝났다.
자료를 머릿속에서 뽑아내는 데만 수일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뽑아낸 자료를 본 디엘로니 교수님은 다음 수업까지 그걸 표든 그래프든 아무 방법이나 상관없으니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정리하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배자는 사실 이런 걸 정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건 원래 아랫사람이 하거든요. 그래서 대부분 지배계급의 귀족은 이런 서류를 보는 방법만 배우지 만드는 방법은 배우지 않습니다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뭘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시는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내게 직접 정리하면서 깨달으라고 하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자료를 정리했을 때 깨달았다.
‘이것만 봐도 누가 적인지 아닌지 알 것 같아…….’
그리고 중립을 고수하는 쪽이 내심 어느 쪽으로 마음이 동할지. 그들에게 어떤 제의를 하면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나는 자랑스럽게 결과물을 내밀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죠?”
하나 끝날 때마다 이거 보충해 와라, 저거 보충해 와라, 끝이 없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이번 수업은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수업이 끝나고 디엘로니 교수님이 나가기 전 말씀했다.
“이번 외출로 배운 내용을 잊지 마십시오. 앞으로 저하께서 적아를 구분하고 인재를 등용할 때 이 경험은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
할바마마께서 한적한 후원으로 조금씩 산책이 가능해졌을 무렵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고모님께 황위를 양위하고 싶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그러자 세르피스 후작가가 돌연 반대 주장을 펼쳤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내 사촌이자 후작가의 후계자인 루디안 오라버니를 불러냈다. 심심하니 놀아 달라는 핑계였다.
“대체 왜 그러셨대?”
“글쎄? 할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화가 나신 건지 짜증이 나신 건지 모르겠지만. 몰라! 어른들은 너무 복잡해.”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귤 주스가 담긴 컵의 빨대를 쪽 빨았다.
역시 고모님 말대로 어른이 되면 저절로 복잡해지는 걸까.
“어른이 되면 때때로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 문제도 스스로 더 꼬아 버리곤 하지.”
“오빠는 대강 짐작 가는 일이 없어? 할아버님이 언제부터 화가 나셨다든가…….”
“아! 그 소문.”
“무슨 소문?”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루디안 오라버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시녀들과 호위기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귀 옆에서 손을 까딱였다.
“잠깐만.”
그 손짓을 따라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려다 그냥 그들을 모두 방 바깥으로 물려 버렸다. 그제야 오라버니는 자리에 앉아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마차 사고 말이야. 그거 폐하께서 사고 자료를 숨기셨었다며.”
“그거 얼마 전에 공개됐잖아.”
이미 그에 관한 소문은 상당히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증거들이 모두 고모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까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뒤에서 수군거렸고 고모님의 폐위를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이미 막무가내로 덮었던 일이었다. 게다가 증거가 명확해도 너무 명확해 오히려 아이러니하기까지 해서 누구 하나 나서서 총대를 메려는 이도 드물었다.
‘총대를 메려면 죽은 황태자비의 가문이었던 세르피스 후작가가 메야지.’
“나는 전하에 대한 기억이 아주 조금 있거든.”
“아바마마? 아니면 어마마마?”
“두 분 모두. 어쨌든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서재에서 물건을 다 부수면서 화를 내신 적이 있어. 그 정도로 화내신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그날 일은 정말 생생해. 할아버님이 화를 내신 내용으로 짐작하는 건데 아마 국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거야.”
루디안 오라버니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쳐다보며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재조사해야 한다고 했나? 단순한 사고라면서 급하게 뭘 어쩌고저쩌고 마무리하느냐 마느냐 하면서 소리를 지르셨어.
서재 바깥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그게 다야. 집사가 갑자기 서재에서 나오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대로 데리고 나갔거든. 그때 서재 안에 계시던 할아버님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 너무 무서워서 한동안 꿈에 나왔을 정도니까.”
온화하고 자상하기만 하던 외할아버님께서 살기를 뿜어 내시는 모습이 잘 상상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말하는 루디안 오라버니의 눈동자 속에는 생생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설마 외할아버님이 세간에 떠도는 그 소문을 믿으시는 건 아니지? 고모님이 범인이라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오라버니는 어디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듯한 소리를 했다.
“증거는 중요하지 않대. 황태녀 전하가 맞든, 황자 전하 쪽인데 황태녀 전하께 누명을 씌우려고 증거를 조작했든, 사고가 아닌 이상 범인이 둘 중 하나인 건 확실한 거 아니냐고.”
조금 의아했다. 범인이 둘 중 하나인 게 왜 중요하지 않지? 어느 쪽의 후계 구도에 붙을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사안이 아닌가!
그러나 이어지는 오라버니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이미 죽은 자식은 죽은 자식이니 산 자식들이라도 감싸겠다는 거 아니겠냐고…….”
그건 내가 몰랐던 외할아버님의 속마음이었다.
***
글로렌스 경의 검술 수업이 끝나고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연무장 한복판에 드러누웠다.
“흐아, 힘들어 죽을 거 같아.”
그런 내 앞에 아르가 다가왔다.
“일어나십시오.”
도리도리.
쉬는 시간은 10분. 10분이 지나면 오늘 배운 자세를 또 한 시간 무한 반복을 해야 한다. 숙제는 그게 다였지만 이럴 바엔 차라리 춤이 나았다.
“로이드하고 손 붙잡고 여기 연무장보다 두 배는 넓은 무도회장을 뱅글뱅글 도는 게 낫겠다.”
“안 일어나시면 그 말 전해 드리겠습니다.”
“로이드한테?”
“예.”
내 예동은 정말이지 가차 없다. 게다가 어지간하면 허언은 잘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알기에 이 협박이 반쯤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엄습했다.
“아직 쉬는 시간이잖아.”
“서서 쉬십시오.”
글로렌스 경도 중간에 쉴 때는 자리에 드러눕지 말라고 했는데 좀 너무한 것 같다.
게다가 누군 준비 운동으로 연무장 한 바퀴만 돌아도 수업 시작도 전에 숨 차 죽을 것 같은데 아르는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멀쩡하다는 것도 조금 억울했다.
심지어 아르는 우리 셋 중 가장 일찍 와서 연무장을 정돈한 다음 몸풀기 운동을 하고 글로렌스 경과 일대일로 황실의 고유 검술부터 배운다. 그리고 다음에야 비로소 내 수업 시간이 되는 것이다.
내게 검술은 교양이고 그에게 검술은 밥벌이기 때문에 우리 둘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서서 쉬는 건……!”
괜스레 속이 뒤틀려 서서 쉬는 게 쉬는 거냐며 투정을 부리려다 불과 얼마 전 수업 때 나눈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