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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9화 (89/148)

89화

‘그래도 저런 숙제는 좀…….’

아르가 대답이 없자 밀렌이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귀족님들은 어려서부터 밟는 엘리트 코스가 있다더니…… 극악이네.”

“귀족 아니고 황족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귀족들도…… 저 정도는 아닙니다.”

“근데 황손녀님은 그걸 다 해치운다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이긴 하다.

‘아마 저하께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숙제를 소화하고 계셨던 거겠지.’

그래도 이제 와 못하는 척할 수도 없을 테니 그저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디엘로니 교수님께서도 저하의 연령을 감안하고 과제를 내셨었고요. 아무래도 황립 아카데미 학생들을 가르치시다 보니 그쪽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하의 과제 결과를 보고 조금씩 난도를 올려 보신 것으로 압니다.”

처음 아멜리아가 아르를 붙잡고 과제 수준 좀 보라며 투정을 부렸을 땐 그나마 적당히 어려운 수준이었다.

“요컨대 저 교수는 저하처럼 어린애는 많이 가르쳐 보신 적이 없어서 간을 보면서 과제를 냈는데 황손녀님이 그걸 다 해내신 거고. 그러자 교수는 간을 더 세게 치는 바람에 어느새 저 상황이 되어 있었다는 거잖아.”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를 맞대고 도와줬는데 어느새 황태손의 과제는 더는 그가 함께 손을 대줄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몸으로 배울 일이라면 빨리 익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런 과제는 엘비어스라면 몰라도 그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녀가 도와 달라고 하는 것도 그걸 돕는 것도 좋았지만 더는 돕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녀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더 기뻤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점점 더 도울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다.

복잡미묘했다.

아르를 가만히 쳐다보던 밀렌이 일부러 숨을 크게 쉬었다.

“흐음! 불안하냐?”

몹시도 뜬금없었다. 아르는 아멜리아와 디엘로니 교수 쪽으로 시선을 한번 던지고는 밀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가 말입니까?”

“황손녀님은 한번 내 사람이라고 정한 이를 필요 없다고 버릴 성격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아직 쓸모가 많고.”

아르는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관찰했다. 때때로 언젠가는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렌 말대로 늘 불안했다.

밀렌은 살짝 찡그려진 아르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아르의 미간에 닿았다.

“너는 황태손의 검술 예동이야. 단장이 그러던데 네게는 그 타이틀의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황태손은 예동을 버릴 수 없다고 나한테 라인 잘 타라더라. 귀족들이 시종 시녀보다 쳐내기 어려운 게 그들의 유모와 예동이라던데?”

아르는 주먹을 꼭 쥐었다. 머리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알고는 있습니다.”

확실히 예동이라는 존재는 어지간한 명분 가지고는 쉽게 제거할 수 없다.

“황제에게만 전승되는 검술 배우고 싶지 않으냐? 그대가 검으로 나를 지키겠다 했으니 나는 명분으로 그대를 지켜 주겠다. 어느 미친 작자가 제 목숨을 걸지 않고서야 황태손의 검술 예동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

황제에게 전승되는 검술의 계승자라는 것, 황태손의 예동이라는 것 둘 다 너무 큰 이름이었다.

“그 검술을 배우는 순간부터 그대는 인간문화재라서 설령 내가 위험하다 하더라도 그대는 안전할 거란다. 그대가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은 가뿐히 덮어 버릴 명분이 아니더냐?”

정말이지 과분할 정도의 명분이다.

***

황도의 남쪽에 있는 제국 황립 아카데미는 황도에서 가장 큰 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황실 도서관보다도 더 큰 도서관과 제국에서 가장 큰 박물관, 미술관, 예술극장이 있는 문화사의 중심지이며 각종 연구기관도 있다.

“오늘 체험학습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아카데미에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티파티였다. 귀족들의 화려한 티파티에 비하면 상당히 검소했으나 그렇다고 초라하지는 않았다.

파티장으로 꾸며진 정원은 싱그러운 초록 잔디로 뒤덮여 있었고 낮은 덤불이 길 양옆을 장식했다. 화려한 꽃은 없었다. 그 덕분에 몹시도 깔끔하고 실용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아기자기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디엘로니 교수님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봐왔던 파티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입구에서는 누가 왔다고 크게 알리지도 않았고 초대장 검사는 디엘로니 교수의 얼굴만 보고는 생략해 버렸다.

“제가 누군지도 물어보질 않네요.”

“외부에서 교환학생을 데려온다고 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교환학생이 어느 아카데미 소속의 누군지도 확인 안 해?

“황실 파티와 다르네요.”

“귀족들 파티와도 다르지요.”

디엘로니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엇이 다르다고 콕 집어 말할 수 있을 만한 차이점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만큼은 확실히 달랐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숨을 쉬기 편하네요.”

그때 누군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저녁입니다. 디엘로니 교수님. 저번에 얘기했던 그 외빈입니까?”

“예. 교환학생 자격으로 오늘 파티에 참석했지요.”

내가 습관적으로 귀족 예법으로 인사하려 하자 디엘로니 교수님이 나를 붙잡았다.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고개로만 인사하면 됩니다.”

나는 치맛단으로 향하던 손을 거두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가벼운 동작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가 건넨 인사말은 가볍지 않았지만.

“제국에 영광을. 황립 아카데미의 학장 오클리엄 윈젤입니다.”

나는 준비했던 위장 신분으로 인사하려다 말고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아세요?”

“디엘로니 교수님이 외부에서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따로 있겠습니까? 아카데미의 재능 있는 학생들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등줄기가 싸했다.

‘이거였구나.’

디엘로니 교수님이 나를 이 디너 티파티에 데려온 수많은 이유 중 하나.

“감사합니다.”

곧 나는 윈젤 학장과 함께 아카데미 각 학과의 수석들, 성적우수 장학생들과 황실 후원을 받는 평민 장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에게는 나를 지방 아카데미에 입학 예정인 교환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대충 통성명이 끝나고 학장님과 교수님이 자리를 뜨자 그들은 곧 한결 편안해진 말투로 최근 이슈에 대해 떠들었다.

“체리에 후작가에서 곧 치료제가 배포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어?”

“듣긴 했는데 그거 후작가 공식 입장은 맞아?”

학장과 교수들 앞에서는 서로에게 존칭을 쓰던 학생들의 말투에 잠깐 위화감이 들었지만 이쪽이 더 편했다. 물론 나는 듣는 쪽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빨리 가능하긴 한가?”

누군가 대놓고 의문을 표하자 모두의 시선이 한 학생에게 몰렸다. 학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국 의학사에 전설로 길이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우리 교수님이 그러시던데.”

확률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을 위험하지 않도록 몹시도 완곡하게 표현했다. 역사에 남을 업적이라고 표현했으나 그 누구도 칭송하지 않았다. 이것이 역설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대화했고 그들이 했던 이야기들을 꼼꼼히 기억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날이 꽤 어두워졌을 즈음, 우리는 적당한 타이밍에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서재에서 과제를 정리했다.

“오늘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했고 제국의 인재들과 대화하셨던 걸 최대한 자세히 기억하라고 했었지요.”

“네.”

그 내용을 최대한 다 기억하려고 머리에 꼭꼭 눌러 담느라 힘들었다.

“과제입니다. 누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다 적고 공통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묶어서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지 정리하십시오.”

“어…… 잠시만요.”

어쩐지 불길한 직감이 차올라 나는 펜을 들어 종이에 재빠르게 과제를 받아 적었다. 디엘로니 교수님은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이점을 기대하며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함께 추측해 보십시오. 황궁 내에서 궁인들을 관찰해서 내용을 추가해도 좋습니다.”

“좀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인가를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일단 과제가 뭔지부터 받아 적어야 했다.

그리고 교수님이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과제를 쏟아 내고 떠나셨을 때 나는 종이 가득 적힌 과제 내용을 보고 울고 싶었다.

‘성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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