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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8화 (88/148)

88화

9. 명분 싸움

엔델포프가 완전 봉쇄된 지 열흘이 넘자 곳곳에서 그 여파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엔델포프에 거점을 둔 수많은 거상의 발이 묶였다. 그들이 전서구만을 이용해 업무를 하다 보니 제국민의 생존에 직결된 최소한의 물류만 유통되었다.

그마저도 엔델포프 밖에 남아 있던 물류들이었고, 엔델포프를 제외한 도시들끼리는 제대로 정비된 도로가 부족했다. 따라서 물류의 이동이 늦어지고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양도 충분치 않았다.

“이 사태가 끝나면 예산을 크게 들여 토목사업을 벌여야겠군. 관련 부서에 내 말을 전달해. 엔델포프의 전염병 사태가 정리되기 전에 토목사업 계획서를 상세히 짜서 올리도록.”

에오넬이 말하자 비서진들이 그것을 받아 적었다.

“황도에서 엔델포프와 반대 방향에 황실 소유의 적당한 영지를 물색하여 황제 직할령 경제 특수 영지로 영지를 승격하고, 엔델포프처럼 물류 중심지로 도시를 계획한다. 황도에서 그곳까지 화물 마차가 적어도 두 대 이상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게 도로를 넓히도록.”

에오넬은 비서들이 적는 것을 한번 힐끗하고는 이어 말했다.

“엔델포프와 그쪽 지방뿐 아니라 이번 일로 피해를 많이 입은 몇몇 영지를 선정하여 도로를 조금씩 넓히는 사업을 진행해. 황제 직할령이든 귀족 영지든 가리지 않고 국고를 풀어서. 인근 영지민으로 공사 인부를 대거 채용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이 사업의 첫 번째 목적이다.”

그러자 마론 백작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그렇게 전 제국적으로 시행하기엔 예산이 부족할 겁니다.”

“어마마마가 계시잖느냐?”

“예?”

무엇이 걱정이냐는 에오넬의 목소리는 몹시도 맑았다. 마론 백작은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의 경제 80%를 쥐고 있는 것이 체리에 후작이다. 제국의 국고에 있는 금보다 훨씬 많은 금을 움직일 수 있는 이가 체리에 아니냐? 이번 기회에 어마마마께서 후작가의 재산을 풀어 준다면 내 동생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온 제국민이 깨닫게 되겠지.”

전혀 동생을 사랑하는 누나 같지 않은 표정으로 에오넬이 싸늘하게 웃었다.

“언제까지고 내 동생을 천덕꾸러기로 만들 수야 없지 않겠느냐?”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때, 백작은 황태녀 전하께서 황후 마마를 홀딱 벗겨 먹으려는 심산임을 깨달았다.

***

손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황궁 출입증! 하얗게 반짝거리는 색감이 얼핏 시녀들의 것과 같은 은색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백금이다.

고모님의 서명이 선명한 외출 허가서와 함께 동봉된 이 백금 패는 내가 당당한 경로로 황궁 밖을 잠행할 수 있는 출입 허가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비밀통로로 몰래 나가지 말라는 고모님의 말 없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제 무단 외출은 끝났네요.”

유모가 놀리듯 웃었다.

“무단 외출이 가능은 하지.”

비밀통로를 이용한다면. 그런 뒷말을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생략 된 말에 유모는 살짝 화난 얼굴을 했다. 나는 급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안 그럴 거야.”

어차피 내가 받은 출입증이 황궁을 출입할 수 있다는 허가증이지 그것이 ‘내 마음대로’라는 건 아니었다.

황족 전용인 백금 패라도 근위 기사들이 사전에 연락받은 내용이 없다면 통과시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백금 패라서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궁인들의 출퇴근용 패보다 더 관리가 까다롭다.

손끝에 만져지는 동그란 장식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곧 유모가 화장대에 빗을 내려놓았다.

“자, 다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묶은 머리카락이 등에서 사르륵 펼쳐졌다. 그렇게 외출 준비가 끝나고 나는 황궁 밖으로 향했다.

황궁 문 앞까지 호위기사와 시녀들이 동행하였고 이제 밖에서는 미리 대기시켜 놓은 섀도 나이트들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은신한 채 그림자 호위를 시작할 거다.

황궁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디엘로니 교수님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일찍 나오셨네요, 저하.”

“저보다 교수님이 더 일찍 오셨는걸요.”

오늘의 수업은 현장 견학이었다.

디엘로니 교수님은 내게 제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와 정치, 경제 등 사회학 전반에 대한 것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아침 신문은 읽고 나오신 것 맞으시지요?”

“당연하죠.”

특히나 가장 중요한 고정 숙제가 매일 아침 언론사별로 나온 신문을 전부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지난 1년 동안 대 기우제 때와 같이 특별히 신문을 구하기 힘든 일이 있었던 때 빼곤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신문에서 요즘 한창 떠들고 있는 전염병 사건과 관련된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러 갈 겁니다.”

고모님과 예전에 볼테르 숙부의 일로 신문 낭독꾼을 이용해 여론몰이를 하는 건 직접 본 적이 있다.

“고모님과 비슷한 일을 본 적이 있어요.”

“아마 황자 전하의 일이겠지요? 그리고 오늘 할 건 그때 보셨던 것과 많이 다를 겁니다. 오늘은 여론에 손을 쓰지 않고 그냥 조용히 관찰할 거니까요.”

교수님이 빙긋 웃었다. 나는 가만히 교수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사실 요즘 잠행을 자주 나와서 많이 봤어요. 로즈벨리아나 제3구역의 광장, 그리고 산책을 하다 보면 황궁에서 귀족들이 하는 이야기나 궁인들이 하는 이야기도 들리곤 해요.”

교수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배운 걸 착실하게 실습하고 계시는군요.”

기특하다는 듯 웃던 디엘로니 교수님은 손을 움찔거리셨다.

“제자가 잘하고 있다면 쓰다듬으셔도 돼요.”

내가 말하자 교수님은 움찔거리던 손을 들어서는 내 정수리를 토닥토닥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잠행하며 보던 것과 똑같을 거라고 여기셨다면 오산입니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제일 먼저 로즈벨리아 거리로 들어섰다. 부유한 평민들과 귀족들이 뒤섞인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 로즈벨리아 거리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거리 입구 근처의 노상 카페에 앉아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주변 테이블의 떠드는 소리도 이따금 넘어왔다.

“체리에 후작가에서 곧 치료제를 배포한다지요?”

“이미 개발이 끝났다던데요.”

“그렇게나 빨리요? 황도에 소식이 전해진 지 고작 몇 개월 지났을 뿐인데…….”

“신문에 나왔다고 전부 사실은 아니지요. 곧 정정 보도가 뜰지도 몰라요.”

귀부인들이 홍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는 신문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읊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나는 다 마신 귤 주스를 내려놓고 디엘로니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교수님도 빈 홍차 잔을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그들과 적당히 멀어지자 교수님이 물었다.

“신문에 나온 것을 정말 그대로 떠들던가요?”

“음…… 거의 그대로 같은데요.”

“아, 질문을 정정하겠습니다. 신문에 나온 것을 사실 그대로 믿던가요?”

“아뇨.”

내가 고개를 젓자 교수님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곤 다음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광장 벤치였는데 신문 낭독꾼이 듣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누군가 돈을 주고 여기서 읽으라고 시킨 것이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교수님이 다시 질문했다.

“아까 그 귀부인들이 어떤 방향으로 그 소식을 해석하던가요?”

“그건…….”

알 것도 같은데 쉽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차마 정리되지 못한 단어들이 조각조각 머릿속을 유영했다.

“다음 숙제입니다. 다음 수업 시간까지 오늘 이 전염병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이 해석하는 방향에 대해서 전부 정리해 오십시오.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이번 사건을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언론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전부터 생각했는데…… 교수님의 수업은 점점 그 난도가 상승하고 있다. 처음에는 분명 쉬운 숙제에 쉬운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아주 조금씩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숙제들은 신문 읽기 빼곤 하나같이 미친 난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거 근데 교수님이 내 나이는 알고 내는 숙제인 걸까?’

나는 잠시 멍하게 교수님을 쳐다보다가 일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해볼게요.”

***

오늘 아멜리아 황태손의 잠행 호위를 맡은 아르와 밀렌은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아멜리아와 디엘로니 교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밀렌이 혼자 맡은 임무였으나 그는 싫다는 아르를 기어이 끌고 나왔다. 그런 아르에게 밀렌은 싫다면 끝까지 버틸 수 있었으나 못 이기는 척 따라오는 걸 보니 같이 오자고 제안하길 잘했다며 생글생글 웃었다.

어쨌든 밀렌은 디엘로니 교수가 멜리에게 내는 숙제를 엿듣다가 마시던 음료수를 잔에 뱉어 내며 경악했다.

“야, 저거 황손녀님이 가능하겠냐?”

만날 때마다 디엘로니 교수의 숙제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며 투덜거리기에 그저 투정을 부리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느 날 숙제를 가져와 도와 달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따뜻한 꽃밭에서 살던 온실 속 화초는 온실이 사라지면 죽는다. 간혹 살아남기도 하지만 그런 꽃은 드물기 때문에 온실 속 화초는 온실 속 화초다. 생명력 질긴 온실 속 화초가 많았다면 처음부터 ‘온실 속 화초’가 하나의 대명사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온실 속 화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실 속 화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온실 밖으로 떠밀었다. 온실 밖으로만 나오셔도 되는데 굳이 툰드라로 찾아가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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