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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5화 (85/148)

85화

수정궁으로 돌아온 에오넬은 팔을 돌리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잔뜩 뭉친 어깨는 뻐근했고 요추는 등 뒤로 튀어 나갈 것처럼 아팠다. 몸 마디마디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며 긴장을 풀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완전히 휴식을 취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커다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에오넬은 마론 백작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론 백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에오넬에게 털어놓았다.

황후궁에 출입했던 리만이라는 자에 대한 것부터 후작가에서 빼내 온 암호로 된 서류와 서류를 얼마나 해독했는지까지 전부.

“황후 짓이라고? 아바마마도 알고 계셨고 대책도 세우는 중이었고?”

“예.”

에오넬은 마론 백작 앞에서는 굳이 계모인 황후를 어마마마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백작 역시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에오넬은 입술을 오므렸다.

“그래서 그 대책이라는 게 얼마나 마련되어 있는데?”

세간에는 작년부터 질병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상당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신도 수를 불린다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전염병 종말론을 논하는 신종 사이비의 배후에 귀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으나 설마하니 그게 황후의 가문이었을 줄은 몰랐다.

“걔들이 내 욕을 할 때부터 저쪽 놈 중 하나일 건 예상했지만 꽤 거물이 붙어 계셨네.”

에오넬은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혹시 최근에 잠행을 나가신 적은 있으십니까?”

마론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마론 백작의 말에 숨은 뜻을 간파한 에오넬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다 알고 있네. 내가 황위를 노리고 오라버니를 죽였다고 떠든 이들이 그들이었다지? 그리고 그런 황실에 노하여 신께서 제국에 천벌을 내리고 있는 거라고 하던데?”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의 말을 그대로 가감 없이 입에 담는 에오넬의 목소리에 마론 백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따위 종말론으로 치부하기에는 리만이라는 자가 예언이랍시고 말했던 것들이 점점 사실이 되어 가고 있긴 하지. 처음엔 도대체 그런 종말론을 설파해서 뭘 하려나 했는데, 그 가짜 예언을 전부 사실로 만들어 버리다니.”

“신문에도 그들이 오래전 했던 말들이 점점 사실이 되어 가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황도에 뿌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만, 조심해야 합니다. ”

키옌 황후는 오래전, 에오넬이 신문 낭독꾼을 이용해 볼테르의 명예를 떨어뜨렸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믿든, 그런 건 내게 상관없어.”

“그러나 권력자에 대한 자극적인 내용은 대중의 믿음 여부와 별개로 빠르게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무의식을 건드리게 되고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났겠느냐는 말도 곧 나올지 모릅니다.”

게다가 얼마 전 이스카 황태자 부부의 사고에 대한 비밀 문건 역시 일부가 공개되지 않았던가. 그 문서는 에오넬이 이스카 황태자 부부를 죽였다는 소문에 굉장한 힘을 실어 줄 터였다. 아마 황후는 그것까지 계산해서 하필 이 시기에 사건을 터뜨린 것이리라.

마론 백작의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오넬은 아무렇지 않게 욕탕에서 일어나 목욕 가운을 걸쳤다.

“리만이라는 자의 몽타주를 제국 전역에 뿌려 현상금을 걸고 황족을 모독하고 전염병을 퍼뜨린 자라며 공개 수배 하게.”

목욕 가운을 두른 에오넬이 칸막이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론 백작을 향해 명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할바마마의 궁, 시종에게 할바마마의 병문안을 왔다고 말하자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 다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물론 여태 깨어나지 않으셨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는 외부에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시종들은 의식도 없는 황제에게 알현 신청이 있음을 고하는 척하고는 다시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내 뒤를 따라온 시녀들과 호위기사들을 물려 놓고는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마론 백작과 할바마마의 호위대장인 글로렌스 경이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마론 백작이었다.

“섀도 나이트들을 데리고 황궁 밖 잠행을 나갔다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섀도 나이트가 내 손에 들어온 지 벌써 열흘도 더 넘겼다. 그날 이후로 아르와 만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일부러 밀렌을 포함하여 다른 이를 그림자 호위로 데리고 나갔다 왔다.

어쨌든 잠행 사실이 이들에게는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잠행이 잦으신 것 같습니다.”

“네. 백작께서 아시는 걸 보니 고모님께서도 알고 계시겠군요.”

“예. 전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순순히 긍정하시는 걸 보니 저하께서는 굳이 몰래 나가려던 건 아니셨군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런 마론 백작을 지나쳐서 할바마마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예를 올린 다음 뒤돌아 방 한가운데 소파로 가 앉았다.

곧 마론 백작이 따라와 내 앞에 복숭아 타르트와 바나나 스무디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말을 기다리듯 앞에 섰다.

“그럼 백작께서는 제가 나가서 뭘 하는지도 알고 계셨나요?”

“모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하께서 호위로 데리고 나간 이들을 미행하는 것이 가능한 기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긴, 기사와 암살자의 전문 분야는 다르니까요. 다시 미행하세요.”

“예?”

“그들에게 굳이 고모님의 기사들을 따돌리지 말라고 할 테니 저를 다시 미행하세요. 고모님은 제 보호자니까 제 행선지와 제가 하는 일들을 알고 계실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고모님과 척을 지고 싶지 않다. 고모님이 모든 것을 숨겨서 내가 고모님을 오해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녀를 원망했었던 것처럼, 내가 겪었던 아픔과 외로움을 고모님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하는 일을 고모님께 숨기려 든다면 고모님도 나를 믿지 못하실 것만 같았다. 그럴 바엔 고모님이 나를 확실히 알고 계시도록 하는 게 나았다.

누가 내게 말해 준 것은 아니지만 이미 레이하임이 할바마마의 명령으로 내 뒷조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고모님도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누구의 입김이 닿은 것인지. 누가 나를 움직였기에 내가 이렇게 어른들의 일에 은근슬쩍 참견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백작이 내게 미행에 관해 다시 묻기 전에 미리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백작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다행히도 백작은 아까의 대화에 이어서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내가 새로이 던진 화제를 따라와 주었다.

“백작께서는 제가 밖에 나가서 한 일을 모른다고 하셨지요? 알려 드릴게요. 딱히 숨기려던 일도 아니었어요. 비공식적으로 나가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했어요. 신문 낭독꾼이 신문을 읽는 것도 들었고, 그걸 듣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들었고요.”

“설마 그거 들으러 나가셨습니까?”

“예전에 고모님이 저를 데리고 나가서 했던 일이었는걸요.”

나는 별로 특별할 것 없다는 말투로 흘리듯 말했다.

“그래서 제게 의견을 묻고 싶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문에서 뭐라고 떠들든 많은 사람이 리만의 자작극이라는 걸 예상했어요. 다만 아직 증거가 없는 것이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사건의 핵심을 짚었어요.”

“그렇더군요.”

“그렇다면 체리에 후작가는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고모님의 명예만 조금 깎였을 뿐이에요. 실질적으로 그들이 얻은 건 없어요. 백작께서는 황제의 비서로서 상당히 오랫동안 할바마마를 모셔 왔어요. 그런 백작의 고견을 듣고 싶어요.”

이번 사건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미래였던 그 시간의 축과 흐름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의 사람들은 황실에서 뿌린 리만의 현상수배지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내 지난 생에서 사람들은 고모님을 폭군이라고, 그래서 제국에 신벌이 내리는 거라고 손가락질했을까?

내 질문에 마론 백작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이 잡혔다. 인자한 미소가 잔잔한 목소리와 어우러졌다.

“그야 그들이 작전에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전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계획했던 그대로 완벽하게 성공했다면 그들은 황태자 자리를 얻었을 겁니다.”

실로 위험한 말이었다. 모반을 꾀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우리가 이 사건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엔델포프에서 연락이 오자마자 엔델포프를 봉쇄했으며, 체계적으로 준비해 두었던 대처 시스템을 전 영지에 황명으로 뿌렸습니다.”

나는 그런 백작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폐하를 원망했을 겁니다. 그건 리만이 이야기한 허무맹랑한 천벌이니 재앙이니 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 겁니다.

재난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제국을 향한 원망일 테니까요. 사실 천벌이니 재앙이니 하는 건 그걸 좀 더 자극적으로 소문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믿는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하겠지요.”

돌연, 심장이 날뛰듯 두근거렸다. 처음에는 이 재난을 완벽하게 막지 못했으니 졌다고 생각했었다. 미래를 아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일으킨 작은 파문이 주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참기 힘들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럼 이건 우리가 이기고 시작한 거네요.”

내가 확인하듯이 묻는 말에 마론 백작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 잘 통제되고 있습니다. 곧 체리에 후작이 알아서 미리 만들어 놓았던 치료제를 배포할 겁니다. 계획만큼 효과가 나오지 않은 데다가 우리에게 들켰으니 그 전에 빠르게 사건을 수습하려 할 겁니다. 그럼 사태가 진정될 거고요.”

아마 그때는 체리에 후작가에서 치료제를 배포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제국을 위해 치료제 개발에 헌신한 것처럼 꾸밀 거다. 백작 역시 내게 거기까지 말해 주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다행이에요.”

나는 활짝 웃으며 남은 바나나 스무디를 입안 가득 물고 달콤한 향을 음미했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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