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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4화 (84/148)

84화

곧 방문을 열고 레이하임과 그의 뒤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르 쪽을 돌아보자 그는 숨을 멈추고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섀도 나이트들이라는 걸 직감했다.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레이하임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동그랗게 말린 종이 하나를 바쳤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얼떨떨하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올렸다. 종이를 묶은 금색 끈이 살며시 흔들렸다.

끈을 잡아당기자 끈이 묶여 있던 자리에 발려 있던 실링 왁스가 떨어졌다. 동시에 말린 종이가 사르륵 풀렸다. 그것을 반듯하게 펼치자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할바마마의 것이었다.

“할바마마는 대체 왜…….”

작년 날짜가 적힌 종이에는 할바마마 자신이 더는 섀도 나이트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섀도 나이트는 아멜리아를 따르라는 황명이 적혀 있었다.

왜 섀도 나이트를 고모님이 아닌 내게 바로 물려주겠다고 하신 거지?

레이하임이 대답했다.

“원래 역대 황제들께서 모두 비상시를 대비해 섀도 나이트가 황제 다음으로 명령을 따라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지정하여 단장에게 항상 맡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고모님을 건너뛴다는 건가요?”

레이하임과 섀도 나이트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게 숙였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황태손 저하를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의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

볼테르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마론 백작으로부터 황제의 옥새가 선명하게 찍힌 종이를 받았다. 몰딘 지역의 영토를 황자에게 내리고 성년이 넘은 황자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황명이었다.

출가를 허락한다고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내쫓는 것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원래 이쯤 되면 황태자가 아닌 황자가 출궁하는 게 정상이니까.

‘하지만 아바마마는 지금…….’

대외적으로 철저하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지만, 황제는 지금 혼수상태다. 그렇다면 이 황명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 황제와 에오넬 황태녀의 궁에 심어 두었던 궁인으로부터 소식을 빠르게 전해 들은 황후가 볼테르 황자의 벚꽃궁으로 들이닥쳤다.

“백작!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황명을 전하는 자립니다. 자중하십시오, 황후 마마.”

“황명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지금…… 누굴 바보로 아는 겁니까?”

황후는 볼테르의 손에 들린 황명을 낚아챘다. 종이 위에 쓰인 글씨를 읽는 황후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힌 옥새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혼수상태인 폐하가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까! 말도 안 되잖아요, 백작!”

주변에서 볼테르의 시종들과 황후의 시녀들이 조그맣게 동요하는 낌새가 일었다. 마론 백작은 차분하게 준비한 말을 읊었다.

“이전부터 폐하께서 준비해 왔던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 지금 서류 정리가 끝났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쓰러지시기 전까지 저와 온천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준비하셨었다고요? 말이 됩니까, 그게?”

“황후 마마, 저도 온천에서 폐하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그곳에서도 정무를 보셨습니다.”

“난 내 아들 출궁 못 시킵니다! 황자들이 출궁을 할 때는 모두 황자비를 들인 다음이었습니다. 미혼인 황자가 나간 선례가 없어요!”

사실 내년에나 황자비를 들이려 했다. 볼테르를 출궁시키지 않기 위해 약혼녀가 있음에도 조금 더 버텼다. 볼테르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내년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출궁을 한 다음에 황자비를 들이라니! 그건 직계 황족에게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례적인 일이었고 볼테르를 비롯한 체리에 후작가에는 그만큼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백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미혼인 황녀가 나간 선례는 있습니다.”

황태녀로 봉해지기 전의 에오넬 이야기였다. 키옌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은 이어서 말했다.

“더불어 황제 폐하의 업무 대행은 황태녀이신 에오넬 전하이며, 황후 마마께서는 황제의 고유한 권한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이……!”

황후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백작은 틈을 주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간언하건대,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황궁의 안살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황후 폐하께서도 황제의 권한과 그 권한 대행이신 황태녀 전하의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섭하실 수 없습니다.”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짓는 키옌 황후에게 백작은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고는 물러났다.

***

엔델포프에서 전서구를 통해 황제께 날린 한 통의 서신. 그것으로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 덕분에 쓰러진 황제가 사실은 침실에서 정무를 조금씩 보며 요양하는 중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아니냐는 궁인들 사이의 카더라는 쏙 묻혀 버렸다.

에오넬은 전서구를 받자마자 황도의 모든 귀족을 소집했다.

귀족들이 거의 모였을 즈음, 에오넬도 도착했다. 황제가 앉아야 할 옥좌는 비어 있었다. 에오넬은 옥좌 옆에 성큼 올라가 털썩 앉은 다음 형식적인 개회식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급하니 필요한 말만 말하도록 하지. 엔델포프 인근의 영주들에게 일러 영지 내 의원을 차출하여 엔델포프의 구호에 투입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 방안을 마련하도록. 이 내용은 조만간 아바마마를 뵙고 황명으로 시행하도록 할 테니 그리 알고 서두르게. 경들은 이의 있는가?”

에오넬이 이의 신청을 기다려 준 것은 고작 2초. 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엔델포프 황제 직할령의 섭정인 베체토 백작이 엔델포프를 완전히 격리했다는군. 그동안 제국의 모든 물류 이동이 동결될 것이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제국 물류의 중심인 엔델포프는 당장 역병만 잘 관리한다면 1년 정도는 자력 생존이 가능할 정도로 성 내부에 생존 필수 물자가 많다.

하지만 그동안 엔델포프를 거쳐 전 제국으로 유통되던 물자는 엔델포프성에 갇혀 버린다.

“물가가 치솟을 겁니다.”

누군가의 말에 에오넬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나는 경들에게 대책이 있거든 말하랬지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문제를 다시 지적하라 한 적이 없는데?”

그녀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말이 나온 곳을 훑었다.

“이 사태가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으니 경들은 각자 자신의 영지에 있는 모든 식료품 및 생필품과 영지민의 인구수를 조사하여 다음 달까지 보고하라. 이것도 동의하겠지? 아, 물론 군량미도 포함해서.”

그러자 귀족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수군거렸다.

“군량미까지 보고하라니……!”

점점 숙덕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에오넬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다들 조용히 하라며 일갈하기 위해서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런 소란스러운 상태에선 자신의 목소리 따위는 가볍게 묻힐 것 같았다.

에오넬은 옆에 서 있던 호위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에오넬은 대전 구석에 놓인,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황동 호리병을 가리켰다.

“자네, 저쪽에 저 황동 호리병이 보이나?”

“예. 왜 그러십니까, 전하?”

호위기사는 그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검집으로 저것 좀 세게 때리고 오게.”

“예?”

“저거 좀 때리고 오라고. 여기가 다 울리도록.”

“아…… 그러니까…… 음…….”

호위기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시끌시끌한 저 아랫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영지의 군량미에 인구수까지 보고하라니 누굴 반역자 취급하냐는 목소리와 이런 비상시에 그런 건 당연하다는 목소리가 한데 뒤엉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뭐 하나? 얼른 가서 때리고 오지 않고?”

호위기사는 엉거주춤 구석을 빙- 돌아 황동 호리병 옆으로 갔다. 포도가 양각된 호화로운 장식용 호리병이 한 점에 저택 한 채 가격을 호가한다는 것쯤은 호위기사도 알고 있었다.

‘이걸 진짜로?’

설마 도자기도 아니고 황동 호리병이 한 번 두들긴다고 깨지기야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이상 손이 후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검집으로 호리병을 후려쳤다.

터어어어어엉!

묵직한 종소리가 홀을 가득 메우고 한참이나 메아리쳤다. 손끝과 발끝을 타고 전해지는 무거운 떨림에 소란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아직도 뎅뎅 메아리가 울리는 홀 가운데를 에오넬의 목소리가 꿰뚫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이의가 있으면 이쪽부터 모두에게 순서대로 발언권을 줄 테니 한 명씩 떠들어 보게.”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에오넬에게 지목당한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의 없는 것으로 알겠네. 지금 시간부로 물가 안정을 위해서 식료품류와 생필품의 사재기를 엄히 단속할 것이며, 이를 이용해 물가를 조작하고 부당이득을 취하는 이는 깔끔하게 단두대에 올려 황성 남문에 효수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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