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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3화 (83/148)

83화

“오호, 여태 대공비도 안 들이고 뒷소문도 없어서 고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

밀렌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만간 대공국으로 간다.”

“어? 날 대공국으로 보내려는 거 아니었어요?”

“나 없는 동안 넌 이거나 조사해. 체리에 후작가에서 너와 아르가 가져왔던 정보 중 현재까지 해독이 완료된 부분이다.”

밀렌은 아까 레이하임이 건넸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것을 천천히 읽어 보던 밀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엇? 단장, 여기 적힌 대로라면 이거 이미…….”

“맞아. 이미 엔델포프는 손쓸 수 없는 상태일 거다. 비상사태지. 마론 백작 각하께 들었는데 엔델포프에서 황제 폐하 비서실로 전서구까지 날아왔다고 한다.”

“그럼 폐하도 없는데 우리는 어떡해, 단장?”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는 황제의 명령만 따른다.

그건 여타 황실의 기사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의 명령을 기본적으로 따르되 실제로는 황실과 제국 전체에 충성을 바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다.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는 반대였다. 저들 내키는 대로 충성을 맹세했으되 실제로는 황제의 명령만 따랐다. 그들에게 2순위, 3순위란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의식이 없는 지금,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는 사실상 혼돈 그 자체였다.

레이하임은 눈을 잠시 감고 결심이 선 듯 말했다.

“지금부터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는 국정을 돌볼 수 없는 상태인 현 황제 폐하의 회복을 더 기다리지 않는다. 단장의 권한으로 장기 출장 임무자를 제외한 섀도 나이트 전원 소집 명령을 내리겠다. 불러와.”

***

아직 황제가 의식이 없다는 소문은 황궁 밖까지 퍼지지 않았다.

황제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황궁 안에서 조금씩 돌고 있었지만, 아예 의식이 없다는 건 궁인들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마론 백작을 비롯한 황제의 시종들은 매일같이 약간의 서류를 들고 황제의 침실과 에오넬의 집무실 사이를 의미 없이 오갔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궁인들은 황제가 건강에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정무만 침실에서 처리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에오넬은 서류 하나를 펼쳐 옥새를 찍었다.

“완벽하군.”

그 서류는 성년을 훌쩍 넘긴 제2황자 볼테르에게 황제가 몰딘 영지를 하사하고 출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에오넬은 그것을 돌돌 말아 봉한 다음 마론 백작에게 건네었다.

“아바마마의 침소에 가지고 갔다가 그대로 벚꽃 궁으로 가서 황명을 전하게.”

그리고 같은 시각, 레이하임을 비롯한 섀도 나이트들은 황제 대신, 황제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주군을 모실 것을 결정했다.

***

한 시간 정도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니 더 할 게 없었다.

“이제 로즈벨리아로 넘어가시겠습니까?”

“그래.”

“원하시는 경제 공부는 잘 하셨습니까?”

“조금? 그래도 난 이런 걸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만일 이해한다 말하면 저들에 대한 기만이겠지. 그러나…… 적어도 아예 보지 못했던 것보다는 분명 낫겠지?”

“그럴 겁니다.”

우리는 복닥거리는 시장을 나와 로즈벨리아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밀렌의 명의로 된 그 아지트에 들러 이번에는 아까보다 고급스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로즈벨리아에 들어섰다.

가지고 나온 돈은 100실버, 로즈벨리아에서 100실버는 밥 한 끼 사 먹으면 끝날 금액이다.

“돈도 없는데 아이 쇼핑이나 하자.”

거리를 걸으면서 쇼윈도에 전시된 것들만 눈으로 훑었다. 몇 가지 마음에 드는 것들을 마음속에 점 찍어 뒀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와……!”

어느 실링 왁스 전문점의 쇼윈도에 전시된 색색의 실링 왁스가 눈에 들어왔다. 예쁜 펄감이 자잘하게 섞인 다홍빛 실링 왁스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안에 들어가서 잠깐 볼까? 음…… 실링 왁스는 가격이 얼마나 할까?”

나는 질문과 동시에 일단은 상점 안으로 들어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실링 왁스의 가격을 점원에게 물었다.

“100실버입니다.”

“으아아, 아까 그것만 사지 않았어도!”

아까 그 모종삽, 그것만 아니었어도! 아니, 10실버짜리 은화 한 개만 더 들고 나왔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

그때였다. 나와 점원 사이에 아르의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100실버짜리 은화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포장해 드릴까요?”

점원의 물음에 아르는 나를 한번 바라보았다.

“포장이 굳이 필요하십니까? 그냥 바로 가져가실 거죠?”

“어? 난 이거 다음에 사도 되는데?”

“제가 빈손으로 나왔을 줄 아셨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점원이 내민 작은 종이 가방을 얼결에 받아 들었다. 내가 가방을 받아 들고 멍하게 서 있자 점원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영업을 시도했다.

“고객님! 이니셜을 양각한 스탬프는 필요 없으십니까?”

나는 이미 내 개인 스탬프가 있다. 황가의 문양과 함께 이니셜이 양각된 백금 스탬프였다. 내가 고개를 저으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르는?’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그런 내 시선을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스탬프도 사드려요?”

“아니, 아니! 돌아가서 갚을게! 우리 이니셜 첫 글자가 똑같으니까 두 개 파서 기념으로 하나씩 갖자.”

“저는 별로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문득 굳이 이니셜을 새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단풍잎 모양으로 새기는 건 어때?”

그냥 어떻게든 오늘 외출을 기념할 만한 무언가를 갖고 싶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실링 왁스와 스탬프를 한 세트씩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환궁하자마자 바로 갚을게!”

“됐습니다.”

“내가 사려고 한 건데…….”

“용돈 받아 쓰시면서 직장인 무시하는 거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기분을 알기 힘든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정색하는 표정이 도드라졌다. 게다가 상점 밖으로 나와서 걷는 내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없이 뚜벅뚜벅 걷기만 한다.

화났나?

몇 달 전, 엘비어스까지 셋이서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50골드의 가치가 어느 정도냐 하면요, 저놈 연봉입니다.”

“황궁 기사 봉급이 그거밖에 안 돼?”

“야, 저하시다. 화나도 참아라.”

“세전이고 수당 전부 포함입니다.”

설마 엘비어스 말대로 정말 화가 났던 걸까? 그런데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자 그가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채 내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도리도리.

“그럼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자꾸 쳐다보셨잖습니까.”

“내, 내가 언제?”

“아까부터 쭉, 계속,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내내 쳐다보셨습니다.”

한 음절, 한 음절 힘이 실린 목소리가 나를 탓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혹시 화났어?”

“제가요? 갑자기 말입니까?”

“아니, 갑자기는 아니고 저번에 엔델포프에 갔을 때.”

그렇게 말했을 때 아르의 표정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떤 의식의 흐름을 거쳤기에 그런 결론이 나온 겁니까? 아니면 제가 그렇게 쪼잔해 보였습니까?”

겉으로는 차분하게 묻고 있지만 목소리가 아까보다 살짝 커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화난 것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대체 그에게 구체적으로 뭐가 미안한 거지?’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것.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역린을 내가 자꾸만 건드리는 것 같았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나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가 몹시도 부담스러웠다. 명치가 울컥 아팠다.

“경이 웃지를 않잖아! 그 전에도 20년 가까이 나는 경이 제대로 웃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제가요? 크게 웃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웃은 적은 많습니다.”

그가 내게 지어 보이던 희미한 미소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한숨 섞인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그게 웃은 것이냐?”

“……?”

“경의 그 웃음이 정말로 기뻐서 웃은 것이냐고. 내가 보기엔 우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대는 나를 볼 때마다 슬프게 웃는 것이냔 말이야!”

그는 짧게 스쳐 지나가는 미소 끝에도 언제나 내가 넘으면 안 될 선을 그어 버리곤 했다. 조금만 그 선 가까이 다가서면 높은 벽을 쌓았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본 그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할 말을 고르듯 신중하게.

“저를 저하의 검으로만 다루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제게 감정노동까지 강요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하의 기사이고 그 업무 안에 감정노동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선을 그었다.

***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우리가 환궁하기 위해서 아지트로 돌아갔을 때, 집에는 밀렌이 와 있었다.

나는 현관을 열고 밀렌을 보자마자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외쳤다.

“잘 만났다! 내 아지트 좀 깨끗하게 써!”

“1층은 저한테 준다면서요. 전 2층은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저놈 당당한 것 좀 보게.

“내가 왜 저 빨래통에서 네 팬티까지 봐야 하는데! 저거라도 좀 숨기든가.”

“저게 보였어요?”

밀렌은 휘적휘적 걸어가 정면 끝자락에 꽉 찬 빨래통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더니 안이 보이지 않게 잘 덮었다.

“됐죠?”

그러더니 그는 나를 지나쳐서 아르 앞으로 갔다. 아르가 밀렌에게 물었다.

“오늘 쉬는 날이었습니까?”

“아니.”

“그런데 왜 여기 계십니까?”

“네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저 오늘 쉬는 날입니다.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죠.”

어쩐지 내가 둘 사이에 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슬쩍 뒤로 물러서려는데 집 안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 휴가 방금 취소됐다. 비상 소집이다, 막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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