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제3구역의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황궁이나 로즈벨리아 거리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명품 매장을 비롯하여 고급 의류와 패션 용품 그리고 귀족의 사치품과 예술품이 주를 이루는 로즈벨리아 거리와 사뭇 달랐다. 제3구역의 시장은 식료품과 생필품, 소도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 주변을 둘러보던 아르가 곤란한 듯 말했다.
“여기서 할 만한 건 딱히 없을 겁니다.”
“음…….”
중산층 평민의 경제생활을 몸소 느껴 보겠다며 막상 나오긴 했는데 할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오는 길에도 아르는 내내 와서 재미있게 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일단 가서 보기나 하자며 안내를 재촉했었다.
나는 이제 와 볼 게 없으니 차마 돌아가자는 말도 못 하고 끙끙댔다.
게다가 오기 전에 ‘성군이 되려면 다양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큰소리까지 치지 않았던가.
“없긴 왜 없어? 난 여기서 쇼핑할 건데? 돌아다니다 보면 뭔가 살 만한 게 나오겠지.”
나는 당당히 시장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흙냄새와 달콤한 과일 냄새를 시작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생선 비린내가 났다. 이따금 묵직하고 고소한 기름 탄내도 났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손에서 오가는 화폐는 전부 동화나 은화뿐이었고, 금화는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그냥 눈만 멀뚱멀뚱 뜨고 돌아다니는 걸 보다 못한 것인지 아르가 먼저 로즈벨리아로 가자고 말을 꺼냈다.
“저하, 한 바퀴만 둘러보고 로즈벨리아로 가시지요.”
하지만 문제는 로즈벨리아로 가도 할 게 없다는 거였다.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나 오늘 딱 100실버 들고 나왔어. 그러니 어차피 로즈벨리아는 못 가.”
나는 10실버짜리가 딱 열 개 들어 있는 동전 주머니를 흔들었다.
“설마 처음부터 여기만 오려고 이렇게 작정하고 나오신 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심이 곧은 거라고 해야 할지, 대책이 없으신 거라고 해야 할지…….”
“경이 요즘 들어 점점 무엄해지는구나.”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며 어깨를 으쓱한 다음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시장의 거의 한복판에 다다랐을 때, 처음으로 특이한 곳을 발견했다. 굴뚝으로 잿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오는 어느 건물이었는데 다른 곳보다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긴 어디야?”
“주물간입니다. 이 시장의 시작이 되는 곳이요.”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여기는 주물을 하는 공방입니다.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굳히면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건물 앞 가판대에 널린 쇠붙이로 된 물건들은 모양을 보아하니 각종 생활용품이었다. 그것들에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작은 무늬조차 하나 없었다. 정말이지 물건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제국 건국 초기에 이곳 황도 평민들의 생업은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때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주물간이 이곳이었는데 당시에는 화폐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농기구와 농작물을 물물교환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곳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이 이곳 주물시장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곳까지 나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아주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것들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시장의 이름도 어감이 이상한 주물시장이라고 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나는 가판대를 쭉 둘러보다가 모종삽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여기서는 기념으로 모종삽을 하나 사야겠다.”
내가 은화로 모종삽 가격을 계산하는 동안 아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념품이 왜 하필이면 모종삽입니까?”
“내 궁의 라벤더 중 가장 예쁜 것을 골라서 경에게 선물하려고.”
“받아 봤자 심을 곳도 없습니다.”
때마침 주인장이 거스름돈을 내미는 바람에 대화가 끊어졌다. 손때가 많이 탄 동화를 비단으로 만든 동전 주머니에 집어넣자 굉장한 이질감이 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모종삽은 자연스럽게 아르가 들게 되었다.
“혹시 본가에도 심을 곳이 없느냐?”
“…….”
그는 말없이 자신이 들고 있던 모종삽을 내려다보았다.
“경도 부모님이 계실 것이 아니냐. 연휴가 생기면 경이 기숙사 밖에서 지낸다고 밀렌이 그러던데. 본가로 가는 것이 아니냐?”
“글쎄요…….”
그는 내 질문을 제대로 들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답을 내놓았다. 고개가 절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어쩐지 물으면 안 될 것을 물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럼 이다음에 경이 집을 사게 되면 라벤더는 집들이 선물로 주마.”
내가 빙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하자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발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꺼내 놓았다.
“미성년인 자녀를 암살자로 만든 보호자가 어떤 보호자일 것 같습니까?”
***
황제의 거처는 몹시 넓었다. 그곳은 황제의 생활공간이면서 동시에 제국 정치의 가장 중심이었다. 그렇다 보니 쓰지 않는 건물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도 몹시 많았다.
황제궁 북동쪽의 돌벽으로 된 건물 한 채가 그런 곳이었다. 그 건물은 높다란 담장이 건물과 한참 떨어진 간격으로 한 번 더 둘러싸고 있었고 담장 안으로 드나드는 출입구는 딱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창고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안에 대체 무엇이 든 창고인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궁인은 그 근처에서 귀신을 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호기심 많고 담력 좋은 몇몇 궁인들이 그곳에 들어가기를 시도했으나 돌아온 이는 없더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그 들어갔다 나오지 못했다는 궁인이 누구인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
그런 그곳은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의 건물.
밀렌은 자신의 기숙사 방 창문을 내다보다가 창틀에 몸을 걸치고는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으아아! 일조권, 조망권 정말 최악!”
높은 담장이 멀찍이서 경치를 절반이나 가리고, 나머지 절반은 높게 자란 나무가 다 가리고 있다. 언제나 그림자가 진 방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걸 보고 복지가 개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그들의 직업 특성상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선배들이 다들 악착같이 돈을 모아 황도 근처에 집을 사서 그 먼 거리를 출퇴근하는 이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기숙사 생활이지만 환경이 이렇다 보니 황제 폐하도 그들의 출퇴근을 알음알음 눈감아 주고 계셨다.
이따금 대선배님들은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야, 라떼는 마리야! 선황제 폐하가 살아 계셨을 때는 말이야! 출퇴근 그런 거 꿈도 못 꿨다아아아, 이 말이야! 요즘 짜~식들이 군기가 빠져 가지고 말이야!”
“암살자한테 군기는 개뿔.”
밀렌은 지난밤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숙취에 찌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드디어 내 집(사실은 아멜리아의 아지트)을 장만했다며 그 집으로 가겠다는 밀렌을 선배들은 부득불 기숙사로 데려왔다.
“아아아, 아르 그 자식 부러워 죽겠다.”
아직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매번 회식 때마다 빠질 수 있는 그놈이 미친 듯이 부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어린놈을 데리고 술집을 출입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어찌저찌 주인장 눈을 피해서 끌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단장 레이하임이든 황제 폐하든 걸리는 날엔 다 같이 죽을 거다.
밀렌은 비척비척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아르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쨘! 야, 뭐 하고…… 얘 어디 갔지?”
휑했다. 밀렌은 그대로 방문을 닫고 이번에는 단장실로 향했다.
“단장! 단장, 단장! 아르한테 오늘 임무 있었어요?”
레이하임은 책상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첩보 서류를 훑으며 밀렌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그럼 얘 대체 어디 갔지?”
“그보다 너 잠깐 이리 가까이 와봐.”
레이하임이 손을 까딱까딱 흔들자 밀렌은 레이하임의 코앞까지 뽀르르 다가왔다. 그 순간 레이하임의 주먹이 밀렌의 뒤통수를 세게 쳤다.
퍽!
“악! 왜 때려요!”
“노크할 줄 모르나? 그보다 아르는 왜? 심심하면 일할 거나 줄까? 괜히 애 괴롭히지 말고. 그리고 조심해라. 황태손의 검술 예동이 되실 몸이시다.”
“어? 황손녀님이 검을 배운다고요? 황손녀님 몸 쓰는 건 젬병이던데. 규칙적인 산책 말고는 되도록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시는 것 같고.”
“네놈은 그게 중요하냐?”
레이하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서류뭉치 하나를 밀렌 앞으로 던지듯이 휙 밀었다.
“이거나 조사해 와.”
“이게 뭔데요?”
“첩보.”
첩보라는 말에 밀렌이 두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면서 휙휙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레이하임은 그런 밀렌의 행동을 잠시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 저거 읽긴 하고 넘기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밀렌이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툭 내려놓았다.
“단장! 이거 너무 긴데, 요약 좀 해줘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레이하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파트니 대공에게 숨겨 둔 아들이 있다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