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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81화 (81/148)

81화

“나 나갔다 올게.”

아침을 먹자마자 꺼낸 내 말에 잔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왜? 나 오늘 일정 있어? 아, 저녁에 로이드 공자님과 약속이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어.”

“딱히 오늘 낮의 일정은 없습니다만, 저하, 어디를 다녀오시려는 겁니까? 호위를 준비할까요?”

“아니, 수행할 호위는 따로 있어. 조용히 나갔다 올 거야. 공자님과의 약속 시각에 늦지 않게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저번처럼 아픈 척하고 시녀들에게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다음 몰래 나갈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미 몰딘 남작과 있었던 사건 때문에 그때의 일을 다 들킨 마당에 굳이 내가 몰래 외출할 방법을 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날 일이 내가 고모님의 허락하에 잠행했다가 벌어진 것처럼 되었지만, 시녀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그랬던 터라 그들은 처음에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때 참으로 오랜만에 유모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한 건 덤이었다.

어떻게 몰래 나갈 수 있었냐는 잔느의 침착한 물음에 나는 비밀통로를 알고 있다고 답했다.

비밀통로를 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숨길 것도 없었다. 황궁 곳곳에 이미 오래전부터 비밀통로가 많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흐르면서 궁인들 사이에서 통로의 존재가 밝혀지는 바람에 아예 입구를 봉쇄하여 깊게 벽을 발라 버린 곳도 많았다.

그러니 밝혀지지 않은 비밀통로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내가 어렸을 적 숨바꼭질을 하다 그걸 발견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는 ‘통로의 존재는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라.’라며 신신당부했다.

“이번에는 몰래 나가지 않으려고. 나중에 들켜서 놀라게 하거나 나를 못 믿게 하고 싶지 않아. 확실하고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어.”

“그때 나가셨을 때와 같은 수행원인가요?”

몰딘 남작의 일 때문에 그녀는 그날 내가 호위로 누군가를 데려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중요한 건 정확히 누구인지가 아니었다. 그 수행원을 황제 폐하도 알고 계시며, 황제가 은근슬쩍 존재 자체를 묵인해 버린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응. 같은 사람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믿을 만하니 그자의 존재를 묻으셨겠지요. 다녀오십시오. 단, 로이드 공자님과의 약속 시각 세 시간 전에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황태녀 전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기사들을 풀겠습니다. 황도 제3구역 밖으로도 나가지 마시고요.”

황도 제1구역은 황궁과 그 주변의 공공관청이 존재하는 구역, 제2구역은 그보다 조금 바깥에 있는 귀족들의 거주 구역과 평민 부촌, 그리고 상당한 인프라가 몰려 있으며 치안이 확실한 번화가였다. 그리고 제3구역은 중산층 평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역이었다. 그곳까지는 치안이 꽤 괜찮은 편이다. 몰딘 남작 같은 자만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알았어. 명심할게. 사랑해!”

내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잔느는 피식 미소 지으면서도 다음에는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을 거라면서 짐짓 겁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조건부 승낙을 받아 내고는 아침을 먹자마자 시녀들을 물렸다.

그리고 아르가 기다리고 있을 비밀통로 너머로 들어갔다.

***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바마마께서 편찮으신데 이렇게 놀러 나가도 되려나?’

약간의 죄책감이 섞인 이 기분을 아르에게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책 속의 것만이 지식은 아닙니다.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과 타인에게 말로 듣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역대 황제들께서도 잠행을 해왔던 것이고 황태녀 전하께서도 잠행을 자주 나가셨지요. 곧 황태녀 전하께 제왕학을 배우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오늘은 놀러 나가는 거였잖아.”

“휴식은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저하를 교육하실 때 보드게임을 주로 이용하셨고요. 놀면서 배우는 것과 각 잡고 배우는 것도 완전히 다른 겁니다. 황궁 안에서 마냥 폐하를 걱정한다고 해서 폐하께서 고마워는 하실지언정 절대 기꺼워하실 리는 없습니다.”

아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그의 말에 안심하고 우리는 곧 황궁 바깥으로 이어진 통로를 빠져나왔다. 황실 소유의 사냥터 외곽과 이어진 통로였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따라 평민 부촌에 인접한 국립공원으로 들어섰고, 그렇게 걸어서 점차 로즈벨리아 거리와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절반은 황실 사냥터, 즉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거리를 중간에 쉬었다 갔었다.

아르가 오래전 해준 조언, 그러니까 체력을 좀 기르라던 말에 따라서 매일 두 시간씩 꾸준히 빠른 걸음으로 산책한 결과 이제는 제법 체력이 붙었다.

우리는 산을 타기 쉽도록 입었던 옷을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 로즈벨리아 거리 인근의 작은 2층짜리 집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내가 밀렌의 명의를 빌려 사두었던 집이었다.

잠행할 때 이용할 거점은 필요했으나 그걸 내 이름으로 뜬금없이 구매하기에는 위험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명의를 빌려야 했다. 아르의 명의였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는 부동산 거래가 자유롭지 못한 미성년이었다.

그 때문에 집 곳곳에는 밀렌이 생활한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

“공짜로 집이 생기니 아주 신이 났구나. 이름을 빌려 주는 조건으로 1층은 자신이 자유롭게 쓰고 싶다길래 아무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더니!”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 섀도 나이트 기숙사는 그에게 갑갑할 겁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곳에서 살며 출퇴근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고 빨래는 그득 쌓아 둔 난장판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 준비해 온 나들이용 원피스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나가자. 그리고 아까 네가 한 말을 가만 생각해 보았는데, 오늘 내가 놀면서 배워야 할 것이 생각났다.”

내가 자신 있게 문밖을 나서자 아르가 집 문을 잠그고는 바짝 따라와서 물었다.

“무얼 하실 생각입니까? 안내하겠습니다.”

“경제를 좀 배워 볼 생각이란다.”

“예?”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장으로 안내하렴. 귀족들 말고 중산층의 평민들이 다니는 시장. 제3구역.”

아르의 연봉과 맞먹는다는 50골드가 평민 상류층의 연 소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도 내게 그런 건 알려 준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동안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할바마마께 성군이 되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난 정작 이 제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평민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해본 적이 없었어. 그러면서 성군은 무슨.”

내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아르는 그런 내 옆에서 내 손 앞에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올리자 그가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저하, 이 대륙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왕이나 영주 중에서 저하처럼 평민의 삶을 스스로 이해하겠다며 나서는 이가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의 질문에 들어있는 의도를 파악하려 잠시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서민들의 경제적인 부분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으냐? 물가 안정이라든가…….”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대답했다.

“제가 말한 건 그런 종이 위에 적힌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책이나 서류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러나 숫자와 문자로 이루어진 지식만 채우려는 그들과 달리, 그걸 가슴으로 이해하려 하는 군주는 저하가 유일할 겁니다.”

나는 아르의 손등에 얹은 내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아르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러자 그가 피하듯 움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재빨리 내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워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그대를 내 사람이라 여기면서도 그대의 평범한 삶, 그대의 일상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이해해 보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감히 만인에게 칭송받는 성군이 되겠다니, 내가 너무 오만하지 않았더냐?”

가느다란 떨림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손가락 사이사이 뿌듯한 힘이 느껴졌다. 피하려던 아까와는 다르게 그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잠시 대답 없이 대여섯 걸음 정도 더 걷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하, 제3구역의 시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엔델포프 특수 경제 구역 황제 직할령. 제국 물류의 중심지인 그곳에는 하루에 수천, 많을 때는 수만 명까지 성문을 드나들었다. 제국 전역에서 유통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었다.

황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엔델포프를 책임지는 바체토 백작은 최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엔델포프의 공공 보건시설에 몇 주 전부터 복통과 어지럼증, 그리고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니 공공 보건시설뿐 아니라 개인 의원 시설과 약재상에서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한 환자의 사례가 속속 보고되기 시작했다. 의원들은 하나같이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신종 질병이었다.

처음에는 식중독과 비슷해 보이는 증상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의 레스토랑을 전수 조사 했다. 그러나 이상도 없었고 환자들의 동선이 겹치는 레스토랑 역시 없었다. 그다음에는 수상한 식재료가 대량으로 유통이 되었나 하여 역시 조사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식중독과 비슷한 증상이나 실제 식중독은 아닌 듯하다는 것이 환자를 진찰한 의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바체도 백작은 그들과 함께 가장 가능성 있는 결론을 내렸다.

“전염병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각하. 아니, 이건 신종 전염병입니다. 사람의 전염병이든 농축산물의 전염병이든 일단은 물류와 사람의 이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엔델포프 중앙 보건소 소장의 말에 바체토 백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엔델포프의 모든 성문을 즉시 폐쇄하고, 황궁으로 전서구를 날려라. 사례가 최초 보고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 달 이전까지 엔델포프 성문 출입 기록을 전수 조사 하도록. 그리고 곧 긴급예산을 편성해 줄 것이니 중앙 보건소를 중심으로 연구를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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