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폐하…….”
촉촉하게 젖은 듯한 목소리는 정말로 쓰러진 황제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하필이면 이 시기에 황제가 쓰러진 상황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진실은 그녀만이 알 일이었다.
‘조금만 더 에오넬에 대한 의혹을 키우고 쓰러졌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차라리 아예 죽어 버리지.’
그랬다면 국상 중에 에오넬을 음해할 파티는 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볼테르의 진실은 안심하고 영원히 묻어 버릴 수 있었을 터인데.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텐데.
황제의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혹여라도 깨어날까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녀가 궁의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떠하시냐?”
“여전히 의식이 없으십니다. 욕창이 생기실지도 몰라 이따금 자세를 바꿔 드릴 때도 특별한 반응은 없으십니다.”
“폐하의 식사는?”
“음식물을 삼키시지 못하여 식도에 관을 넣어 미지근한 죽으로 만들어 드십니다. 약도 그런 방식으로 액체 상태로 들고 계시고요. 소화는 그럭저럭 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닌지라…….”
궁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이다. 이대로 기력이 쇠해져서 죽어 주었으면.’
키옌은 터져 나갈 것같이 두근대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꾹 눌렀다.
***
황후가 황제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며 온 신경이 그곳으로 쏠려 있는 동안 에오넬은 몰딘 남작과 관련한 사건을 빠르게 처리했다.
황태손을 손찌검하려던 귀족 사칭범을 잡는 일로 시작된 이 사건은 남작이 제 죄를 숨기고자 벌인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작은 재산을 몽땅 처분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변태 놈이 싸워 보기도 전에 도망쳤군.”
에오넬은 예상했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남은 그의 재산은 어떻게 할까요?”
“전부 경매로 처분해. 남작이 불법 노예로 데리고 있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지?”
“몇몇은 남작이 도주하기 전에 도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예 거래상에 팔아 버린 듯합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노예들로부터 남작의 죄를 입증해 줄 증언도 다수 확보했습니다. 이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여러 사람의 일관성 있는 증언이라면 증언한 자들이 노예든 평민든 재판에서 쉽게 증거로 채택될 겁니다.”
에오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몰수한 남작령에는 차기 영주가 결정되기 전까지 일단 황실의 이름으로 섭정을 보내. 그리고 남작의 재산으로는 불법 노예들에게 적절히 배상해 줘. 남는 것은 남작이 도주 직전 팔아 버린 노예들을 찾으면 배상할 것으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묶어 두고.”
에오넬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안건을 처리했다.
이제 남은 건 볼테르에게 어떻게든 이 영지를 쥐여 준 다음 궁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
레이하임은 평소처럼 마론 백작과 함께 밤에 황제의 침실에 들었다. 밤새 황제를 돌볼 궁의로 위장한 채였다.
그런 레이하임을 알아본 사람은 황제의 호위기사장인 글로렌스가 유일했다. 오늘 황제의 침실 방문 앞을 지키는 불침번을 자처한 글로렌스는 사실 레이하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글로렌스는 주변의 다른 호위기사들을 의식한 탓인지 레이하임 대신 마론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백작은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며 글로렌스와 함께 황제의 침실 안까지 그를 들였다.
주변의 시선이 사라지자 글로렌스는 마론 백작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은 레이하임 경과 나눌 이야기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각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글로렌스 경. 혹 제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면 자리를 비워 드릴까요?”
“아닙니다. 아멜리아 황태손 저하의 검술 예동 문제입니다.”
레이하임이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그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 아멜리아 황태손이 흘리듯 물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레이하임 경, 황제 폐하의 호위대장은 그대들의 존재를 알고 있나요? 그렇다면 경이 단장이니 한 명쯤은 규칙적으로 내게 보내 줄 수 있나요?”
“아……!”
짧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가 싶었는데 검술 예동을 구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멜리아 황태손이 말하는 그 ‘한 명’이 아르나 밀렌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런 일일 줄은 몰랐다.
이미 그 전부터 그녀는 둘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황태손이 섀도 나이트에까지 손을 뻗는 행동을 알면서도 묵인해 주셨다. 오히려 자신의 손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몹시도 기꺼워하셨다.
“엘비어스 크로이젠 공자에 이어서 섀도 나이트를 둘이나……. 벌써 인재를 영입할 줄 아는구나. 허허! 나도 얻지 못한 밀렌의 마음까지 얻어 가고 있으니. 그러나 걱정이다. 사람에게 무르니 나처럼 언젠가 뒤통수를 맞게 될까 늘 염려된다. 그 아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믿을 만한 자들인지 그대가 항상 지켜봐 주게.”
적아가 뒤엉킨 세상은 사람에게 정을 잘 주는 아멜리아 황태손에게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다.
황후처럼 권모술수를 들켰을 때 칼같이 꼬리를 쳐내거나 필요하다면 아군에게라도 몽땅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갈 만큼 모질지도, 영악하지도 못했다. 그 점이 분명 정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만약 정적들이 아멜리아 황태손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녀 주변 사람을 매수해서 조금만 배신하게 해도 될 거다. 문제는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를 배신하고 매수당해 줄 측근이 없다는 거지만. 그만큼 어린 나이에도 인망은 두터웠다.
그녀는 제 사람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고, 그들이 바치는 충심에 대해서 다른 이들처럼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충성심에 따른 보답도 확실했다. 그건 주로 물질적인 보상보다 심리적인 보상이었다.
‘나는 너의 충심을 믿고 있다. 네가 내 사람으로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역시 너를 지킬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측근들에게 어필했다.
그러니 정적들이 아멜리아를 해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그녀의 측근들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런다면 아멜리아는 자신의 사람을 돕기 위해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달려들 터였다.
마치 지난 늦여름의 기우제 때, 그녀의 시녀 벨이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매자 본인도 독에 당한 척하며 환궁했을 때처럼. 그녀는 기우제와 민심을 포기하고 시녀의 안전을 선택했다.
‘심지어 저하께서는 그런 자신의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악수라는 걸 알고 계셨던 눈치였어. 그러면서도 그렇게 행동했지. 그러니 인망이 그리 두터운 것이겠지만…….’
그녀는 어진 군주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군주가 될 자질은 부족했다. 그녀가 가진 어진 군주의 자질이라는 건 이스카 황태자가 살아 있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할 자질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도덕적으로는 옳았을지 몰라도 정적들이 가진 권력이 황권을 넘볼 만큼 큰 지금은 꽤 나쁜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레이하임은 그간 보아 온 황태손의 모습을 짧게 회상하고는 글로렌스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먼저 본론을 꺼냈다.
“예동으로 혹시 아르를 원하셨습니까?”
설마 버르장머리 없는 밀렌을 그 검술의 ‘계승자’로 지목하지는 않으셨을 테고.
“아! 이미 저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지만 은근슬쩍 물어보시기에 예상은 했습니다.”
레이하임은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마론 백작은 황태손이 뜬금없이 검술에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으나 설마 검술 예동으로 아르를 지목했을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자신이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르에게 그 검술을 가르치려는 것이 실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론 백작이 추측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글로렌스는 그런 황태손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한번 꿈틀하며 말했다.
“설마요…….”
“글로렌스 경께 미안하지만, 저는 백작 각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레이하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저를 찾아온 이유가 제게 아르에 관해서 물으시려는 거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을 만한 녀석인지 알려 주었으면 합니다. 제14기사단의 단장이 추천서를 써준 내용에는 견습 시절, 모든 견습 중 비견할 만한 아이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경께서 데리고 있는 사람이니 실력은 제가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서류상에 출신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서 걱정됩니다.”
“아무래도 섀도 나이트에서 정식 기사단에 넣었으니 출신에 대한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출신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정식 기사가 아니라 암살 첩보단이라, 그 특성상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건 알고 있더라도 답해 줄 수 없습니다. 다만, 아르는 폐하께서 직접 데리고 오신 아이라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레이하임은 이 정도면 답이 되었냐는 듯 글로렌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의외의 곳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마론 백작이었다.
“저,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말씀하십시오, 각하.”
“아르의 출신 문제라면 말해 줄 수는 없어도 내가 보증할 수는 있습니다. 그가 어느 파벌의 사람인지가 경의 결정에 걸림돌이 되었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는 백작의 목소리는 굉장히 확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