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황제가 그의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해 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레이하임은 황제의 그 한숨이 가진 의미가 두 질문 중에서 전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그걸 믿고 싶지 않아서 꽤 오랫동안 사실을 애써 외면해 왔다는 것까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내 탓이 아니긴. 사실 난 이스카가 죽은 것도 황후 짓이 아닐까, 그리 생각한다네. 이쪽은 의심이긴 하지만. 그런데 증거들이 너무…… 하나같이 에오넬을 가리키고 있었어. 너무나 대놓고 에오넬을 향해서 오히려 그 애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러니하지? 그래, 내가 너무 물렀어. 어리다고, 안쓰럽다고 봐주는 게 아니었는데…….”
황제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번째 황후, 키옌에게 약했다.
스물 몇 해 전 즈음, 그러니까 전 황후가 서거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수많은 귀족이 비어 버린 황실의 안주인 자리에 자신의 딸을 앉히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과년한 딸을 어떻게든 시집보내려고 벼르던 체리에 후작이 차지했다.
그 과정에 당사자인 키옌의 의견 따위는 하나도 반영된 적 없었다. 그녀가 홀아비의 재취 자리는 황후라도 싫다며 제 아버지인 후작을 붙들고 목놓아 울었다는 소문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명했다.
황제가 20년 전의 그녀에게 약했던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제 인생에 대한 결정권을 잃었다는, 그런 부채감 때문에.
그러나 그 결과가 이거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황제는 황후 자리 같은 건 평생 비워 둘지언정 그때와 같은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레이하임은 잠든 황제의 용안을 여전히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습니까? 대체 온천 행궁에서……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폐하…….”
레이하임은 자신의 주군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씹지도 않고 삼킨 듯 목이 멨다.
***
글로렌스에게서 아르를 무예 예동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날 밤에 바로 아르를 찾아 서월궁으로 향했다.
“확실히 칙칙하고 답답했던 그 미로보다는 여기가 훨씬 낫다.”
이 좋은 곳을 놓아두고 왜 여태 좁은 비밀통로 안에서 만나 왔던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한겨울이니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겨울이 지날 때까지만 부디 원래 만나던 곳에서 만나면 안 되겠습니까?”
“난 별로 춥지 않다. 너는 추우냐?”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그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서월궁에서 우연히 만났던 날 이후로 우리는 만남의 장소를 비밀통로 대신 서월궁의 달빛호수로 정했다.
나는 그가 또 잔소리할 것 같아서 얼른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아, 맞다! 너한테도 이야기해 주는 걸 깜빡했는데.”
나는 황후가 버렸던 시녀, 마리가 했던 말들과 그녀가 증거물로 내게 넘긴 연둣빛 찢어진 소맷자락을 아르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는 대뜸 자신의 실책이라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시간의 신의 신관들이 제게 그 단검을 주었을 때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
“볼테르가 황제로 집권해 있었는데도 황족이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오래 지난 일이었고 그때는 경황이 없기도 했고, 나중에는 말씀드리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지.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그 상황에서 맨 정신으로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을 테니. 그럼 라파트니 대공과 얽혀 있는 여자가 황후인 건 확실하겠어. 물증만 찾으면 되는데…….”
일전에 레이하임에게 부탁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황제 폐하의 뜻이라며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내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황태녀 전하께는 보고할 것이니 어른들이 처리하시도록 두는 것이 좋겠다고, 앞으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잊어 달라고 했다.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리라.
“제가 조사할까요?”
“아니, 레이하임을 통해서 진실을 고모님께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어차피 어른들이 우리를 어린애 취급 하는 동안은 괜히 나서서 어설프게 건드리지 말자. 꼬리가 길었다간 황후가 낌새를 느끼고 증거를 인멸할 수도 있으니.”
여기서 아르까지 조사에 가세하게 하는 건 아군의 꼬리만 늘리는 꼴이다. 몹시 비효율적일뿐더러 내 호기심이나 채우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에오넬 황태녀 전하께서 볼테르가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수확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꽤 오랜 시간 적막이 이어졌다. 차가운 밤공기가 볼을 스쳤다. 어깨에 두른 망토의 복슬복슬한 털이 겨울 밤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이만 들어가시겠습니까. 라벤더 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조금 아쉬웠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고 만난 거라면 아르 말대로 차라리 그 비밀통로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이야기만 하고 돌아가 버리기에는 굳이 이 추운 밤에 여기까지 나온 의미가 사라지잖아?
얼어붙은 겨울 호수에 비친 하늘을 좀 더 내려다보고 싶었다. 담벼락에 일정한 간격으로 꽂힌 횃불이 일렁거릴 때마다 호수에도 거울처럼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조금만 더 산책하고 싶어.”
“꽤 많이 걸었습니다.”
아르가 호수의 반대편을 건너다보았다. 듣고 보니 벌써 호수를 한 바퀴하고도 반이나 돌긴 했다. 괜스레 민망해져서 털 망토 안에 숨긴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런 내 앞으로 아르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나보다도 키가 한 뼘은 더 커서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뒷걸음치려는데 등 뒤에 커다란 나무가 닿아 길이 막혔다.
“앗!”
곧 그가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익숙한 들풀 향기가 훅 다가왔다.
“산책이 하고 싶으시다면 낮에 하십시오.”
“낮에 이미 실컷 하고 있어. 시녀들, 호위기사들 줄줄 데리고 정원에서.”
내가 투덜거리자 아르가 어린아이 어르듯 말했다.
“일탈을 원하시는 거라면, 저 모레 쉽니다.”
“어?”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눈만 깜빡거리자 그가 다시 말했다.
“전 그날 계획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내 앞에서 달싹이던 입술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검푸른 눈동자에 붉은 횃불 빛이 비쳤다.
“나는 그날…….”
역사 수업도, 예법 수업도, 문학이나 과학 수업도 하나도 없는 날이다. 게다가 로이드와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했던 데이트 약속은 저녁이다.
“낮에는 아무것도.”
“그럼 지금은 밤바람이 너무 차니 차라리 낮에 잠시 나가시겠습니까? 몰래.”
그의 입술 끝에서 흘러나오는 ‘몰래’라는 단어가 한편으로는 음험하다는 느낌마저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간질간질했다. 목구멍에서는 작은 웃음이 꿈틀거렸다.
“잠행?”
“잠행이라고 할 만큼 거창하진 않을 겁니다. 그저 누군가의 감시가 없는 곳으로 쉬러 나가는 것뿐이니까요. 지금처럼.”
“그거…….”
웃음과 함께 목에 묻혀 있던 단어 하나가 나올 듯 말 듯 혀끝에 맴돌았다.
마주친 시선이 허공에서 깊게 얽혔다. 이윽고 적막을 깨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데이트?”
뱉어 놓고 보니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리를 숙여 내 앞에 시선을 맞추던 아르가 황급히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조금 멀어지고 조금 높아진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한쪽 팔을 들어 손등으로 제 입 앞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런 주제넘은 말씀을 아뢴 건 아닙니다.”
“그럼?”
“지난번에는 불미스러운 일이 휘말리기도 했고 또…… 그렇게 말할 만한 곳을 다닐 생각도 아니고…….”
쉽게 볼 수 없는 당황하는 모습이 몹시 재밌기도 하였고, 어쩐지 이런 그의 얼굴도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하게 뿌듯해졌다. 이런 일로 뿌듯하기까지 하다니 퍽 우스웠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번에는 <꼬마 용사 페페> 같은 걸 보러 가자고 하지는 않을 거다.”
그제야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지 아르가 얼굴을 반쯤 가린 손을 내리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럼 밤 산책은 자제하시겠다는 뜻으로 알고 이만 라벤더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형적인 말 돌리기였다.
그가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등을 내밀자 바람이 우리를 한 바퀴, 쏴아아- 돌아 지나갔다.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들풀 향이 섞여 있었다.
***
이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키옌은 문병을 핑계 삼아서 황제의 황금궁으로 왔다.
궁의와 시종, 시녀들이 둘러싼 곳에서 그녀는 황제가 잠들어 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폐하, 어째서…….”
‘당신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나는 사교계 파티를 열지도 못했어.’ 이래서야 민티아를 그렇게 치욕스럽게 데뷔하도록 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미혼 영애들을 모아 놓고 에오넬을 음해할 뒷공작을 펼치려 했건만.
게다가 황제가 쓰러지는 바람에 이번에 공개된 그 극비 문서에 관한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 부분 묻혀 버렸다. 고작해야 ‘이스카 황태자 부부의 사고에 에오넬이 가장 유력한 용의 선상에 올라서 깊게 얽혀 있었다.’라는 소문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그보다 모두의 관심사는 황제의 건강 문제로 몰려 있었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이미 죽은 황태자 부부의 사건이나 과거의 진실보다 앞으로의 정세, 미래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키옌은 이렇게 어물쩍 넘겨 버릴 수 없다. 이 기회에 에오넬에게 몽땅 뒤집어씌운 다음 아멜리아가 성년이 되기 전에 옥좌를 빼앗아 와야 하는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